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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과 미물(23.03.26)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39

허물과 미물

 

 

 

 

그는 그가 제대로 살기를 바랐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길 바랐고, 대체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으면 했다. (물론 아무것도 이루어 주지 않았지만.) 이 소원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염원으로 부를 수도 있게 되어버렸다. 그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사랑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눈치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길 뻔했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도 안 되진 않았다. 조커는 사람이었고 고담시에 있었다. 배트맨이 사랑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조커는 위처럼 써서, 눈에 보이는 아무 벽에나 긴 혈서를 붙였다.

 

누가 구해다 줬는지도 기억 안 나는 이 골방. 벽지를 다 뜯어버린 구석탱이 방은 꽤 번듯한 저택 지하에 있었다. 조커를 사모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대다수 남자는 그를 경멸했지만, 대다수 여성들은 깊은 굴을 파 숯을 굽는 헤스티아처럼 광기에 관한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조커는 사랑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돌려줄 수는 없었다. 조커는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마음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조커에게 사랑은 감각이었다. 배트맨의 잘생긴 눈을, 일그러진 이 얼굴과 달리 일부러 조형한 듯한 얼굴 윤곽을 바라보면아니, 때로는 목을 조르는 손을그슬렸는지 검은 발을 쳐다볼 때 평소에는 느끼지도 못하던 발등 언저리가 괴상하게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종아리를 굳히고 무릎이 쑤시고 목구멍 아래까지 치닫는 느낌 바로 그것. 조커는 사랑했고 잘 알았다. 둔감한 그이에게 이걸 한 번만 느낄 수 있게 하면 미쳐버릴 거라고 조커는 생각했다.

. 생각이라고 하니, 그에게 느껴지는 게 또 있었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피 웅덩이. 시체를 계단서부터 질질 끌고 내려오느라 쿵, 쿵 하며 생긴 흰 벽지의 얼룩과, 계단 모서리에 찍힌 살점과 그의 발밑에 고인 낙서들. 조커는 피가 굳기 전 그걸 손가락에 묻혔다. 시체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아기처럼 우는 소리를 냈고, 그 뒤 하인에게 펜촉을 가져다 달라고 명령했다. 말을 할 수도 앞을 볼 수도 없는 능란한 하인이 가져다준 만년필에는 이미 잉크가 차 있었다.

조커는 철필 끝에 피를 찍어서 이렇게 썼다. ‘그는 그가 제대로 살기를 바랐다아니, 잿빛처럼 바랬다’, 아니면 -殺氣를 원했다’? 마르지도 않은 사람 가죽을 떼다 쓸 수가 없었으므로 멀쩡하게 종이에(잠깐 정신 나갔을 때 다 쥐어뜯은 벽지 쪼가리에) 적었다. 그래서 글씨는, 번지지는 않았지만 서툰 연애편지처럼 고친 흔적이 많았고, 검은 잉크와 붉은 피가 섞여 점차 적갈색 빛을 띠며 예쁘게 말라갔다. 그가 펜을 집어던졌다. 이제 여기서 떠날 셈이었다.

자세히 보니 하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조커가 히힛 웃었다. 긴 혀를 날름대는 파충류처럼 싯싯대는 소리가 섞인, 어딘가 갈라진 듯한 소리. 하인은 이걸 들었고 자기가 떨고 있다는 걸 잘 몰랐다. 조커가 그에게 눈을 뜨라고 하자, 눈을 떴는데, 어머나. 두 의안이 완전히 검은색이었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응애, 하고 조커가 다시 갓난애 소리를 냈다. 실제와 아주 흡사했다. 조커는 경찰이 오기 전 그곳에서 떠났다. 감금된 지 나흘만이었다. 그 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을 터였고, 조커는 집주인의, 태어난 지 갓 두어 달 된 아이를 가져가고 싶었다.

그래서 배트맨은 다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매만 굳혔다. 배트맨이 알기로 이 사건은 대부호가 실종됐다는어쩌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는 이야기에 불과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가 로빈에게 홀로 강도 범죄를 해결하게 두고 여기까지 쫓아온 건, 조커의 초대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사랑의 결실이 갖고 있어” ‘X를 긋고 다음 줄에 이렇게 고쳐 썼다. “우리 사랑의 결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미친놈에게 어울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또 벌이고 있을 터라며 그는 만사 제쳐두고 초대에 응한 것이다.

그가 물었다.

그게 뭐지?”

보송보송한 산짐승 어린 것의 피륙으로 만든 포대기를 가리키면서. 조커가 누런 이를 번들거리며 다 새는 발음으로 대꾸했다. “결실!”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덧붙였다. “아기.”

여긴 60피트짜리 건물 위였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팔다리가 통통한 아이를 놔두고 싶지는 않은 곳이다. 게다가 아직 머리를 가누지도 못하는 갓난애라면. 배트맨은 잠시, 사라진 백작이 아이를 가졌었는지 고려해보았다. 브루스 웨인은 모르지만 배트맨이 아는 정보라면 이랬다. 그녀는 다소 사랑이 많은 여자였지……. (‘오랜 불륜이란 뜻이다.)

그리고 범죄자들에 대한 독특한 관심, 수집욕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산후의 무기력증이 그녀의 관심을 증폭시켰거나, 아니면 하필 임신했을 때 원한 게 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고담의 악당이었을지도 모른다. 배트맨은 한숨 쉬진 않았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했고…… 사실상 배트맨은 모든 걸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고여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브루스 웨인은 언젠가였다. 빛과 희망, 반짝이는 면면, 호화스러운 생활 등등. 미지의 희열. 배트맨은 이렇게 되지였다. 결과적이고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말미.

눈이 마주쳤다. 가면 뒤의 눈자위는 안와가 깊어 어둑해 보였지만 선득하게 빛나는 영웅의 눈빛은 여전했다. 정정하자……. 배트맨은 조커의 영웅이었다. 왜냐하면그에게 고담이 곧 조커이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거의 모든 시민이 둘의 관계를 손꼽아 기다렸고 밀어주었고 응원했기 때문에조커는 진도를 꽤 빨리 뽑을 수 있었다. 배트맨은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우리 사랑의 증명이하나쯤 필요하지 않겠어?”

조커가 말했다. 배트맨은 흘려들었다. 단지 조금 피곤하다는 듯 팔을 뻗었다. 그는 조커의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조커보다 빨랐다. 아기를 떨어뜨린다면 충분히 안전하게 받아낼 수 있었고, 60피트는 그리 높지도 않았다.

마음이 불편한 건 피로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조커가 하하,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에 보이니까 싫어? 그럼 이렇게 하면

다음 순간 배트맨은 조커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움직이는, 포동포동하고 하얀 무언가. 그건 새끼 돼지였다. 배트맨이 고개를 들었다. 조커는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진심이라는 걸 배트맨도 알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가 제대로 살기를 바랐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길 바랐고, 대체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으면 했다. (물론 아무것도 이루어 주지 않았지만.) 이 소원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염원으로 부를 수도 있게 되어버렸다. 그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사랑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눈치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길 뻔했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도 안 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