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23.03.28)
막간극
인터미션 후, 3막 전
신의 처소는 낮은 곳에 있다고 했다. 에이드리안은 늘 궁금해했다. 어디까지가 낮은 거지? 저 눈동자로 가면…….
남자는 허리에 총을 차고 있었다. 한밤에 깨어나 보니 그는 이곳에 있었다. 아직 아침이 아니라는 걸 그는 금세 알아챘는데, 교회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았지만 그 장소가 불온했다는 이유로 그는 세상의 밝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이곳은 사방에 태양이 떠 있었지만 어둡고 추웠다.
‘밝기’라는 건 눈앞이 환하고 그렇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어서, 그는 두통을 겪고는 했다. 지금도 그랬다. 에이드리안은 허리춤의 건벨트가 흔들리지 않도록 거기에 손을 얹었다. 바람이 불어 시야를 망치고 있었다.
싸락눈이, 모래처럼 쌓였다. 조금 전에는 신발 밑창이 묻히는 정도였는데 몇 분 후에는 간신히 발등이 비칠 만큼이었다. 그는 본래 자기 것이 아닌 신발과 무기와, 불그스름한 옷차림을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두 손에는 꼭 끼는 장갑이 씌워져 있었고 총은 아름다운 금빛 리볼버였다. 사막에나 어울릴 법한, 정강이를 다 덮는 장화가 이 성소에서 그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래, 여긴 성소였다. 하늘과 땅이 모두 희어 결국엔 눈빛이 바래간다는. 가장 낮은 곳이라고 했고 신의 처소라고도 했다. 그러나 모든 물이 가는 곳과는 다르게, 이곳으로는 모든 바람이 도착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숲이었고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광야였다. 오로지 펼쳐지기만 한 황무지이기 때문에, 둥근 지평선이나 수평선 따위도 없었고,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모래 폭풍만이 여기 바람이 분다는 걸 증명했다.
에이드리안은 곧 아리아를 만났다. 아리아가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니?”
“어디로 가려고 하는데.”
“바깥. 나가고 싶어.”
“왜?”
“엄청나게 큰물이라는 게 뭔지 만져보고 싶어.”
“바다를 이야기하는 건가?”
“아니, 그건 짠 물이잖아. 내가 생각하는 건… 그래. 커다란 호수 말이야.”
“…손 무는 책이 익사하는?”
둘은 마주 보며 살포시 웃었다. 아리아는 바람에 아랫부분이 깎여 버섯 모양이 된 바위에서 탁 내려섰다. 높이가 꽤 되었는데, 깃털에 떨어지듯 발이 푹 묻히며 조금도 상처 내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우린 어쩌다 여기에 떨어진 거지?”
“떨어진 게 아니야. 어젯밤 세상이 멸망했어.”
“뭐?”
“신을 믿는 사람은 멸종하고, 순례를 떠난 사람들은 살아남았어.”
그래서 순례길이 도피처인 것도 탄로 났다고, 아리아는 말했다. “넌 누구야?”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게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은 궁금했다. 이 여자는…… 신인가, 하는 것이.
백색 모래 속 아리아는 자꾸만 음영이 바뀌는 대리석 조각 같았다. 짜 맞추어진 게 아니라, 매끈한 사암 따위를 끌로 부드럽게 긁어내 만든 한 덩이 같았고 그래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사람이란 선박처럼 골조부터 차차 지어져 살을 붙이면 완성되고, 결국 가라앉거나, 다시 만든 폐허처럼 원본을 찾을 수 없게 되니까.
문득 에이드리안이 몸을 떨었다. ‘결국 가라앉거나…….’
아리아가 파리한 입술을 열었다. 보고 있자면 눈이 아프게 빛이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에이드리안은 아리아의 눈이 아니라, 속눈썹과 턱 밑에 드리운 그림자를 마주 보았다. 그것만이 생기를 품은 눈동자 같았다.
“나는 사라지고 있어.”
“너는 여기 있어.”
“네 앞에는. 분명 그렇지. 하지만….”
아리아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가 싱긋 웃으며, 목소리를 조금 띄웠다.
“네가 날 기억해 줄래?”
“그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새로운 섬으로 가겠어? 그 정도는 아직 할 수 있거든.”
‘아직’이라는 건 곧 할 수 없게 된다는 소리였다. 에이드리안은 섬을 떠올려 보았다. 새로운 땅이 아닌 섬이라면, 우리 둘만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또는 에이드리안 혼자. 그는 홀로 몇십 년을, 꿈속의 여자 하나만 쳐다보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네가 같이 있으면 가능해.”
“그편이 좋니?”
“먼저 질문한 건 너지. 난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고.”
에이드리안의 오른손이 움찔했다. 올바르다는 이름을 가진 손으로 총을 만지고 있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좀 더 길쭉하고 섬세하며 따스한 기운을 품은 나뭇가지가 유용했다. 사람 키만큼 길지는 않지만, 때로 손바닥만큼 짧기는 했다.
에이드리안은 지금 떠올린 것처럼 가장하여 물었다.
“넌 신인가?”
“그런 건 없어.”
“알아.”
“왜 물어본 거야?”
“확신이 필요해서. 신이 아니라면 나와 함께 가도 좋아.”
오만한 얘기였다. ‘섬’을 제공하는 건 아리아의 일이었고, 그 허락과 호응이 없는 한 여기 갇힐 수도 있다는 걸 에이드리안은 알았다. 다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게 뭐가 나쁘지?’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쁨도, 행복도, 환희와 광기, 슬픔, 공포마저도.
손을 무는 책도 없었다.
아리아가, 항로를 잃은 어선 주위를 비행하는 바다새처럼 에이드리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발자국은 남지 않았다. 발이 닿은 땅은 모래가 스르르 무너져 몸을 약하게 빨아들일 뿐이었다. 에이드리안이 걷지 않는 이유였는데 아리아는 맨발로도 잘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바위에서 뛰어내리고도 빨려들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자신이 여자의 이름을 안다는 걸 깨달았다. 아리아 에리얼 오션…. 그는 사기극에 휘말린 것이다. 세계는 뻔뻔한 왕의 행차였고 그는 퍼레이드에 끌려들어 간 선량한 시민이었다. 아리아는 그의 목덜미를 붙든 채 카니발 가면을 건네주었다. 붉고 금박이 칠해진 오래된 가면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름이었다. 아리아가 손을 위로 올렸다. 위로, 더 위로. 까마득하게 높은 광풍의 꼭대기에 닿을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이곳에서 ‘현실’이란 낱말이 통용된다면) 한쪽 팔을 자연스럽게 들어 올렸을 뿐이다. 팔찌가 짤랑 소리를 냈다. 무어라 적힌 것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저것이 태초의 언어로 기록되리라는 걸 알았다.
아리아의 뒤, 바위보다 뒤편에서 큰 땅울림이 일었다. 아득한 노랫소리 같은 메아리와 함께, 검은 땅이, 산더미를 이루며, 백야를 압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