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끈기
관객의 끈기
“야 영화 찍어볼래?”
“오 그래!”
“……뭔지는 안 물어봐? 됐어, 내일 시작해.”
때는 Z가 트레일러 공동생활을 할 때였다. 그 공터는 너무 늙어 소리도 제대로 못 듣는 백인 외골수의 것이었는데, 명목상 사유지이기는 했으나 해당 노파가 너무나도 비협조적이어서 인근 공무원들이 전부 포기한 상태였다. 그리고 급진 중에서도 급진사상을 가진 히피들이 여기 자리를 잡았다. 주민들은 백인 집주인이 불쌍하지 않냐며 침을 뱉었는데, 동시에 외곬에게 먹을 걸 가져다주거나 말도 걸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이기도 했다. (아니, 이건 그냥 Z의 생각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트레일러 세 대가 나누어 가진 깨진 거울 조각에 양치 거품이 튄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두었다. 입에서 거품을 퉷 뱉고, 바가지에 든 물 한 모금으로 대충 헹궈낸 뒤 여전히 거품이 남아 있는 입술을 옴죽거렸다.
“카메라 구경할 수 있는 거지? 신난다.”
내일부터 영화감독이 될 친구는 지겹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나갔다. 실은 Z가 제일 반반하고 옷도 깨끔하게 입는 타입이라 선택한 것이었는데, 다른 애를 고르는 게 나을지도. 그는 히피의 생활상이 흥미진진하게 반영되고, 애니메이션도 약간 첨가된 진짜배기 예술영화를 찍고 싶었다. 분량은 13시간으로 해서 크레딧과 타이틀은 빼고, 냅다 시작해서는 냅다 끝내버리는 거 말이다.
구상은 여기까지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필름을 허비하며 생각할 거였다. 필름 구매 비용은 아마 Z가 부담을 질 것이다. 걘 카메라를 좋아하니까… 뭔들 안 좋아하겠느냐만.
쟤가 왜 여기 있느냐는 생각을 모두가 했지만, 그가 무엇을 해왔는지 알기 때문에 아무도 묻지 않았다.
Z는 아침마다 붕대로 다시 매야 하는 슬리퍼를 신고 공터에 나왔다. 맨발로 살다가 파상풍 위험에 처한 이후 예방접종 맞은 걸 다행스레 생각하며 생긴 습관이었다. 친구들은 이 여름에도 녹슨 드럼통 모닥불에 칠리 감자를 구워 먹고 있었다. 감자는 알이 작고 심지어 좀 퍼렜다.
그가 꼬챙이에 꿴 딱딱한 구운 감자를 후후 부는 사이에, 다른 친구가 물었다.
“얘 한대?”
물론 Z에게 물은 건 아녔다. 신출내기 히피라면 몰라도 같이 팔 개월 넘게 산 이들로서는 좀… 뭐랄까, Z가 이상해 보였다. 그 점이 좋긴 했다.
영화감독이 대꾸했다.
“아니, 다들 배우 안 한다매.”
“하기 싫대? 네가 페이스 본다며 인마. 그게 히피정신이냐 어?”
“Z보다 더 히피 있으면 나오라 해봐.”
상기한 둘은 백인이다.
그래… 어떤 간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이 백인 사유지에서 놀겠느냐고. 그냥저냥 학식 있고 욕먹어도 죽진 않을 녀석들이지. 그리하여, 유일하게 ‘진짜 흑인’인 Z가 선정된 거라고 Z도 생각했지만,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영화는 찍거나 말거나 하며 놀고 세트장 겸 폐허나 무너진 교회에서 마리화나 피우다가 끌끌거리며 웃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마 그걸 찍고 싶어 할 것이다.
상영은 되려나, 필름 값이며 조명이며 장비는, 스태프는, 이런 생각은 아무도 안 했다. 일단 장소를 고르는 게 먼저였다.
사실 장소는 너무 많아서 고를 필요도 없었다.
“맞다.” Z가 말했다. “점심 반전시위.” 거의 ‘점심때 외식하자며’ 같은 투였다. 누가 ‘점심 시위’라는 말을 쓰냐고…….
“어 맞다.”
“야 그거부터 찍자.”
“카메라 부서지면 어떡해?”
“오, 카메라가 있었어?”
Z도 의외라는 듯 돌아보았다. ‘감독’은 으쓱하며 액정이 아주 살짝 나간 캠코더를 꺼내 보였다. 열세 시간은커녕 삼 분만 켜놔도 꺼질 것 같은 고물이었다.
Z는 이제 영화 분량이 대충 예상이 갔다. 필름 조각조각 한다 치면 이십 분짜리겠군.
감자는 드럽게 맛이 없었고, Z는 그냥 먹었다. 먹는 데에는 별 생각이 안 들었다. 그가 백인 부모에게 받아먹던 하얀 중국산 플레이트에 세팅된 소시지와 시금치, 맛깔나는 소스, 그레이비 콩에 비하면 어떤 음식이든 쓰레기라는 걸 그는 알았다. 그리고 Z는 쓰레기를 좋아했다… 닦으면 광이 나는 게 재밌잖아.
그가 먹고 남은 꼬치를 드럼통에 꽂아 태우며 말했다.
“그냥 지금부터 찍지?”
“그럴까?”
“그러자.”
그들은 오래간만에 단결하여 캠코더를 켜보았고, 전원 버튼을 찾는 데에 십 분가량 쓴 뒤 배터리가 비어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