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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3.06.22)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47
포도가 열려 있었다. 장미를 심었을 담벼락에서 어쩌다가 열매가 자랐느냐면, 장미와 포도는 함께 있어야 한다며 일전 일하던 정원사가 심어둔 것이었다. 장미가 병충해를 막아준다나, 아이온은 그게 미신인 줄 알았다. 가시 세운 꽃을 울타리 삼는 등의.
에리히가 다가오더니, 아이온의 시선을 따라갔다. 창 바깥에는 장미가 흐드러져 있다. 그는 아이온의 의문을 눈치챘으면서도 그간 설명해주지 않았다. 천재에게 첨언하는 것보다 우스운 짓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만큼은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아이온이 짓고 있는 텅 빈 꽃병 같은 표정을 흩뜨리고 싶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미신이 아닙니다. 논밭에 수국을 심어놓는 것과 같은 원리지요.”
“장미가 밭의 산성도를 알려줄 것 같진 않은데.”
“대신, 그 두 식물은 무척 비슷해서… 경보 같은 거지요. 장미가 병충해를 입으면 농약을 칩니다. 시들시들해지면 비료를 주고요. 노련한 농사꾼들의 습관입니다.”
“몰랐구나. 재배라는 게 그다지 잔인할 줄이야.”
“잔인합니까?”
“그래. 마치, 매를 대신 맞아주는 아이 같잖니. 난 그런 것은 질색이야. 틀리지 않고도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단다.”
에리히 키르히너는 신묘하다는 눈으로 아이온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매 맞는 아이’란 고되게 땀 흘리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였다. 게다가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할 수 있는 일이고. 어쨌든 술독을 깼다는 이유로 열흘 무급으로 일하는 것보다야 종아리 좀 시큰하고 금화 한 닢 얻는 것이 나은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