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물리학자의 액자(23.06.19)
천체물리학자의 액자
밀랍을 발라 염색한 사라사처럼 한 겹 차원은 견고했다. 손 대면 흐무러질 것처럼 흐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존재하는 Z축 아래 평면은 그들을 거부하며 빳빳해지는 것이었다. 나이어드는 연출상 펼치고 있던 날개를 접으며 헛웃었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진정으로’ 죽는 순간에 세상이 태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의 결말이 다가오면 세계는 자신을 닫는다. 지금처럼. 나이어드는 회귀 이전 세상의 안타고니스트가 무엇을 빼먹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너무 일찍 목숨을 포기한 것이다.
자칫하면 나이어드 또한 그렇게 될 뻔했다.
갈라른은 애저녁에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갔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라그는 이 이변에 조금 당혹스러운 듯 몸을 낮추고 있었지만, 검을 놓지는 않았다. 라그가 가진 순백의 날개는 끝을 모르는 광선처럼 뿌듯하게 펼쳐져 있었다. 검신에서 피가 흘렀다. 저 새빨간 칼에도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나이어드는 생각했다. 더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서.
라그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들었다. 그는 주인공으로서의 사명 따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 세상이 이질적일 만큼 부조리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나이어드가 그렇게 만들어 두었다. 그가 말했다.
“시간이 됐다.”
아, 진부한 대사.
“고통스러운 건 상관없지만… 되도록 빨리 끝내 주게.”
“뭔 개소리야?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지 마.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어.”
“이쪽도 마찬가지라네, 영웅.”
라그는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시답잖은 이야기 할 때가 아녔다. 이 악당은 언제든 라그를 죽일 수 있었다. 웬 속임수를 써서 현혹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죽인 일가족의 생존자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그 이름도 캐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라그를 화나게 했다.
나이어드로서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라그가 무슨 이름을 가지고 있든, 어떤 생각을 하든. 심지어 자신의 최후조차. 나이어드가 입을 열고 무어라 말했다.
이야기가 세상을 복사해 붙여 넣는다. 라그는 검 끝에서부터 사그라지는 목숨을 느꼈다. 잿가루나 먼지처럼. 대신 피를 흘려주듯 칼은 붉었고, 무척 길어서, 베어낸 궤적을 사이에 두고 나이어드를 멀찍이 보게 되었다. 그는 나이어드가 한 말을 알아들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다만 함께 몰락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요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이 이 검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행성이 죽었다.
라그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조금 독특한 감정이었다. 그는 나이어드가 자신을 위해 얘기해줬으면 좋았겠지, 생각했다. 전설이나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적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몰랐다. 단 한 번이라도 날것의 나를 보아주었다면,
어쩌면,
저 먼 곳, 이 은하 너머에서 폭발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자그마한 경이를 느꼈으리라. 별이 죽는 모습은 빛이 소멸하는 착시와 다르지 않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