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ㅈ님
사무사한 외투에 무구를 달아
이상하지 않니
바실리사 벨로프가 말했다. 그는 무복처럼 새하얀 천을 무봉해 지은 옷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코그 모르페는 저 여자가 잠 속의 요정 같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웃으며 무슨, 저건 창백한 마녀일 거라고도 했다. 바실리사의 머리카락은 어딘지 금속질이 감돌아서 세탁 끝에 형형하게 표백된 흰 면사와는 잘 안 어울렸다. 눈밭에 선 맨발처럼.
겨울이었다. 떠도는 이에게도 속옷 겉옷 걸칠 것은 모두 필요했다. 보통 노상에 가서 집어오는 편이었지만, 눈 위에 널어놓고 바래기 한 피륙은 어디에서 구하기 힘든 포목상 보물인지라, 코그는 볼 때마다 사들이고 있었다. 바실리사는 그 사치와 시허연 빛깔이 코지 너와 어울리지 않아, 말했지만 내심 서늘하고 얄팍한 면사가 마음에 드는지 이렇게 몸에 두르고는 했다.
따로 재봉 맡겨야 한대도 고집이다. 코그는 숨죽여 웃으면서 무엇이 이상한지 물었다. 바실리사가 대답했다.
“괴물도 사람도 전부 망가진 세상에서 말이야. 나는 묘를 지키는 거야.”
“그렇게 치면 난?”
“넌 마지막 춤을 추러 가잖아.”
코그는 망자 앞에서 춤추지 않는다. 물론 술에 취해 바샤가 지키는 묘 위에 엎어져 흐느적댄 일은 있었다만 단 한 번뿐이다. 코그는 대체로 학창 시절에 보았던 우아하게 꾸민 춤사위를 떠올렸다. 바실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코그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예쁘게 접고 있었던 거다. 바실리사는 이렇게, 라고 말하며 팔을 펼쳤다.
그는 두 팔과 어깨에 걸쳐 머리 위까지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때문에 미사보 혹은 성스러운 무엇보다도, 기기묘묘한 요정이나 유령 같았다. 하긴 바실리사는 웨딩드레스를 입어도 비슷할 거다. 아름답기야 하겠지만 어딘지 애달픈 분위기는 숨길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쓸쓸함을, 코그는 좋아했다. 자기가 지닌 세계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비록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떠돌이 신세래도. 긴 여행이라 치기에는 너무 길었고 남루했으므로.
무엇보다 돌아갈 곳이 없지 않은가. 코그는 마법사가 아닌 미국 애들이 으레 성인식 선물로 받고 싶어 하는 자그마한 캠핑카를 떠올렸다. 주로 그것들은 방치된 끝에 또 다른 누군가의 선물로 돌아가곤 하지만 코그는 늘 거기에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자신이 네 발 달린 안락정토인지도 모른다.
바실리사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 코그는 그게 춤인 줄 몰랐다. 몸짓이 너무 느리고,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천 자락이 나부끼는 바람에, 코그는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정리하면서 눈앞에 새하얘졌다고 느꼈을 따름이다. 다음 순간 바실리사의 가는 팔뚝에 휘감기며 춤사위가 거두어졌다. 재단하지 않은 아사천보다는 그것이 가둔 공기와, 자기 자신의 동선을 끌어안아 거두어들인다고 코그는 생각했다. 느적느적 팔을 위로했다가 내렸다가 어깨 위에서 손을 흔들고, 고개에 힘을 뺀 체 까닥 까닥거리고 다리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게, 마치 나뭇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나 처진 잎새에 부는 바람 같았다.
“그게 나라고?”
코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바실리사가 뚱하게 중얼거렸다.
“탈도 써야지.”
“탈?”
“흑사병 의사처럼. 아니면…. 사자使者?”
“내가 점점 대단해지고 있네.”
“좋아, 그러면 네가 말해봐. 난 뭐야?”
코그는 외투를 여몄다. 언덕 위에 부는 칼바람이 매서웠다. 그는 시선을 제껴 당장 눈을 한 바가지 퍼부을 듯 먹먹한 하늘을 보았고, 아래로 내려서 어제 내린 진눈깨비가 여태 녹잖은 황무지 전경을 살펴보았다. 어느 기슭에도 생명의 기색은 없었다. 이제 땅이 단단해지고 먹을 것이 없어져 대부분 동물이 땅굴에 숨어서 봄을 기다리는 와중일 것이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 낯모르는 타인의 죽음을 보고 묘비명을 써주는 일이 잦았다.
바실리사는 붉은 흙을 파헤쳐 대충 짜인 관도 없이, 솔잎에 사람 사체를 얹어 놓는 걸 보면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구덩이 근처에 쭈그려 앉은 채 멍하니 뚱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코지’
바샤가 말한 적 있다.
‘이제 지루해, 장미로 짠 관을 보고 싶어.’
“넌 귀신이야.”
코그는 무심코 말을 뱉었고 직후에 놀라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바실리사의 예민한 귀를 피해갈 순 없었다. 즉시 호령이 떨어졌다. “뭐?” 아니, 혼이니 넋이니 하는 그나마 처연스러운 단어도 많은데 왜 하필 무시무시한 걸 골라왔느냐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코그는 수습하기 시작했다.
“……검님이라고. 그런 귀신을 몸에 받는 사람들이 있대.”
“그래서?”
“요마보다는, 뭐, 그런 뜻이란 거지. 신 받은 사람과 검님이야.”
우리는, 하고 말을 맺자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바실리사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얼굴을 보고서 코그는 조금 뿌듯해졌다. 눙치는 말솜씨는 나날이 늘어 바실리사의 날뛰는 마음을 간신히 달래줄 정도가 되었다.
“그래, 신이란 거지?”
바실리사는 냉소하기로 한 모양이다. 코웃음 쳤다. 하지만 변명이 괜찮게 들렸는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넌 나를 몸에 받는 거야, 그럼?” “비슷하게 되나.” “춤추는 사신에게 깃든……” “좋은 넋.” 이렇게 되어버리니 같잖은 농담 같기도, 기꺼운 칭찬 같기도 했다. 바실리사가 퍽 진심으로 웃었다.
“이상해. 괴물도 사람도 망가진 세상에서, 관짝이니 묘비 같은 게 무슨 소용이람.”
바실리사가 투덜거렸다. 하얀 천을 뒤집어쓴 채, 장미 무덤 운운했던 그때처럼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마치 어린 여신 같아서 코그는 제가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일을 보다 못해 지루해진 나태한 여자아이 말이다.
코그는, 바샤가 저렇게 말하면서도 곳곳에 쌓인 돌무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본다는 걸 알았다. 코그라면 그저 지나쳤을 무더기 진 진흙더미에 무엇이 묻혀 있을지 궁금해했다. 파헤치는 대신 곁에 앉아서 초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이게 무슨 꼴이냐, 말하듯이. 어쩌면 바실리사는 죽은 것의 집에 동질감을 느끼는지 몰랐다.
코그가 말했다.
“아무 의미 없어. 그게 다야.”
“우리는 왜 계속 가는 거지?”
“걸어야만 하는 저주에 걸렸거든. 신들린 채 고향 마을에서 쫓겨난 거지.”
“아, 그런 설정?”
과장된 말투, 연극적인 몸짓, 바실리사가 손가락을 뻗어 코그를 지적했다.
“그래, 바로 이게 너야.”
바샤가 말했으므로 코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능청이란, 변덕스러운 신을 섬기는 사람의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