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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ㅁ님

나사르 본주 2022. 11. 1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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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질 무렵 아주 잠깐, 어떤 빛무리를 본 것 같았다. 바티에는 그게 도깨비불이라고 말했다.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는 것이다.

로렌 페르디난드는 곧장 반박했다. “도깨비불은 시체의 인 성분이 빛을 낸 거야. 하지만 하늘에 시체가 떠 있을 리 없지.” 바티에는 재미없다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간만에 로렌에게 장황하게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을 홀려 사막을 헤매게 만드는 도깨비불에 관해 말이다. 낮은 신기루가, 밤은 도깨비가 점하는 신비한 모래 바다에 관해…….

로렌은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뭐 볼 거라고?”

영화를 고르는 중이었다. 주스에 가까운 가벼운 술을 걸쳤고, 할 일이 없어 나른한데 시간은 아직 일곱 시고, 영화 한 편 본다 해도 아홉 시쯤, 그렇다면 오늘도 무비투나잇, 이라는 바티에의 농지거리에 로렌이 진지하게 반응한 덕이었다. 한 두어 개 되는 영화 채널은 존 윅 첫 편을 상영 중이었는데 둘의 취향에는 안 맞았다. 서로 표정이 심드렁한 걸 확인하고서 바티에는 술이 들어있던 캔을 구겨 쥐고 곰곰이 생각했다.

로맨스 영화 보고 싶다.”

그래.”

로렌은 쉽게 수긍했다. 그럼으로써 장르 카테고리는 줄어들었는데 도통, 그러니까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같은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다. ‘뭘 보고 싶은지조차 도통 모르겠다고 바티에가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골랐다간 가리지 않은 게 나을 뻔한 베드씬을 목격할 게 뻔하고로렌은 아직 거기까지 용납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둘 다 퍽 신중했다. 로렌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The)’로 시작하는 걸 고르자.”

?”

그런 거야말로 지루하거든.”

그리고 진지한 영화가 스크린 속 친구라는 인물들끼리 섹스하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취향이었다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바티에와는 베스트프렌드에서 연인이 되는 내러티브를 즐기고 싶지 않았다. 보다가 존다고 해도.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과는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겠지.

바티에가 즐거운 투로 덧붙였다.

거기에 적어도 30년 전 거, 더하자면 프랑스.”

프랑스는 왜지?”

그런 거야말로 지루하거든.”

바티에가 눈을 반짝였다. 해가 완전히 져버린 덕에 켜놓은 텔레비전 불빛 말고는 방 안을 밝히는 건 없었다. 어둑하고 창백한 조도 아래에서도 그는 거실 쓰레기통에 정확히 캔을 던져 넣었다. 몇 방울 액체가 흘러나와 패브릭 소파를 적시면 로렌이 티슈를 북북 뽑아 닦았다. “내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영화를 알고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바티에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로렌은 뭐냐 묻지도 않았다. 알아서 틀어줄 걸 알았기 때문이다.

 

 

The Green Ray

 

 

무슨 뜻이야?” 로렌이 물었다. “녹색 광선.” 바티에가 답했다. 그는 이름만 알지 본 적 없는 영화라고 했고, 모든 조건에 부합하므로 제격이라고도 말했다. 로렌은 뭐든 존 윅이나 저스틴 팀버레이크 주연 섹스 영화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로렌의 머릿속에서 로맨스바티에가 연결되는 순간 이런 부정적인 화학작용이 나타난 거다.)

녹색 광선이라면로렌은 말 그대로 초록색 레이저를 떠올렸다. 바티에는 술기운이 살짝 올라 기분이 괜찮아 보였고, 그래서 둘은 꽤 붙어 앉았다. 로렌은 최근 거리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굳이 거론해서 관계를 망치지는 않았다. 바티에는 이런 걸 깨달았다가는 어떡해야 할지 몰라 삐걱거릴 애였다.

있잖아,”

로렌이 말했다.

너 로맨스 안 좋아했지 않나.”

옛날 거는 그냥 보는데. ?”

그냥. 만약에 이게 너무 로맨틱한 영화면

로마의 휴일쯤의 대놓고 로맨스면 모를까, 현대식 너무 로맨틱은 좀 낯설게 다가올 거였다. 그러나 바티에는 헛웃을 뿐이었다. “너 내가 어린앤 줄 알아?” 로렌은 차마 그렇다 말 못하고 입 닥쳤다.

바티에가 이 영화를 고른 이유를 로렌은 알 것 같았다. 영화 속 여자들은 끝없이 남자를 찾아 헤맸다. 외로움을 달래 줄 사람을. 남자들도 계속해서 추파를 던져왔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돌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 로렌은 문득 이게 로맨스 장르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어 옆을 슬쩍 보았다.

옆 사람도 비슷한 상념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지그시 보고 있자 눈이 마주쳤다. “이런 거 알고 골랐어?” 로렌이 물었다.

뭐가 이런건데?”

심드렁하게, 흐린 브라운관을 주시하며 바티에가 대꾸했다. 뭔지 알면서 묻는 거였다. 로렌은 자기가 바티에에 관한 특이점을 또 놓친 건지 궁금해졌다. 좋아하지도 않는 로맨스 영화를 보자고 하고, 개중에서는 파리의 우울한 하늘 같은 이야기를 선택했으며, 그걸 또 아무 감흥 없는 시선으로 보는 이 사람의 머릿속을 넘겨짚었나.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바티에는 이야기해주지 않으니까, 그가 선택한 이야기를 통해 읽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렌이 말했다.

이해돼? 저렇게까지

같이 다닐 이성을 찾는 거.”

그래. 나는 좀 모르겠는데.”

화면 속에서는 여자가 또다시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기차역이었다. 사람에게서 도망쳐, 또다시 사람을. 로렌은 저것이 악순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쉽게 입에 담았다. 영화 초반부, 혼자서나 친구와 함께 여행 가는 걸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며 함께 갈 남자를 찾던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다.

바티에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숙성한 술처럼 부드러웠다.

나도 몰라. 근데 대충 뭔지 알겠어.”

무슨 뜻인데, 그거.”

저기서 남자는 어른이기도 하니까 대충 알겠단 거지.”

왜 하필 어른이고?”

몰라.”

늘 이런 식이었으나 로렌은 유독 갑갑한 기분이었다. 그는 아예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바티에를 바라보았다. 바티에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거기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반항기 청소년 같아서 로렌은 무심코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그는 바티에가 이성에 대한 욕망을 알겠다라고 대답하길 바랐다는 걸 깨달았다. 더불어 여주인공에게 이입하는 게 좋고. 그러니까, 아마 로렌은바티에가 자신을 좋아하길 바라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동거인이었다. 영화를 보며 서로 신경 쓰일 정도의 애착은 가져도 좋지 않은가? 로렌은 고작 이 정도의 우정조차 가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동거인이었고 아마 바티에는 관계를 묻는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그렇게 대답할 거였다. 망설이는 건 로렌 자신뿐이리라.

텔레비전 화면은, 구식 브라운관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청록색에 가까운 누런 녹빛이었다. 부패한 끝에 녹아버린 이끼를 보듯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로렌은 더 캐묻는 대신 다시 고개를 돌렸고, 머리를 비웠다. 저기에 바다가 있었다.

그거면 됐다.

바티에는 아니었다. 그는 로렌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느꼈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쩐지 등허리에 땀이 어렸는데 영화 속의 팽팽한 한탄조 때문인지 브라운관 속 여배우를 로렌으로 치환해서 보고 있기 때문인지 몰랐다. 바티에에게 그의 동거인은 슬픈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물었다.

“‘지나치게 로맨틱’”은 무슨 뜻이었어?”

네가 더 잘 알 텐데.”

로렌이 말하고 싶었던 건 섹스 텐션이 들어간 영화였다. 물론 그 단어를 직접 거론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는 점잖게 처신했다. “아무튼 이런 건 아니지.”

아니, 이것도 충분히아니솔직히 말하자면 엄청 낭만적인걸.”

로렌은 화면 속에서 바다와 햇빛과 쥘 베른밖에는 읽어낼 수 없었는데, 여주인공이 내내 울고 있었고 거부하고 있었고 세상과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로렌은 그런 여자를 이해할 깜냥 따위 없었다. 쥘 베른 이야기를 하는 노신사가 등장한 장면만이 그나마 공감의 범주에 놓였다. 말하자면, 그 장면은 녹색 광선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황혼의 수평선에서 태어나는 것. 녹색 광선은 그런 녹색의 광선을 일컬었다. 바티에보다는 로렌이 잘 알아야 했지만 그조차 본 적 없는 희귀한 현상인 듯했다. 아주 오래 뱃일을 한 선원이라면 본 적 있으리라.

도깨비불과는 전혀 관련 없었다. 로렌이 되물었다.

녹색 광선이?”

.”

바티에는 어딘지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곧장 답해버리고 만 뒤였다. 돌이켜 생각해볼 건덕지조차 없이 매끄럽게 봉합된 대화는 사실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로렌: ‘녹색 광선이라는 현상이 낭만적이라는 말이지?

바티에: , <녹색 광선>이라는 영화 참 낭만적이다.

 

둘이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이렇게 발전했을 대화문이다.

 

로렌: 이 영화가 왜 낭만적인데?

바티에: 여주인공이 너를 닮아서.

로렌: 잘 모르겠어.

바티에: 슬픈 사람이라는 점이. , 또 우네.

로렌: 난 안 울어.

바티에: 눈물은 중요하지 않아.

 

대신, 실제로 둘은 이렇게 했다.

바티에가 뿌듯하게 덧붙였다.

 

내가 프랑스 영화 지루하다고 그랬잖아.”

 

이 또한 다른 걸 함의했다. =프랑스 영화 너랑 어울려.

로렌이 대꾸했다.

 

그래, 그렇네.”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부정적 어휘에 동의한다.

 

있잖아.” 바티에가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나 무비 투나잇 리스트를 적을 수 있을 것 같아.”

드디어.”

드디어! 일단 이 감독과 배우부터 시작해야겠어.”

뭐야, 마음에 들었어?”

. 너랑 어울린다니까.”

?”

닮았다고.”

뭐가??”

.”

<녹색 광선>?”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로렌은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역시 어리둥절한 바티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서로의 머리색은 역겨운 청록색 불빛에 물들어 푸르지도 붉지도 않은 거무스름한 그늘 같았다. 술을 깐 이래로 눈이 마주친 건 몇 번 안 됐고,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건 동거 이래 처음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나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바티에가 손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말이 안 통해.”

누가 할 소리야. 아직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저 여배우이름이 뭐지. 하여간, 캐릭터 인상이 너랑 닮았다는 이야기지. , 친절한 바티에 피츠앨런의 시간 끝.”

, 엔딩크레딧이다.”

영화까지 끝날 필요 없었는데. 야 너 봤어?”

또 뭘?”

마지막 장면?”

못 봤는데. 너는.”

못 봤지.”

로렌이 리모컨을 집어 들고 간단하게 해결했다. 삼십 초 정도 뒤로 감기 해서 마지막 장면을 다시 켰다. 둘은 서로의 낯빛을 감상하던 눈빛 그대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았다. 해 질 무렵이 그렇듯 저 먼 수평선이, 독을 탄 파랑 같은 누르스름한 빛무리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