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ㅅㄹ님
물 발자국 춤곡
누군가는 여전히 윤준에 관해 떠들었다. 그의 가장 최근 면면. 마지막 음계를 삐끗했던 연주회 말이다. 집무실에 앉아 인터넷 기사나 보며 시간 때우던 태주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창을 껐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한낮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나른한 무렵. 비서가 무심하게 끓여 둔 커피 향기가 집무실을 채우고 있었다. 벽에 덧댄 호두나무 패널에서는 새로 기름칠한 냄새가 났다. 보통 사무실에서 날 법한 잉크와 에이포용지가 맞닿는 석유 냄새 따위는 없어 태주는 더 맥이 풀렸다.
그는 윤준의 콘서트라고 하면 단독이든 합주든 간에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저녁이라면 개인적인 일정을 빼는 걸로 해결했고, 낮에는 대체로 ‘외근’이라는 핑계를 썼다. 아무리 샛별 피아니스트래도 거쳐 가는 지방공연이나 어린이를 위한 연주방송 등에 따라가려면 오후 반차가 필수적이었다. 애초 회사에 출석도 잘 안 하는 모양이라, 이사회도 손을 놓은 채였다. ‘아주 약간의’ 지분만 있다면 태주로서는 만사 오케이였다. 그리고 어차피 다 혈연인 거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도울 터였고.
이런 태평한 삶을 영위하던 그에게 윤준의 연주회 사건은 꽤 치명적이었다.
연주회는 그제였다. 다음 날 아침 비서에게 시켜 윤준이 나온 가판대 신문을 구해오게 시킨 태주는 일면을 보고 막 내린 커피를 흘릴 뻔했다. 뜨거운 음료를 겨우 삼켜낸 뒤 그는 입을 살짝 벌렸었다. 바로 그 찌라시가 지금도 집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누가 들어왔을 땐 서류철로 슬쩍 가려 놓지만.) 대형 콩쿠르였고 윤준은 신진 음악가로서 개회식 연주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대회를 대표하는 악곡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신경을 거스른 건 실수보다도 윤준의 표정 탓이었을 거다. 온갖 번쩍이는 망원렌즈가 난무하는 곳에서 곤란하다는 듯 슬쩍 웃는 윤준의 얼굴은 (잘생기기야 했지만)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앞에서 보일 만한 ‘수줍은’ 행동은 아녔다.
태주는 콩쿠르가 끝나자마자 윤준의 대기실에 찾아갔었다. 윤준은 바쁜 듯 작업실로 떠난 지 오래였고 붉은 장미 다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그들은 그 뒤 이틀째 이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태주는 이것이 윤준 나름의 극복 방법이라고 믿었다. 깊은 물 밑에 잠가 두는 것.
태주에게는 제 연인이 한국의 모차르트 같은 값싼 수식어로 범벅된 초짜 피아니스트로 보이지 않았다. 보다 자신의 이름처럼 심연한 평온이 윤준에게는 있었다. 송태주란 아늑한 기분을 즐기는 부류가 아녔으나 윤준이 제공하는 것에 있어서, 그가 윤준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준은 고적한 곳에 앉아 오직 태주만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인이 먼저 연락해왔을 때 태주는 조금 놀랐다. 평소처럼 리사이틀 초대석 입장권이나 데이트 코스를 짜왔다며 귀엽게 웃는 걸 생각했는데. 문자 내용은 많이 달랐다.
‘우리 시간 좀 가질까?’
윤준이 한숨을 내쉬며 건반 위에 엎어졌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고급스럽지만 오래된 그랜드 악보대가 삐꺽이며 쓰고 있던 종이 낱장이 그의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노란 연필이 도르륵 굴러 발등을 치고 피아노 밑으로 들어갔다.
말하자면 세레나데를 작곡 중이었다. 근래 일정이 몰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연필을 놓지 않았는데, 문제가 있다면 윤준의 여가 대부분에 태주가 함께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태주 말고는 만나는 친구도 동료도 없었고 윤준은 이걸 최근에야 눈치챈 참이다. 하필 프러포즈를 결심했을 때였다.
그 순간, 윤준은 우리가 넓은 새장 속에 산다고 생각했다. 한 쌍의 비슷한 카나리아와 같아서 한 마리가 나가면 다른 한 마리는 죽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오진 않겠지만… 윤준은… 그들이 ‘정식으로 사귀는’ 것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다.
뭐 돌이킬 수야 없는 일이지.
준은 의자 앞에 웅크리고 손을 뻗어, 페달 밑으로 들어가 버린 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세웠다. 그가 열린 발코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겨울이었다. 열린 창문에 성에가 엉겨 있었다. 날이 좋아, 조금도 춥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손끝이 얼어 있었다. 환기를 너무 오래 시켜두었다.
생각해보면 시퍼런 얼음 속에 갇힌 연인처럼 우리는 언제나 맑은 천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만든 지 오래된 사과 마멀레이드 따위가 올라간 대리석 선반 위에 앉아서. 얼어붙은 채. 윤준이 ‘고백’을 염두에 둔 건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일이긴 했지만 넘어야만 하는 다리란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예술가의 기질이란 기민해 무엇에든 형식상이니 겉멋이라고 넘어가질 못했다. 그들은 가족이나 연인치고도 들러붙어 다녔다. ‘한 쌍보다는 한 몸이지.’ 윤준이 생각했다. 아무튼 간,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악보에 긴 선을 그었다. ‘지워. 지워. 엉망이야.’
태주에게 줄 거라면 더 다정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첨예해야 했다. 일생 단 한 번 있는 일이었다. (이때 윤준은 자신이 태주에게 무수히 고백하리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는데, 젊은 연인들은 으레 이런 법이다) 준은 오래간만에 자기 재능이란 것에 절망감을 느끼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보낸 문자가 그거였다. 우리 시간 좀 가질까?
아니 반드시 가져야만 해… 라는 속마음은 애써 감춘 채였다. 내가 너한테 고백 좀 하고 싶단 말이야… 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어 내가 별장에 있을게, 따위의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엉뚱한 답장이 돌아왔다. ‘지금 어디야?’ 준은 물론 집에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고작 문자인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준은 자기가 보낸 걸 다시 읽어 보았다. 어쩐지 이별의 말로도 들리기는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느긋이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순간 태주가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젠장.’ ‘업무 배달 왔어.’ 준은 싱숭생숭해졌다. 윤준이 헤어지려는 것 같은 낌새를 보이는데 일 핑계를 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게 다 일정과 마감에 시달린 결과였다. 평소보다 세배는 예민해졌다는 걸 자각하고 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악보는 절반가량 완성되어 있었다. 더 완벽하게, 더 빨리하고 싶어서 앞 소절을 계속 고쳐가며 썼더니 일주일간 고작 이 정도를 썼다. 자유시간을 전부 투자한 것 치고는 담백한 결과였다.
내일 하자. 내일.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윤준은 떨어진 담요를 두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잘 셈이었다. 조금 서운해진 마음도, 같이 잠재우고 싶었다.
태주는 차 안에 앉아 애써 미간을 폈다. 그의 코트 깃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났다. 신입사원들이 강제 참석하는 회식 자리에 얼굴 좀 비추라는 게 아버지의 요건이었고, 태주는 막 추가 근무를 끝낸 참이었다. 그가 짜증스레 찡그리자 아버지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일은 해야지.” 무슨, 영업사원 대하듯이. 그는 투덜거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적당히 얌전한 축에 드는 것이 이 혈족 안에 든 그의 목표였다. 그러니까… 딱 제 몫 가져가는 역할.
이게 태주가 영업 끝날 시간까지 붙잡혀, 술과 남의 향수 같은 알코올을 묻힌 채 귀가한 이유다. 말발과 얼굴로써 그는 인기가 많았고, 지위에 반한 남자 직원들이 자꾸 붙잡았던 것이다. 태주는 애써 웃었지만 막판에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담배를 태우고 제 차로 기어들어 왔다. 혼자만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아서 가능한 거였다.
고작 그런 데에서 휩쓸리는 건 질색이니까. 태주는 한 대 더 태우려던 담배를, 불도 붙이지 않은 걸 그냥 창밖으로 떨어뜨렸다. 운전석에서 내려 담배를 짓밟는 발길에 짜증이 가득 실려 있었다. 윤준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좀 화풀이하게 될지도, 라고 그는 생각했다. 문을 열자 역시나 집안이 깜깜했다. 그는 같잖은 복수심에 휘말려 안방 문을 열었다. 넥타이를 풀며, 악취에 가까운 음식 냄새 밴 옷깃을 디밀고 준의 뺨에 쪽 입 맞추었다. 한 번으로 안 되어서 두어 번 더했다. 윤준이 으음, 하고 반응을 보이자 기분이 다 풀려 빙긋 웃고 말았지만.
준이 눈을 떴다.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는데도 놀라지 않고, 정확히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태주야.” 윤준이 웃자 태주는 당황했다. 왜 웃지?
윤준은 크리스마스 아침의 아이처럼 침대에서 주르륵 일어났고, 파자마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바로 손을 풀기 시작하기에 태주는 지금이 새벽 한 시가 다 돼간다는 사실을 차마 알려줄 수가 없었다. 미처 아무 말 못 하고 난처하게 서 있는데 윤준이 입을 열었다. 눈에는 아직 졸음이 차 있었지만, 길고 죽 뻗은 손가락은 잘 다듬은 대나무처럼 건반을 두들겼다. 한밤중의 연주치고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뭐게, 송태주.”
윤준이 비스듬히 미소 지은 채 물었다. 이제 낯에서 잠이 좀 사라져 있었다. 태주는 장난스레 찌푸리며 눈썹 언저리를 슥 긁었다. 그가 조심스레 대꾸했다.
“모르겠는데.”
“세레나데.”
음률이 변했다. 청동 방울처럼 가볍고 청아한 음률이 세 옥타브 내려가, 심장 고동처럼 뱃속을 폐부를 두들겼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자리 분위기에 취해 있던 태주는 문득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몽롱한 잠과 같은 삶 속에서.
그러니까, 윤준에게는 그 자신의 이름에 준하는……. 태주는 자기 눈동자의 색을 잊고 지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준의 것은 잊어본 적이 없다. 태주는 저 연주자의 허파 속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곳에 깊은 못이 있어. 내가 발 담그고 있는. 몇 자인지 도통 알 수 없는데도, 속을 깨끗이 보여주는 맑은 빛이… 그 순간 준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오른쪽 건반으로 돌아온 손가락이 청량한 사랑을 들리우고 있었다.
“알아?”
준은 깊은 잠에 부드러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프러포즈야, 이거.”
너 때문에 완성 못 했다고 윤준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우리의 눈 색은 결코 같지 않아서, 네 것이 나와 같다고 여기는 사랑은 오류가 되고 만다. 아침에 거울보다 먼저 보는 것이 너이고 우리가 닮은 얼굴을 지녀 세간의 상식이란 소용이 없다. 이 정도의 박자감으로 너와 사랑을 나누고, 비천한 관계라는 내심의 손가락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린 영원히 불을 끄고 있을지 모르겠다. 네 눈 속에 있는 영롱한 숨소리가
나를 먹여 살찌워서.
대신 태주는 이렇게 말했다.
“알아. 사랑해.”
미완성 세레나데는 끊이지 않았다. 장르가 바뀌고 장단조며 박자가 제멋대로였는데, 전혀 실수처럼은 여겨지지도 않았고. 다만 사랑을, 손속의 어린 양과 같은 온화한 기쁨을 나누고 있는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