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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로 두 번 묶은 한 포기의 저주인형(23.05.30)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45

십자로 두 번 묶은 한 포기의 저주인형

 

 

 

 

 

 

 

아가씨께서 먼 곳으로 출가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설익어 뭉근하게 끓은 밥처럼 집안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애초에 웃음소리가 들릴 만큼 명랑한 곳도 아녔다. 이 양갓집 외동은 서너 살 이후로 표정을 잃었다.

그런 소녀를 모시는 무사의 칼이 허수아비 허리를 끊고 쓰러져 있었다. 검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말간 낮에 내리는 여우비가 봄 공기를 빛내고 있었다.

곱게 간 바늘처럼 가느다란 섬광이 자꾸만 땅에 꽂힌다.

 

이 꿈이 처음 날아든 건 꽤 오래전의 일로, 그 어릴 적에는 좀 더 선명했건만 이제는 사람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미몽이 말하는 양갓집 규수가 누구인지, 그 무사는 왜 제 몸과도 같은 칼을 내팽개치고 다니는지 마리는 몰랐다. 다만 어느 과거에는 또렷이 떠올랐던 얼굴을 남몰래 사모하던 마음이……

그는 눈을 떴다.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누구의 호흡인지도 알고 있었다. 감시를 피해 방을 바꾸어 숨어든 건 마리 쪽이었고, 그러니 상대는 당연히.

잘 잤나 보네?”

로지가 말했다. 이미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로지는 무척 일찍 일어나곤 했다. 마음에 시계를 찬 승려처럼.

또 한발 늦은 마리는 간밤의 꿈 따위 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얄팍한 잠옷 너머로 몸이 꼭 맞닿으며 온기가 전해졌다. 순한 고양이처럼 눈꺼풀을 내리는 바람에 다홍색 눈동자가 안 보였다. 로지는 또다시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멍청하다니까.”

, 맞아…….”

이런 말에 반항하지도 않고.”

착하다는 뜻이지?”

마리가 몸을 옹송그리며 보드라운 품에 안겼다. 로지는 착하고 어린 여우를 구슬리듯 꼭 안고 이마에 쪽 입 맞춰주었다. 기상 전 마리가 움찔거리던 걸 기억하고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묻자, 마리는 아무것도.’라고 대답했다. 로지는, 평소라면 거짓말이라며 신랄하게 굴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볼 뿐 별말이 없었다.

바로 그때부터 로지가 시무룩해 보였다. 대답이 부적절해서 그런가. 물론 이것은 전적인 마리의 직감(정확히는 대략적으로 눈치 본 결과)으로, 실제로 로지의 기분이 잡친 건 복도에서 웬 허술한 인간이 부딪친 후부터였다. 마리의 감은 칠 할만 맞아떨어졌으니까. 이것은 그가 더 열심히 굴 의지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마리는 자신 같은 인간이 로지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여겼다. 로지라는 인간은 당연히 복잡하고, 대단하고, 손에 잡혀 주지만 훌쩍 떠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이런 사람이 나를 친구로 대해준다는 데 대한 기쁨이 로지를 향하는 사랑과 뒤섞여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만 두렵지 않은 까닭은 의문을 갖지 않기 때문이리라. 마리는 로지를 믿었다. 자신을 선택해준 이유 따위 궁금하지 않을 만큼.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마리는 로지의 어깨에 기대어 치근덕거렸다. 그는 입안에 감도는 밀크 맛을 음미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꿈에 네가 나왔던 것 같아…….”

마리는 정말로 꿈을 기억하진 못했다. 로지의 무표정을 풀어주기 위한 애교였다. 하지만 로지는 새벽녘부터 마리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했고, 움찔거리는 속눈썹이나 웅얼거리던 몇 가지 단어를 기억했으므로 심상찮게 여겼다.

로지가 아이스크림 컵을 옆에 내려놓았다. 봄볕에 달구어진 정원석에 앉은 터라 이렇게 두면 먹을 수 없게 된단 걸 알면서도. 그가 말했다.

그래? 내가 떠나는 꿈이었어?”

? 아냐.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

아니면네가 떠났나? 마리, 잠꼬대했잖아.”

정확한 낱말이 되지 못했지만 표정과 어조를 보건대 퍽이나 가련했었다. 로지는 잠결에 나타난 마리의 얼굴에서 과거 어느 기점마다 자신을 떠나가던 사람들의 실망한 눈빛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상처받았을 것이다. 손금 들여다보듯 훤해서 도리어 배려하고 싶지 않았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란 재앙과 같은 것이라 로지는 마리가 좋았다. 마리는 장난감 같은 본인의 처지를 잘 알았다. ‘체육특기자로서든, ‘로지의 장난감으로서든. 그 외의 이유는 없었다.

마리는 영문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거렸다. 로지의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에 비비느라 머리카락이 부하게 떠 있었다. 솜사탕 같고 귀여웠다. 그가 별생각 없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로지를 떠나지 않아.”

……알아. 너는 못 그래.”

, 전혀. 못 가. 아이스크림 맛있는데더 안 먹어?”

초콜릿은 별로야.”

비싼 거라던데.”

네가 먹을 테야?”

으응. 그런데 역시, 어릴 때는 있었어. 네가 사라지는 꿈을 꿀 때가.”

마리는 입에 아이스크림 스푼을 물고 갸웃했다. 골똘하게 생각하느라, 시선이 로지의 반경을 벗어나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로지는 마리의 턱을 붙들고 자길 보게 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마리는 또 자각 없이 해사하게 웃는 거였다.

그가 말했다.

네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왜 있잖아, 반짝 떠올랐다가 금세 부서져 버리는 기억들이.”

어릴 때여서?”

그보다으음. 어렵다. 여우비처럼 지나가 버려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네. 유년기 기억이란 원래 나약해.”

하하.”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지는 이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마리가 자신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바로 그 어릴 적 이야기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로지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다. 마리가 겪은 모든 것보다 로지가 느끼는 기분이 더 알뜰하기 때문이었고 마리는 매번 이 공식에 맞추어 주었다.

바로 그때부터 마리는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로지는 오후나절 내내 마리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한 갈래 길을 가는 도중 산적이 나타났다. 신랑 측에서 보내온 기골 장대한 무사들이 나섰지만 몇몇은 다쳤다. 다행히 본가에서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아가씨는 바깥이 소란스러울 때도, 기름먹인 종이를 잘라 내린 창문에 피가 튈 때도 찍소리 내지 않았다.

지난겨울 솔잎이 썩어 든 숲에서 지긋한 흙비린내가 올라왔다. 피 뿌린 바닥에 신부가 겁먹을까 염려스러웠으나, 바깥이 조용해지니 스스로 문을 들추고 나온 신부는 생생한 혈흔을 흘끔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다만 지긋지긋하다는 듯 짤막하게 명령했다.

가자.”

혼례복에 젖은 흙알갱이가 묻었다. 가마 안은 습하고 더웠다.

지독한 봄이었다.

 

네가 어릴 때 하던 이야기 기억나.”

로지가 말했다. 둘은 이번엔 마리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점호가 끝난 후였고 둘의 행각을 아는 학생들은 그냥저냥 눈감아주는 추세여서, 이제는 별 방해 없이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사실상 로지와 마리는 한 쌍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혈육보다도 자주 붙어 있는 사이였다. 누구든 그들이 떨어져 있는 모습을 더 의아하게 생각할 만큼.

마리는 막 잠이 들려는 가물가물한 표정을 열심히 다잡았다. 저 없이 재미있는 이야길 할까 봐 걱정하는 강아지처럼. 로지는 마리를 쓰다듬어주진 않았지만,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마리는 여전히 로지의 말이 질문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내가 무슨 얘길 하고 다녔는데?”

꿈에서 귀신을 봤다고 했지.”

어렸으니까

나는, 네 두려움이 그런 귀신으로 나타난 거라고 대꾸해줬어.”

로지가 유독 친절하다. 졸리기 때문일까? 마리는 눈꺼풀을 털듯이 깜빡여서 졸음을 쫓아냈다. 하지만 곧 다시 눈썹께가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깊은 밤이고, 아무 의미 없는 잡담을 잔뜩 털어놓은 후여서 몸도 마음도 노골노골했다. 로지도 목소리가 나직했다.

새하얀 신부 귀신이라고 했었지. 지금도 나타나?”

…… 이젠 꿈을 꿔도 기억이 안 나는걸.”

와타보시가 붉은 흙물에 젖어서, 오니 같다고 그랬는데. 그땐 마리가 귀여웠어…….”

로지는 눈을 감고 그 광경을 그려보았다. 기억력이 우수하므로 잊지 못한 이야기 중 하나는, 신부 옷을 입은 채 칼을 든 여자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것. 마리는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항상 줄행랑치다가 깨어난다고 했다. ‘그 여자가 날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하고.

하지만 로지에게는 신부 옷을 입은 미친 여자가 애처롭게 생각됐다. 다락방에 갇힌 제인 에어 속 광인처럼. 제게 손도 못 대는 사무라이를 베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거추장스러운 모자도 벗지 않고. 아마 신랑에게서 도망칠 작정은 아니었을 거였다.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로지는 오히려. 자신을 안전하게 배송되게 하려고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도망친 사람에게 낙원은 없다지 않은가. 로지는 자유란 건 결국 갇힌 자의 환상이고, 다가갈수록 멀어지다가 어느 시점엔 사라지고 마는 쌍무지개와 같다고 여겼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따분한 학교 따위.

지금은 귀엽지 않지?”

마리가 물었다. 졸음에 겨워 시무룩한 투였다. 로지는 어둠 속에서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이렇게 커버렸는데.’ 다 큰 짐승을 거두는 건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옛말에 사람을 믿는 게 아니랬는데, 로지에게 마리란 인간은 사람이라기보다 커다란 애완 같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 악몽을 끝내준 것도 로지였다. 로지는 열 살배기 주제에 이렇게 말했었다.

꿈속에선 네 맘대로 할 수 있잖아. 너도 칼을 찾아. 그 여자가 찾던 게 네가 아니란 걸 알려줘.’

몇 번이고 실패하다가 마리는 어느 날 성공했다고 했다. 칼을 주워들었더니 여자는 사라졌다면서. 그제부터는 악몽 따위 꾸지 않는다, . 말하는 양이 고마워하는 듯했지만 어쩐지 서운해 보이기도 했다. 로지는 무의식 속 피사체에게 정 붙이는 멍청한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귀엽고 예쁜 것들은 제 몸도 지키지 못해. 나는 네게 검을 줄 테야. 양날의 검을. 다시는 내게서 도망칠 생각도 못 하게.”

말을 마치고 나니 마리는 잠들어 있었다. 로지는 코끝으로 한숨 쉬었다. 멍청한 개에게 앉아라고 해봐야 끊임없이 발을 내밀 뿐이다.

 

 

떠날 때 무사는 칼을 가져가지 않았다. 섬기는 주인을 저버린 이상 이 집안의 물건을 들고 나갈 순 없었다. 나름의 자존심인가 봐, 아가씨는 생각했다.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동안 처마에 매달린 유리 풍경이 흔들렸다. 허수아비가 벤 자리에서 새로 싹이 돋았다. 그는 도망친 호위무사를 찾는 대신 아버님 방에 가서 무릎 꿇었다. 더는 이 혼인 미루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다만 출가외인 될 나의 몫으로 불량한 무사가 쓰던 칼 한 자루를 달라고.

그밖에는 바라는 점 없으니 다신 보지 말자고. 지껄일수록 고개를 숙였고 종내에는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