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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님

나사르 본주 2022. 7. 20. 20:17

<서양 자두와 장미가 있는 정물>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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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쥔 오데트

 

 

 

에이드리안 러셀이 빨간 공주를 탑에 가두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동요 같은 가십이다. 새빨간 술 냄새를 풍기며, 손에서 피가 흐르는 붉은 눈의 사내를 붙잡아 샹들리에 밑으로 끌고 나온 아리아는 여전사로 추앙되었다. 여기에는 귀부인답지 못하다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아리아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의 귀로 들어갔을 게 분명한데도.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상처 입은 용이다. 하필 부인의 탄신연인지라 치장한 의복을 입었던 게 그리되었다. ‘왕자라고 불리우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여전사 곁엔 살지고 큰 용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지적 때문이었다. 여자들의 살롱에서 정확히 무슨 얘기가 퍼졌는지 그는 몰랐지만, 아리아가 살롱 출입을 하지 않아 더욱 부풀린 소문을 갖고 음유시인을 부를 태세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리아 A. 러셀은 저녁 식사에 꼬박꼬박 출석하기 시작했다. 또 무슨 변덕인지.

에이드리안은 집사가 쟁반에 받쳐온 편지를 보지도 않고 난로에 던졌다. 인장을 보니 어머니께서 보낸 것인데, 최근의 불우한 사건을 언급할 게 분명했고, 에이드리안은 그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거다. 게다가 생각보다 큰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권세가에 관한 씹을 거리는 재물을 모으면 모았지 탈락시키진 않았으니까.

그거면 됐다고, 에이드리안은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화가 안 나는가에 관해서는 장본인조차 어리둥절한 차였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전까진 세련된 미사여구로 포장한 잔소리를 거부할 예정이었다. 분가해 사저를 얻은 처지에 이 정도 권한은 있었다.

에이드리안.”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를 일깨웠다. 천천히 타들어 가는 고급 편지지를 바라보고 있던 에이드리안이 앞을 보았다. 긴 탁자에서 보폭 좁게 마주 앉은 아리아가 무람없이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테이블 매너를 가르치는 대신,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아리아가 성의 없이 손가락질 하는 곳은 에이드리안 뒤였다. 식사 중 의자를 무르지 않는 신사였지만, 아리아는 예법을 그까짓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의식한 적 없는 정물화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식당엔 사치스러운 만찬 식탁을 제하면 장식이랄 게 없어 무던하게만 보였다. 단지 상석 양옆 벽에 그림이 서너 점 걸려 있을 뿐으로, 세 점은 음식, 한 점은 과실을 쪼는 새였다. 솔직하게는 내용물보다 금장 테두리를 더 신경 썼기에 어느 화공에게서 사들였는지도 잘 몰랐다. 식욕만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그저 되었으니까.

그 외엔 홀로 권위 있게 세공된 상석 의자 하나, 그리고 식탁에 띄엄띄엄 배치한 하얀 꽃병. 매일 생화를 꽂는 터라 저녁 식사를 할 때면 시들어 있을 때가 잦았다. 이런 종류의 품위에 민감하지 않은 두 주인 탓에 하녀는 꽃의 종과 무관케 자기 마음에 드는 걸 꽂아 놓는 것 같았다.

아리아는 가막새를 그린 액자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가 말했다.

산딸기보다는 은화가 어울렸을 텐데. 갈까마귀는 먹이보다 금은을 선호하거든.”

처음 안 사실인데. 어떻게 안 거지?”

둥지를 봤어.”

…….”

어떻게 보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상식 외 대답을 들을 게 뻔했으니까. 어린 시절 정원사를 졸라 높이 튼 둥지를 내렸겠거니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복수를 당하진 않았나?”

복수?”

까마귀에게.”

아리아가 웃었다. 실없는 농담으로 치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그 새의 습성을 대강 알고 있었다. 떨어져 박살난 둥지 근처를 서성이다가 쪼일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쪼인다는 건 좀 과장했고, 검은 새는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어리고 작은 에이드리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처음엔 저택 쪽을 보는 줄 알았는데 잠시 후 새는 눈이 양옆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새는 집 쪽으로 부리를 돌린 채, 에이드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카맣고 반들반들한 흑요석 눈은 설익은 마음에 간혹 악몽으로 찾아들기도 했다.

유모는 가둬둘 수 있는 새란 검은 빛을 띠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나리아처럼, 혹은 흰 비둘기처럼.

복수 같은 건 없었어. 둥지를 건드린 건 내가 아니었거든.”

아리아가 웃음이 어린 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익힌 아스파라거스를 쿡쿡 찔렀다. 버터로 볶아 탄 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리아는 고기든 채소든 새 모이만큼 먹는 습성이 있었고, 회화 따위를 지적하며 말을 걸어오는 걸 보아하니 오늘은 식욕이 전무한 모습이었다.

화공을 불러 다시 걸게 하지.”

무슨 그림으로?”

뭐든 네 마음에 드는 것.”

그럼 생동감 있는 걸로 해 줘. 저렇게 굶어 죽어가는 산 것 말고, 갓 태어난 사슴이라던가.”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아리아의 이야기에서 기이한 지점을 찾은 건 조금 뒤였다. 피가 흐르는 고기를 입가로 가져가던 에이드리안이 멈칫하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사슴?” 보통 귀족가 자제들이란, 겉으로나마 청승을 떨며 소고기를 먹을 땐 소를 보지 못한다고들 한다. 특히 여식의 경우 그게 역하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아리아는 살아 숨 쉬는 무언가를 보면 식욕이 산다는 얘기를 한 거였다.

아리아는 접시 테두리를 톡톡 두들기며 에이드리안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렸다. 에이드리안은 그런 아내의 동그마한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먹던 것이 음식보다 정물로 느껴지기 시작한 탓이다. 그야 입맛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니까.

시들어버린 제철 장미는 분홍빛, 꽃이란 고개를 떨구며 진한 향기를 낸다. 이미 삼킨 고기 조각이 목에 걸린 채 상해 가는 것 같았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 대신 문드러져 가는 꽃의 신음을 맡으며 에이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리아가 이쪽을 보더니 조용히 일어서서, 슬리퍼를 끌며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 곁에서 시중들던 하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접시를 채 비우다 말고 무슨 짓인가 싶은 거다. 에이드리안은 떠도는 가십을 곱씹고 있었다. 그는 왕자이거나 용이고, 아리아는 다친 공주이거나 피에 젖은 여전사. 그때 실제로 상처 입었던 사람은 에이드리안 쪽인데도.

식어 빠진 고깃덩이에서 텁텁한 냄새가 났다. 노른자 썩은 물감 냄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