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23.04.14)
ㄱ. 흡연구역: 우중충한 봄이다.
우정은 천서현의 담배 상표를 흘긋 살펴보았다. 그녀는 흡연구역도 아닌 곳에 깡통이 놓여 있단 이유로(분명 재떨이 삼으라 놔둔 거라며) 곧장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불을 붙이자 콧등에 노랗게 흔들리는 빛점이 생기다가 말았다. 우정에게는 눈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천서현이 낯설었고, 무엇보다 원칙주의답게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거지.” 침음하며 웃는 저 여자 ‘천서현’이 ‘서현’이 아니라는 데에 안도감을 느꼈다.
ㄴ. 필자의 마음에 관한 보고: 왜 쓰다 말았어?
“천 소령님.”
우정은 천서현이 들어오자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건물 옥상이라고는 하나 시도 때도 없이 라이터를 켜대는 둘 덕에 쾌적하지 못한 장소로 탈 바뀐 지 오래다. 트여 있지 않은 흡연실이었다면 줄담배를 무는 소령 때문에 너구리굴이 되었을 터다.
천서현은, 쉬는 시간임에도, 조금 전 올린 보고서 사본을 들고 올라왔다. 보고 내용은 간명했다. ‘전멸.’ 천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그 단어 선택 하나뿐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우정은 천서현을 유심히 보다가,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버릇대로 난간 바깥에 고개를 내밀었다. 손가락에는 불티가 꺼져 연기만 뿜는 장초를 쥔 채였다. 그에게는 천서현이 들어올 때마다 담배를 끄는 쓸데없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또 저러네.”
천서현이 말했다. 유우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것은 ‘천서현’이니까. 서현도, 천 소령님도 아니라… 사실은 천서현일 뿐이고 그녀 자신도 알고 있을 터였다. 무언가 애먼 타박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던 우정은, 다음 말을 듣고 입안에 신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그녀가 말했다.
“너 나 좋아해?”
그리움 때문이었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오 년 전의 2022년 4월, 지구 온난화부터 유우정의 풋사랑까지 익지 않고 놓인 세계에서 그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돌아갈’ 수는 없는 거였다. 나아갈밖에.
그래서 우정은 이번만큼은 확실히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당신은 아니다, 라는 말이었다. 천서현은 이해한 것 같았다.
ㄷ. 전원 잔류: 생존
기쁘냐고 당신이 묻기에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리고 제발 꺼져 달라고 칭얼거렸다. 당신은 내 꿈에 종종 침입하고는 했지만, 오늘처럼 기쁜 날 생시를 가장한 백일몽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소령님하고는 이제 영원히 못 보는 겁니다. 차피….” 그러자 서현은 웃었다. 낄낄거리는 소리라도 낼 줄 알았는데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안 기뻐 보이네.” 나는 시야가 헛도는 걸 느꼈다. 화가 났다. 당신의 동생 비슷한 사람과 당신과 하여간 모두가 살아남은 이 기적적인 세계에 대고 할 말이 그딴 것밖에 없냐고 뇌까렸다.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려 무심코 돌아보았더니 천서현이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벗고 담배를 문 채 불은 붙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전후좌우로 당신이 있었다. “야.” 안경 없음-담배-불 없음 천서현이 말했다. “뭐하고 자빠졌어?” 안경-담배-불 있음 천서현이 말했다. 나는 어느 쪽에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주저앉았다. 오심이 들었다.
“야.”
이제 말하는 게 누군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 야.” 내 옆구리를 구둣솔 자국 난 군화로 툭툭 치는 이가 당신인가? 그렇다면 몇 번째?
ㅁ. 비상식적 도덕주의: 천서현은 유우정 앞에서 담뱃불을 안 붙인다.
약속한 건 아니다. 그렇게 됐다. 사실 천서현과 유우정 사이 겨우 남아도는 묵약 따위는, 대부분이 ‘그렇게 됐다’ 식이어서 뭐라고 콕 집어 연유를 유추할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둘은 영 다른 타인을 대하는 것과 별 차이 없는 건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천서현은 유우정 보는 앞에서 기름이 거의 떨어진 라이터를 틱틱댔다. 주머니에 있던 것인데 부싯돌이 고장 나 헛돌았다. 서현은 점점 짜증이 치미는지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때 유우정이 초록색 라이터를 던졌다. 천서현은 쥐고 나서야 확인했다. 편의점에서 오백 원에 파는 것보다 조야하게 생겼다. 어디서 무가지로 뿌리는 걸 주워 왔는지 정체불명의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연락하면 개인정보 다 털릴 것 같은 활자체로.
“너 이거 어디서 났어”라고 천서현이 묻자, 유우정은 “그냥 좀 챙겨왔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집어 온 건 아니었을 테다. 하지만 유우정도 언제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다 주운 격이다.
그가 말했다.
“살다 보면.”
그는 가벼운 듯 이야기했으나, 목청이 갈라져 있었다. “답지 않아집니다.” 천서현은 그에게 이번이 몇 번째 회귀인지 묻지 않았다.
그런 세월을 알아서 뭐 하나,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천서현이 이곳에서 하는 건 무조건적으로 직무에 한정된 일들이었다. 원석이 발견된다면 지긋지긋한 그 물건을 쥐여주고, 이제 또 결정하라고 부추기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으며, 그조차 다음 작전 결과에 따라 달라질 거였다.
따라서 천서현은 ‘살다 보면 달라져’ 따위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냥…… 담배를 피웠다. 유우정이 준 물건을 썼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 회귀자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ㅂ. 금연 구역: “실없는 소리.”
나는 대꾸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흡연 금지 팻말을 가리켰다. 천서현이 픽 웃더니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소령님 피우시는 담배가 뭐냐고, 유우정이 묻고 있었다.
“원석 발견됐답니다.”
내가 말했다. 유우정의 시선이 조금 몽롱해졌다. 그는 담배를 물고 있었지만 흡연하지 않았다. 고스란히 타들어 간 담배를 뭉개 끄고 나서, 유우정은 제법 빠르게 자리를 떴다. 천소령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후일 듣기로는 그게 아녔다.
a. 기적
“바쁘다더니 자주 오시네요.”
여태 꽃 놔주고 애써 들러준 사람에게 건네는 성질머리가 고약했다. 지적하는 대신, 천서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프다는 것도 순 뻥이지? 그 나이 먹고 말하는 싸가지가 어째 변한 게 없어….”
“소령님도 여전하십니다.”
여전히 버릇없는 말투였다. 그녀는 대꾸하는 대신 천천히 다가갔다. 오래간만에 눈 마주치는, 남자의 손을 제대로 엎어놓고 링거액을 조절했다. 유우정이 중얼거렸다.
“아마, 한… 십 년 정도.”
“그래?”
천서현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대꾸했다. 심상한 표정을 본 유우정이, 드물게도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17년.” 그가 정정했다. 서현이 시선을 옮겨 시든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바라보았다. 유약이 푸르른 이 물건은 원래부터 여기 놓여 있었다. 삼 년째.
b. 회포 후
유우정은 낯모르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총포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 이 질감과 농도로 보건대 땀을 줄줄 흘리며 잔 모양이었다. 악몽 꿀 때 으레 그랬듯이. 이번 악몽에도 천서현이 나왔다. 처진 몸을 자꾸 둘러메려고 하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 팔을 휘둘렀는데, 꿈속답게 몸이 안 가누어져 ‘유우정 또 헛짓거리’가 되었다.
“깼냐?”
목소리가 익숙하다. 우정은, 이 낯선 침실과 불길할 정도로 귀에 익은 목소리 사이에서 어떤 직감을 발견하고 이불을 홱 걷었다. 거실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상영되고 있었다. 천서현이 파리한 얼굴로, 영화를 보는 건지 자는 건지 모르게 늘어져 있었고. “영화가 시발….” 그녀가 중얼거렸다. 남자의 머릿속을 벼락같이 치고 지나가는 건 바로 어젯밤의 기억이다.
천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정아.”
“저 갈 겁니다.”
“어 그래 가라 가.”
유우정은 곧장 가지 못하고 멈칫멈칫했다. 침실에 이상한 흔적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이러고 안절부절못할 걸 알면서도 천서현은 천연덕스럽게 사탕이나 깨물어 먹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거 네가 준 거다? 삼 년쯤 전에.”
“안 물어봤습니다.”
“말 좀 놔, 인마.”
“싫습니다. 어제 무슨 일 없었습니까?”
“네가 픽픽 쓰러지고 지랄이긴 했어. 환자 아니었음 길바닥에 버리고 오는 건데.”
그래서 아픈 거구나. 화도 안 났고, 유우정은 그냥 납득했다. ‘그뿐이면 볼 일 없지.’ 그의 시선이 천서현의 민낯으로 향했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디자인이 좀 바뀌었나. 멈칫한 와중 서현이 그를 보았다. “너 있잖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나 좋아하니?”
“…….”
“뭐,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긴 한데.”
“…….”
“십칠 년? 애 하나가 고딩 될 나이네.”
“…….”
“여기서 삼 년이니까 한… 그래,”
내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힐까 봐 먹던 사탕을 빼앗았다. 천서현은 저항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안경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입가에 끈덕끈덕한 당을 묻힌 채 이쪽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정은 그녀가 한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 멈칫했다. 얄쌍한 테 너머로 눈동자가 보였다.
‘검구나.’
이만치 검은 것을 그는 몇 회차째의 구덩이에서 보았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자 더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도망쳤는데, 왜냐하면 한 번 더 회귀하기 위함이었다.
천서현이 이를 악물며 유우정을 밀쳤다. 잡아 뜯어내는 데에 가까웠다.
“관둡시다.”
그는 달려든 것과 다르게 슴슴한 투로 말했고, 얼른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천서현 쪽에서 옷소매를 와그락 움켜쥐자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야. 이미 다 구겨져 있던 셔츠가 노랗고 끈적한 당분으로 더러워졌다.
그녀가 말했다.
“나 이거 두 번 안 물어본다. 아직도 그래?”
“뭐가 ‘그래’인지 말씀 안 하시면….”
“안 하면 썅, 뭐, 어쩌게.”
“…….”
나는 표정을 굳혔다. 천서현은 혀를 쯧 차더니, 아 뭐, 하며 자기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차림에.
그녀가 유우정의 입에 막대사탕을 쏙 넣었다. 우정은 그대로 욱 뱉을 뻔했다. 목구멍에 신맛이 닿을 만큼 가차 없이 쑤셔 넣은 데다가 남이 먹던 거였다. 하지만 뱉는 대신에 씹어 삼켰다. 억울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천서현이 또 혀를 찼다.
“쯧.” 기분이 퍽 괜찮은 것 같았다.
d. 지난여름에
“피우던 담배를 바꿨어.”
천서현이 말했다.
“바꿨다고 하셨습니까?”
응, 하고 그녀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내가 피우던 것과 같은 종이었다. 나도 모르게 쓰잘머리없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긴장되어 구겨진 담뱃갑만 바라보았다. 서현이 팔을 툭 치기에 겨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이제 이거 괜찮냐?”
“무슨 뜻입니까?”
천서현이 그 낯짝에 담배 연기를 훅 뱉었다. 눈을 부릅뜬 채 표정을 굳혔으나 매운 연기 때문에 눈물이 고였다.
천서현은, 이미 무언가 눈치챈 듯했다. 그녀가 장난스레 손을 휘저었다. 쓰잘머리 없는 짓 말라는 뜻이었고 곧 손짓은 가운뎃손가락을 드는 동작으로 바뀌었다. 엿 처먹으라는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꺼끌한 실소가 나왔다.
얼른 표정을 바꾸었지만.
얌체 같은 놈, 하고 천서현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엔간히 피워 재꼈나 보네.”
“엄밀히 말하자면 소령님이 아니었습니다.”
“약속도 잘 지켰고.”
그녀가 미소했다. 칼날이 지나간 자국처럼 희미했다. 나는 혀뿌리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담뱃내를 곱씹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사탕이 한 개도 없었다. 하기야, ‘돌아온’ 후 들른 집은 쓸쓸하게 비어 있었다. 그간 누군가 청소하고 치우긴 했는지 먼지가 더께 같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사실에 서글퍼졌다.
지난 회차에 번들로 사둔 레몬 사탕이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나마 ‘없어졌다’고 여겼다. 곧장 생각을 고쳐먹었다. 원래 없는 게 당연하다. 그쪽의 삶은 그쪽의 것이기에.
적응 덜 한 우주비행사처럼 내게는 캡슐 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천서현은 늘 그랬듯 부수고 들어오는 쪽이었다. 나를 굳이 제집에 끌고 들어간다거나, 면전에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은근한 의도를 가진 쪽.
e. 회포 전
“어땠어.”
그녀에게서 지독한 연기 냄새가 풍겼다. 천서현은 손끝을 조금 떨고 있었고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다. 드물게도 시야가 좁아진 모양으로. 나는 화병을 쳐다보았다. 철 지난 프리지아가 시들어 있었다.
“지켰습니다.”
무엇을, 부연하지 않아도 그녀는 제멋대로 이해했다. 나는 그걸 용납하지 않으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f. 어땠어?
당신이라면
어떨 것 같으냐고, 유우정은 묻지 않았다. 긴 시간을 모조리 기록한 뇌리에 스치는 한 가지 정서를 발견했는데 그게 이번 회차의 나를 망치게 된다면. 당신이라면 잊을 거냐. ‘물론 아닐 테지.’ 유우정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그들을 미지근하게나마 덥히고 있는 불빛이었다. 유우정은 문득 깨달았다. 이 꼬장꼬장한 인간에게서, 이번에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기어코 이곳에 들어서고 말리란, 아무도 위협하지 않은 위험 때문에 여태 이 짓을 반복해왔다는 것.
좋고 나쁨을 따지기 전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우정은 천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녹고 굳길 반복해, 모양새가 괴이해진 사탕을 꺼내주었다.
“고맙습니다.”
유우정이 웅얼거렸다. 천서현은 조금 더 웃었다. 흐릿한 칼자국이, 상처를 당겼을 때처럼 벌어지다가 꼭 다물렸다. 그녀는 부하가 미치지 않고 돌아온 것에 관해서 기특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고마운 건 이쪽이지.’ 정도의 관념은 있었다.
물론 말하지 않았다.
유우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맛이 간 레몬 사탕을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천서현은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아는 맛이다. 그리움은 시고 천서현은 여태 그것을 간직해왔다. 이 꼬장꼬장한 인간에게서 아직도 벗어나기 싫다는 사실. 이것만이, 우리를 미지근하게 죽 쑤고 있는 빌어먹을 삶이었다.
ㄴ.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으면….
‘좋을까 과연?’ 천서현은 생각했다. 유우정도 마찬가지였다. 선을 넘는 건 언제나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제나 타인이므로, 천서현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모름지기 이 원 안에서는 그녀의 법칙을 따라야 했다. 국가와 소속에서 박탈된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인데.
f/in. 우리는 함께 로마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