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태연자약한 유령(23.05.04)
시간이라는, 태연자약한 유령
입학식 직후의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자정부터 새벽 중에는 통행금지 시간에 해당하는 때가 있었는데, 물론 델프림은 감시가 심한 첫째 날을 제외하고 잘만 나돌아다녔다. 교관들이 특히 주의하고 있는 입학 첫 주라는 걸 감안하면 기척을 숨기는 실력이 뛰어났던 셈이다.
게다가 그들이(델프림 말대로라면 ‘늙다리’) 간과하고 있는 지점을 델프림은 간파했다. 따라서 그날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 블나이를 목격한 게 그였던 건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사감의 등불이 멀어지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면 다시 뒤로 다가올 터라, 델프림은 어쩔 수 없이 블나이 앞에 나섰다. 블나이는 아직,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온 소년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이 밤에 갑자기 낮이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블나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흠?”
델프림은 상대를 깨우는 대신 조용히 관찰했다. 가만 보니 사람이 아닌 밀랍 인형 같기도 했지만, 입학식 때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이 있었다. 신입생도였다.
그때 블나이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그 새벽 같은 눈동자에 초점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델프림은 블나이의 눈앞에 손바닥을 몇 번 휘저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가만 보니, 예쁘장하게 생겼다만 소년티가 과해 마음이 동하는 얼굴은 아녔다. 성감에 일찍이 눈뜬 델프림에게는 심심하게까지 보였다.
블나이가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하.’ 델프림은 짓궂게 생각했다. ‘가족과 떨어져 몽유병에 시달리는 하이디로군.’
생각하며 뭐라고 빈정거려 깨우기라도 하려는데, 저쪽에서 사감이 든 빛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지근거리 안으로 들어간다면 이 잠에 빠진 얼음 왕자만 질책받지는 않을 터였고, 델프림은 이 판단 하에 블나이를 둘러멨다.
그래도 블나이는 뭐라 꿍얼거릴 뿐 깨어나지는 않았다. 델프림이 숙소에 던져넣고 나서야 눈꺼풀을 떨며 끔뻑거렸는데, 그때 델프림은 이미 나가버린 후였으므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날 밤은 블나이에게 풀어도 그만 안 풀어도 그만인 난제로 남았다. ‘그때 문을 닫은 사람은 누구’였을지 그는 가끔 생각했지만, 자신의 몽유기질을 입 밖에 낼 순 없었기 때문에(애초 장본인도 몰랐던 사실이었고) 그대로 묻히는 듯했다.
다시 마주친 건…
솔직하게, 둘은 연병장에서 두어 번 더 마주하기는 했다. 다만 함께 대련하지는 못했다. 신입생끼리 붙였다가, 그것도 델프림 같은 고관 작위를 가진 생도를 생판 초보인 학생과 붙여 두었다가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은 말 그대로 ‘스치거나’ 아니면 ‘눈에 띄었다’. 어쩌면 두어 번보다 더 자주 만났을지도 모르겠으나 말을 섞을 만한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마주쳤다고 할 만한 사건은 호수에서 벌어졌다. 수업이 아닌 수영을 할 때 생도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고 배를 띄울 수 있을 만큼 탁 트인 전경이 뛰어난 곳이었다. 아마 귀족 한둘쯤은 이곳에 함선 같은 방갈로를 짓고 싶었으리라.
수업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동아리 시간이었고, 야외 활동을 권유할 만큼 날이 좋았다. 해가 맑고 높았다. 바람이 선선해서 그다지 습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주일 전 비가 내린 터라 호숫물이 파랗게 불어 있었는데, 평소 연병장에서 흙먼지 묻히며 구르던 생도들은 그것만으로도 잔뜩 흥분했다. 망나니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드는 소리가 연이어서 들렸다.
델프림은 그 꼬락서니를 경멸하면서도,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때만큼은 그의 녹록지 않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덮여 해사한 소년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따라서 뛰어들지는 않았다. 웃옷을 벗기는 했지만, 호반에 털썩 앉은 채 저들끼리 물 튀기는, 눈 맞는 개 같은 소년들을 가만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그런 시야 귀퉁이에 유난한 미인이 걸려들었다. 사관생도로서는 아직 품위를 지키고 있는 터였지만, 지긋지긋할 만큼 향락에 뛰어들어 본 델프림은 유난히 이런 레이더가 좋았다. 깜짝 놀라지 않고도 미감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게 그가 가진 특권의 일부이기도 했다.
블나이의 머리칼이 거울처럼 햇빛을 산란했다. 시허연 설산 같았던 빛깔이 이 계절의 녹음에서는 은사시나무처럼 여운을 남겼다. 무표정하고 냉한 인상이야 어디 가질 않았지만……. 델프림은 팔을 뒤로 돌려 강모래에 손을 묻었다. 물을 잔뜩 머금어 미끌미끌한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갈퀴처럼 강바닥을 긁고 있었다. 하지만 곧 얕은 파도가 밀려와 갈퀴 자국을 지웠다.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델프림은 일어섰다. 그가 몇몇 소년과 인사치레를 주고받고, 멋모르고 첨벙대는 소년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면서 블나이에게 다가왔다.
블나이는 명백하게 피하는 기색이었다. 델프림이 물었다.
“수영 안 해? 옷 다 입고.”
“……너랑 상관없잖아.”
하고서 소년은 젖은 모래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타인과 내외하는 게 확연해 보여서 델프림은 장난기가 돌았다. 그가 소년의 얄쌍한 귓등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목덜미까지 슥 문질렀다.
아직 성감 같은 걸 잘 모르는지, 블나이는 그냥 고개를 털고 말았다. 이때쯤 델프림은 몽유병 사건 같은 것은 거의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이따위 이름도 모르는 생도를 염두에 둘 이유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델프림은 장난스럽게 선심 썼다. “조용한 데를 아는데.”
실은 선심이라기보다는 변덕에 가까웠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하지만 블나이는 이것을 호의로 착각했는지, 곧장 뒤돌아서는 거였다. 소년이 물었다.
“어딘데?”
두 눈이 천진한 호기심으로 표표하게 빛나고 있었다. 델프림은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어서, “몰라.” 이렇게 말했다. 김샌 블나이는 먼저 걸어가 버렸다. 델프림이 어슬렁거리듯 따라갔다.
“나도 아는 데가 있거든.”
블나이가 말했고, 델프림은 자신이 친 장난 따위 생각지 않고 되물었다.
“어딘데?”
“여기.”
물색이 달랐다. 더 깊었고 더 멀었다. 이 호수가 이렇게 넓던가… 델프림은 아득한 수평선을 넘겨보려고 손차양을 쳤으나 소용없었다. 한 노인이 반대편 섬에 조각배를 댄 채 낚시하고 있었다. 좀 전에 앉아 있었던 얕은 흙탕물에 비하면 풍류 있다고까지 표현할 만한 아름다운 장소였다.
델프림은, 여길 어떻게 찾았느냐는 의미를 담아 블나이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 소년은 옷을 벗느라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에 뛰어드는 몸짓에는 하등의 뿌듯함마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곳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독점욕 같은 것이 결여되었거나… 그런 감정을 넘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 진짜 재미없네.”
블나이는 첨벙거리느라, 이 소리를 못 들었다. 뭐라고 했냐는 듯 돌아보는 얼굴이 민물에 젖어 빛났다. 델프림은 히죽 웃으며 좀 거리를 두고 물에 들어갔다. 차갑고 비린 냄새가 났다.
잊어도 좋은 기억, 이라기보다는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잊게 될 순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좀 예쁘장하다는 사실 말고는 블나이란 사람은 아직 도드라지는 것 없는, 풋내기 소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야?”
블나이가 투덜거렸다. 그는 ‘풋내기 소년’ 시절의 추억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땐 아버지에 의해 거의 감금 생활을 하다가 사관학교로 ‘탈출’한 시점이어서, 인간관계에 능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 내몰리기 전 친해질 수 있었던 사이였다.
적어도 블나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델프림은 검은 실크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둘이 있는 곳은 병영과 가까운 막사였으나 델프림은 이만한 호사 정도는 가볍게 허락되는 수준이었다. 질 낮은 포도주를 일그러진 유리잔에 따라 마시면서, 블나이는 뺨이 좀 붉어져 있었다. 낮에 다른 병사들과 함께 강에 수영 나갔다가 돌아온 터라서 목덜미며 이마가 발갛게 탔나 싶기도 했다.
델프림이 몸을 숙이며 손을 뻗었다.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들어내자, 아주 약간 그슬린 살갗이 보였다. 그는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상대를 조금 더 취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금 키스한다면 술이 확 깼다며 나가버릴 게 분명하니까.
그가 물었다.
“이제 몽유병 같은 건 없지?”
“당연하잖아. 그런 애 같은 버릇….”
“의외로 신병 사이에서 유행하던데. 유령 봤다는 말의 절반은 몽유병 환자야.”
“……나머지 절반은?”
“흠.”
델프림은 대꾸하는 대신 한숨 쉬었다.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버릇이었고, 블나이는 정직하게 소름돋아했다.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잔에서 손을 떼는 게 더 늦기 전에 제 막사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물론 그럴 수 없었다. 델프림은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둬 놓기보다는 좀 더 유연한 방식으로. 그는 친절하게 화제를 바꾸어 주었다.
“내일은 시간 비워 둬.”
“뭐? 왜?”
“나랑 놀아줘야지. 매일 다른 사람이랑만 놀아날 거야?”
느글느글한 말투에 블나이가 스스럼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델프림이 이럴 적에는, 잘은 몰라도 무언가 ‘꾸미는 것’이 있다는 소리라는 걸 슬슬 알게 된 참이었다. 친구 사이에 장난 이상의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설상가상 델프림은 의도가 다분한 미소를 지었다. 눈매가 예쁘게 휘었다.
그가 말했다.
“나랑 데이트하자.”
“데이트라니…….”
“춤출 줄은 알지, 블나이.”
자신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배우기라면 했다. 블나이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델프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리며, 잔에 담겨 있던 내용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블나이가 재빨리 붙들어 놓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잔을 구한 덕분에 그는 델프림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말았다. 델프림이 흐음, 하며 마저 지껄였다.
“적극적인걸.”
“아, 아니. 아니, 이건.”
“유령!”
누군가 막사 문을 젖혔다. 사관학교를 함께 졸업한 동기지만 둘보다 계급이 낮은 사내였다. 델프림이 찌푸리며 한 소리 하려는데, 블나이가 딱딱하게 물었다. 델프림은 그 말투에 조금 놀라 바라보았다. 블나이는 여전히 뺨이 붉을 뿐 별달리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아하.’ 델프림이 생각했다. ‘부끄러워하네.’
직전의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델프림이 조금 재밌어하는 사이 병사가 외쳤다.
“유령 나왔다고!”
그 뒤로 누군가 화로에 걸려 넘어지는 게 보였다. 화톳불이 우수수 튀어 우워어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멍청한 녀석들… 그러나 블나이는 여기에도 진지하게 응해주었다. ‘하여간 착해 빠져선.’
병사들이 원성하는 바의 요는, 이곳에 진을 친 지 사흘간 매일 같이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거다. 첫째 날에는 겁먹은 신병의 하소연으로 치부했고 둘째 날에는 모 소위가 보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 밤은 거의 모든 병사가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나타난 거였다…….
“‘그것’이 뭐지?”
델프림이 물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델프림은 으쓱하고서 그냥 한밤의 촌극쯤으로 끝내자고 권했다. 간혹 이런 신고식을 원하는 병사들도 있다고. (허무맹랑한 얘기였다. 누가 귀신 나오는 데에서 자고 싶겠는가?)
병사들의 얼굴을 살펴본 블나이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 무기를 챙겼다. 등불을 들어 올린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다녀오겠다. 다들 얌전히 있어.”
델프림에게는 이거야말로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이 밤에 어딜 가겠다고.
그렇게 말하니 블나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먼저 가버렸다. 한숨도 푹 쉬면서. 델프림은 별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에게 제대로 구해진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혼자 보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자정이 지난밤이었다. 파트너가 왜 있겠는가? 델프림은 가벼운 차림새를 하고 무기를 든 채 설렁설렁 따라나섰다. 블나이는 이 기척을 눈치챘으면서도 만류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다.
하필 옛 시절 이야기를 하던 때여서 그 밤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블나이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됐을 수도 있었다. 순찰 도는 사감이나, 교관이나, 양아치 같은 놈들. 델프림은 블나이의 더 어렸던 시절, 더 흥미로운 다른 일면을 몰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신중하지는 않았겠지.’
“블나이!”
“쉿.”
“왜? 유령이 도망이라도 갈까 봐?”
결국 블나이도 김샜다는 듯 돌아보았다. 델프림이 친근하게 웃으며 그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들은 숲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맨 처음 뛰쳐나온 병사는 저 안쪽에서 소피를 보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증언에 의하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라고 했어.”
“설마. 뭐… 누가 널어놓은 옷자락을 잘못 봤겠지.”
“그렇게까지 기가 약한 녀석들은 아닌데.”
“너 있지,”
하고 델프림은 부러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 블나이가 가만히 되물어왔다.
“왜.”
“춤출 줄 알아?”
“…아까 대답했잖아.”
“왈츠 같은 거 말고.”
그럼 뭔데, 하며 블나이가 이쪽을 보았다. 델프림은 어둠보다 검은 눈으로 숲 깊은 곳을 응시했다. 더 들어가면 깊은 못이 있었다. 커다란 물고기 같은 걸 여자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런 연못에는 터줏대감 같은 괴물 물고기가 사니까.
블나이는 여전히 진지해 보였다. 델프림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이따가 알려줄게. 너무 기대하진 마.”
누가 기대했다고, 따위로 투덜거리며 블나이가 앞서나갔다. 뒤에서 웃던 델프림이 잠시 그 등을 보더니, 불쑥 손을 붙들고 달렸다.
숲속이므로 발밑부터 머리 위까지 장애물이 많았다. 그들은 잔가지가 뺨을 스치고, 진흙탕이 발목을 휘감는 걸 느끼면서 달렸다. 뭐야, 하며 움직이기를 거부하려던 블나이는 몸이 술에 달아올라 얼결에 같이 뛰게 됐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무엇도 아닌 술기운과 달음박질 덕분에.
이 정도로는 허파에 기별도 안 가므로 헐떡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하늘이 훤하게 트이며 허공을 세로지른 달빛이 수면을 수놓은 장면은 가히 탄식할 만했다. 블나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엷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달무리가 베일처럼 시야를 덮었다.
“셸 위…?”
델프림이 지껄였다. 블나이는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전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그 가벼운 차림새에 시선을 주었다. 얄팍한 리넨 셔츠 안으로 몸이 다 비쳐 보였고 검을 매어 놓은 가죽 허리띠는 헐렁하게 풀려 있었다. 델프림은 거진 내의 차림이었다. 경갑을 갖추어 입은 블나이와 달리.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블나이는 상대의 손을 쥐었다. 정확히는,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델프림이 낚아채 갔다.
이 남자는.
‘델프림… 속을 전혀 모르겠어. 경계가 심한 건지, 허술한 건지도.’ 블나이가 생각했다. 몸을 붙인 상대방이 들었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델프림이 속삭이듯 말했다.
“유령이란 건 착각일 뿐이야.” 그는 블나이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달무리, 구름, 커다란 물고기, 은비늘 같은 수면이…” 블나이는 뱃속까지 간지러운 기분으로 어깨에 힘을 주었다. 자세가 빳빳하게 굳었다. 델프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마쳤다. “……마법을 부린 거지.”
글쎄. 블나이는 델프림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이유까지는 몰랐지만.
곧 델프림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단지 발을 밟히지 않으려고, 쫓기듯이 시작한 춤은 탱고였다. 아는 바가 있었지만 춰 본 적은 없다.
게다가 여긴 흙바닥이고, 제대로 된 정장도 입지 않았고, 조금만 걸어가면 물에 빠질 터였다. 이런 데에서 음악은 사치였다. 조금만 습기가 차도 휘어지는 현악은 전장에서 듣기는 힘든 법이다.
이런 생각을 알아챘는지 델프림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직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가뿐한 선율을 불렀다. 박자감만 있다면 몸을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블나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말했다.
“이건… 군무인데.”
“더 해보자고. 재미있으니까.”
“유령 찾기는? 적진의 병사였을지도 몰라.”
“아니, 아닐걸. 절대. 착각이었을 거야.”
델프림의 목소리도 어느새 끊겼다. 두 사람의 엇갈리는 호흡과 풀벌레, 물고기가 수면을 탁 치고 빠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조차 아주 가끔이었다. 블나이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포도주의 단맛이 혀뿌리에 남아 있었고 땀이 흐를 만큼 더웠다. 몸이 달았다.
델프림은 블나이의 흰 목덜미를 보았다. 조금 붉은 기색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쉽게 그을릴 피부가 아니다. 만약에 유령으로 착각할 거라면…… 배가 흰 물고기보다는 블나이 중위 쪽이 더 어울리지 않나.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블나이에게 쩔쩔매고 있다고 여겼다. ‘너는 날 집요하게 굴도록 만들어.’ 그가 생각했다. …블나이가 가락을 이어 흥얼거렸다.
제대로 된 왈츠. 멜로디의 정석.
“탱고가 정석이라니, 밋밋하기 그지없어.”
델프림이 약간 빈정거렸다. 블나이가 발끈하며 입을 열었다. “너야 아주 많은 파트너를 만나 봤겠지. 난 네가 처음이라고.”
이 말이 심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델프림이 블나이의 허리를 뒤로 확 잡아당기며 몸을 숙였다. 아주 잠깐, 블나이는 뜨겁고 단단한 사내가 자신을 짓누른다고 느꼈다.
달빛에 역광이 졌다. 델프림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블나이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보다 무거운 옷을 걸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직후 눈꺼풀을 내린 것은 어떤 변덕에서 기인한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목을 뒤로 꺾고 델프림의 허벅지에 다리를 감았다.
완벽한 동작이었다. 블나이가 웃었다.
“어때, 나쁘진 않지?”
델프림은 입안 살을 씹느라 잘 듣지도 못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그래. 좋은걸.”
“네 전 파트너들보다?”
“아주 좋아.”
자세를 세워주며, 델프림이 속삭였다. 그걸 단순히 칭찬으로 알아들은 블나이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 보였다.
델프림은 여전히 자신의 팔뚝을 붙들던, 거칠고 단단한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옷을 얄팍하게 입고 나온 게 실수였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염두에 뒀으면서. 어쩌면 욕망에 져버린 건지도 몰랐다. 여기서 블나이를 겁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델프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미움받기 싫었던 걸지도. 그는 머릿속이 들끓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블나이가 물었다.
“너도 힘들어?”
“당연하지.”
거짓말이다. 델프림이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술까지 마셨잖아. 넌 안 취했어?”
“취했어. 그러니까 너랑 이런 짓을…….”
블나이가 멈칫 말을 멈추었다. ‘이런 짓’이 뭔지 고민하는 기색이기에, 델프림이 더 생각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깨동무한 채 그들은 건너편 숲을 보았다. 연못 너머.
델프림이 말했다.
“이런 짓 많이 해 줘. 그러면 좋겠는데.”
“뭘 원하는 거지?”
“정 없이 말하긴. 친구끼리…” 친구끼리. “술 마시고, 몸도 섞고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중의적이라기보다는 노골적인 어휘 선정이었으나 블나이는 거기에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델프림이 조금 전부터 눈여겨보던 것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덕분에 델프림은 블나이의 빛나도록 불그레한 뺨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다. 델프림이 푸스스 웃었다. “무서워?”
블나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섭냐고. 그가 영 딴말을 꺼냈다.
“진영을 옮겨야겠는데.”
“현실적인 얘기는 여기서 하지 말자.”
“하지만.”
“쉿. 잘 봐.”
아름답지, 델프림이 말했다. 그는 탐욕스러울 만큼 미감을 추구하는, 검고 깊숙한 눈으로 저편을…. 진녹색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동공에 어린 빛이 세로로 가른 칼자국처럼 빛나서, 약한 짐승이라면 그것만 보고도 도망쳤을 것이었다.
블나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두려움보다는 집중했기 때문에. 그는 반쯤 홀린 듯 동공이 풀려 있었다. 델프림은 그 짙은 눈동자를 삼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아름답지.”
“……그래.”
“마치…”
너 같아, 라고 할 뻔했다. 물론 말해도 변하는 건 없겠지만 그러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망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종종 있지 않은가.
술과 달리기, 춤, 미신으로 달구어진 몸에서 증기가 오를 것 같았다. 이대로 넋이 빠져도 좋았다. 지고한 향락에 사랑하는 이를 빠뜨리고 지옥에 갈 수 있다면.
델프림은 ‘그것’에 흥미를 잃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블나이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게 설렘 때문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길 봐, 블나이…….”
블나이가 문득 정신 차렸다. 유령은 풀숲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듀공처럼 둥근 꼬리를 가진, 머리칼이 긴 인어의 혼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델프림이 ‘보라’고 한 것은 달리 있었다. 훨씬 더 위에.
“유령이다.”
그는 달을 보며 말했다.
“내일 승전 무도회에 같이 가자.”
이 순간에 말하는 건 반칙, 이라고 블나이는 생각했지만,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그는 기이한 희열에 달아 바싹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대답했다. 실컷 뛰고 난 다음처럼 몸이 떨렸다. “응.” 답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
달빛이 좋았다.
돌이켜 보았을 때 기억나는 것은, 맞닿아 있었던 살의 온기와 옅은 땀 냄새, 그리고 몸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주먹만 한 장기가 쿵쿵 뛰는 섬뜩한 감각뿐이다. 블나이는 다시, 제대로 말하고 싶었다. “그래. 네 파트너니까.”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