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레몬을 집어삼키다(23.07.14)
로마에서 레몬을 집어삼키다
이 가게는 쉘터들 중 드물게도 제대로 된 로스터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카포트를 열 대 이상 보유하고 있다. 본래는 머신을 쓰는 곳이었던 것 같지만 그것은 모카포트 삼백 대를 발견한 창고에 모셔두고, 이 아름다운 반수동 장치를 쓴다. 나는 여기에 자부심을 품었다. 일을 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러므로 그 여자가 ‘체리 에이드’를 주문했을 때 가벼운 절망감을 느꼈다. 보급되는 공장제 시럽 맛을 보러 이 사람 많은 곳까지 왔단 말인가? 굳이? 이런 메뉴라면 차라리 변두리의 소다 가게가 더 낫다.
하지만 불만을 표출할 순 없기에, 나는 애석한 마음으로 모카포트를 치웠다. 소다 가루와 체리 시럽을 퍼넣고 물을 탄 뒤 건네자 여자는 고마워했다. 꽤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기억한다. 아니, 일단 눈 색이 무척 특이했다. 비가 내리거나 모래바람이 불면 닫아놓는, 긴 미닫이 창문을 열어둔 덕분에 볼 수 있었다. 희미한 테두리를 경계로 흰자위 안쪽으로 보석을 커팅한 듯한 빛이 생겼다. 나는 홀린 듯이 보고 있다가 다음 손님이 들어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군인’들은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 같다고. 크로투스들. 이걸 어떻게 아는지는 비밀. 하여간에 그들은 일개 시민과는 다른 ‘아우라’를 지녔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걸 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나는 눈앞의 손님이 뭘 주문했는지도 까먹고 말았다.
분홍색 더벅머리가 내 눈앞에 손가락을 딱 튕겼다. 퍽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약이라도 했다고 착각한 걸까?)
“예, 손님.”
“에스프레소 한 잔…….”
드디어.
“…그리고 크림 레몬 케이크 한 판이요.”
제정신인가? 그러나 말대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커피를 끓이고 냉장고에 들어있던 레몬 케이크 ‘판’을 들었다. 이 가게 이름은 ‘피스 오브 케이크’였다. ‘홀 케이크’가 아니라. 이 점을 지적하는 대신 얼어붙은 쇠 쟁반에 담긴 케이크를 가져다주자 분홍 머리가 한 스푼 크게 떴다. 물잔을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크림을 입에 욱여넣는 것까지 봐야 했다.
케이크는, 타르트 시트 같은 단단한 밀피에 차가운 크림을 얇게 펴 바르고 젤리를 올린 제품이었다. 젤라틴에 설탕과 수제 레몬즙을 때려 박은 젤리는 연약해서 잘 무너졌으므로 세팅과 서빙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이런 더운 날씨에는 얼마 못 가고 녹아내릴 터였다. 나는 걱정스럽게 돌아섰다. 워낙 더운 날인지라 손님은 평소보다 덜했다. 다들 뜨거운 커피보다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었겠지.
그러니 저 둘은 이 한산한 카페에서도 특이한 축이었다. 얼른 카페인 붓고 떠나는 게 아니라, 태연히 태블릿 피씨를 펴드는 것만 해도 그렇다. “플로렌스.” 분홍 머리가 말했다. 먼저 온 여자의 이름 같았다. 햇빛을 받아 거의 희어 보이는, 금빛 모래색 같은 머리칼의 ‘플로렌스’. 그는 무표정하게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돌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오로지 앞에 앉은 사람을 위한 미소란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다정함 말이다.
나라면 그런 웃음을 보고서는 넋이 나가버렸을 거다. 플로렌스가 말했다.
“왜 그래? …바네사도 참, 엄청난 케이크를 주문했네요.”
“괜찮아. 파이처럼 납작한데다 반은 젤리인걸.”
그 말을 확인하려는지 플로렌스도 스푼을 들었다. 낑낑대며 단단한 파이지를 깨고 입에 넣더니, 칭얼거리듯 말했다.
“바네사아.”
이게 분홍 머리의 이름이었다. 바네사는 별 대꾸 없이 우물거렸다. 플로렌스가 질책했다. “요즘 시고 짠 걸 많이 먹더라.” 걱정이 한 무더기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바네사가 볼이 미어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거쩡 마. 조저하고 이허.”
“알아요. 알지만.”
플로렌스는 켠 지 얼마 안 된 태블릿을 치우고, 바네사의 짧은 머리칼을 매만져주었다. 마치 보호자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둘의 표정이 보이는 대각에 앉아 있었으므로 표정은 정반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네사는 평온하게 우물거리는데 플로렌스는 소일하는 모친에게 장난 거는 아이마냥 부루퉁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몇 입 만에 가득 욱여넣은 디저트를 삼키고 바네사가 말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도시에 머무는 김에 뉴스 체크하고 있는데요… 특이한 건 없어요.”
“이 케이크 맛있다…….”
“에이드는 별로고.”
이어지는 듯 마는 듯한 대화였다. 대화 주제나 발화자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아서, 함께 앉아 독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생각에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뱉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개 친밀한 사이에서 그러듯 중요한 이야기를 삼가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다른 쉘터로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하기까지 일 년이나 걸렸던 것처럼.
어쨌든 이곳 사람은 아닌 듯했다. 머문다는 말이 나왔으니. 쉘터 간 이동은 드문 일이므로 그들의 존재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 또한 이주자였다. 어쩌면 저들은 진짜로 군인일지도 모른다. 이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었고 개중에는 금니를 여러 개 때운 도망자까지 있었다. 고객에 관해 별 생각하지 않는 게 쉘터 수칙이었다. (물론 ‘모범 시민’으로서는 상대를 의심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나는 슬쩍 게걸음 쳐서 카운터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케이크 모형을 전시한 유리장을 닦는 체 얼굴을 한 번 더 훔쳐보았다. 바네사는 평온해 보였다. 심지어는 게을러 보였고, 아무 생각 없이 얼굴 근육이 풀어져 기묘한 무표정이었다. 그래도 양쪽 입꼬리에 걸린 미소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 때문인 것 같았다. 생짜 분홍인 눈동자에는 어쩐지 졸음이 걸렸다가 파충류의 공막처럼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대낮인 점과 무지하게 신 레몬 젤리 케이크를 먹고 있다는 걸 고려해보면 꽤 특이해 보였다.
놋으로 만든 숟가락을 쪽쪽 빨던 그가 다시 케이크를 휘저었다. 크림과, 갓 핀 개나리처럼 샛노란 젤리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바네사는 음식의 외양 따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대로 푹 퍼서 입에 넣었다. 조금 역겨운 행동이었는데 플로렌스는 익숙해 보였다. 바네사가 헐겁게 든 스푼을 떨어뜨리려던 차에 딱 맞게 붙잡아주기도 했다.
플로렌스는, 선홍색 조가비처럼 꾹 다문 입술을 한숨과 함께 열었다. 그가 바네사의 손을 (스푼과 함께) 붙든 채 말했다.
“요새 당신이 걱정돼요.”
“으응…?”
“혼자 앓는 편이잖아요.”
“뭘……?”
“당신이 조용하면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고요.”
그때 바네사가 직전까지의 행동과는 전혀 다른, 잽싼 손놀림으로 플로렌스의 체리 에이드를 가져갔다. 플로렌스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음료를 훔쳐 가게 두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넘겼다. 귓가에서 녹색과 푸른색, 분홍색이 반짝였다. 금속 귀고리 같은 것들이 자연광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거였다. 개중 하나는 색유리이거나 보석 같았다.
그리고 모르는 체 다시금 태블릿을 확인하는 게, 장난기 있는 표정이었다. 곧 바네사가 엑 하며 슬그머니 잔을 돌려주었다. 머리칼보다 창백하게 흰빛을 띠는 혀끝이 부르튼 입술꼍으로 삐져나왔다가 사라졌다. 나는 훔쳐보는 기분에 관해 생각했다. 저들은 같이 사는 듯했는데, 가족도 친구도 적합한 이름인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친근감과 ‘진짜’ 다정한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지에 관해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친절한 건 일순간 마주쳤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내가 손님에게 그러듯이. 우리는 대개 단골에게 시큰둥하고 가족을 원망하며, 이웃을 미워한다. 재앙이 우리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더 원초적으로, 숨김없이. 그러므로 인간은 돌발적인 야생성을 더는 감추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견뎌야 한다는 진실을 받아들였다.
이 가게 커피가 맛있는 건 그런 이유다.
“뭐, 그래.” 바네사가 말했다. 입가에 녹은 레몬 젤리를 묻히고 있는지 입술이 반짝거렸다. “네가 주문한 거 정말 끔찍하게 달다.”
“농담 말고요…….”
“아닌데. 이 케이크는 어때?”
“…끔찍하게 시어요.”
바네사가 몸을 뒤로 기울여 등받이에 푹 기댔다. 아 졸려, 라고 말한 듯도 했지만 스치는 듯 중얼거린 탓에 확신할 수는 없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권태에 젖어 있었고 신중했다. 오래된 이야기 속의 현자나, 겨울잠에서 막 빠져나온 투였다. 어쨌든 나는 그 말들에서 어떤 현명함도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알쏭달쏭한 기분이었다.
플로렌스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익숙하다는 듯 듣고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견디고, 버티는 데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그것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
바네사는 의자 등받이 뒤로 두 팔을 넘겼다. 기지개를 켜듯이 끙, 하며 어깨에 힘을 주더니 몸을 완전히 늘어뜨렸다. 바람 한 점 없이 더운 날이었다. 차가운 소다수와 함께 낸 얼음이 달칵달칵 녹고 있었다. 플로렌스는 바네사의 왼쪽 뺨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따라가듯 바깥을 내다보았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방벽이 있다. 나도 아는 사실이다. 볕이 잘 드는 때는 오후 한두 시간이고 때맞추어 화분을 내놓는 사람이 많다. 꽃향기는 나지 않고 커피 생두의 비릿한 풀 향과 정육점에서 새어 나오는 수육 냄새가 난다. 나는 그들에게 커피를 따라주려고, 모카포트를 씻어서 다시 불 위에 올렸다. 부글거리며 물이 끓기 시작했다. 곧 금속에 모래가 들러붙어 타드는 소리가 날 것이다.
플로렌스가 말했다.
“하지만 낮잠 자기엔 좋은 날이군요.”
바네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웃음이었다. 보통 소녀라면 깔깔거릴 만큼 크게 웃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넘기더니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 때문에 더 웃음을 샀다. 플로렌스가 물었다.
“아닌가요?”
“아냐, 맞아.”
나긋나긋한 거품이 일고, 나는 그들에게 커피를 따라주러 갔다. 에스프레소가 다 식었을 터였다. 죽음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운 음료를 잔에 붓고 있자니 플로렌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곧 나에게서 신경을 껐다.
바네사가 말했다.
“정확해. 그러니까… 이걸 마셔야 하는 거지.”
그는 장난스레, 막 따라내어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플로렌스 몫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본인은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셨다. 플로렌스가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나는 당황했다. 무척 뜨거울 텐데.
플로렌스는 시큼하고 도수 높은 술을 마신 듯 눈꺼풀을 한차례 떨더니, 툴툴거렸다.
“이렇다니까요.”
누구에게랄지 모를 말이었고, 나는 웃었다. 왠지 그들이 화해를 나누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