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삶을 잊고(23.07.19)
나쁜 삶을 잊고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는 새빨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그것이 시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뺨을 붉히고 곁에 붙은 남자에게 손을 얹는 것이 보호받는 데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 나는 그들이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 폐허에서 옷에 피도 먼지도 묻히지 않았다는 건 전투를 지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더 휘말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 여자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는 방법은 흰옷에 피가 배는 방법밖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조직원 같아 보이는 사내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미소라기보다는, 비웃음이었다. 여자의 시선을 따라 날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무기도 없어 뵈는데.” 그리고 자신의 팔뚝을 쥔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안 그래, 공주님? 무서워할 필요 없어. 그냥 애잖아.”
‘공주님’은 뺨을 살짝 붉혔다. 난 어쩐지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는 건 전부 끝난 게 아닐까?”
“아직은 이르지. 공주님과 난 여기서 잠시 기다리는 거야. ……답답해?”
“그건 아니지만. 나카하라. 나 목이 말라.”
그들은 대화할 때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무심코 뒷걸음질 치자, 칼날 같은 시선이 날아왔다. ‘나카하라’라고 불린 남자는 짐짓 여유롭게 행세했지만, 그건 단지 자신이 모신 아가씨 덕분이라는 듯 나를 기민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나는 그들의 상하관계를 반대로 알았다. 분명 나카하라 쪽이 우위일 거라고. 하지만 친근한 관계를 권력의 위아래로 오해했을 뿐이다. 분명, 희고 동그마한 무릎에 상처 하나 없는 쪽이 ‘모셔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공주님을 보고 있었다. 리본이며 프릴, 예쁜 공단 인형처럼 잘 차려입은 데다가, 분명 누군가 손보아주었을 손톱이며 머리카락은 이 폐허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천사 같았다. 어떤 광휘와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 같다는 점이.
“히카” 라고 나카하라가 불렀다. “저 녀석은 어쩌지?”
순한 어휘였지만 나를 말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나카하라의 어깨에 걸친 재킷이 시야를 덮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내가 내 뒤에 와있었다. 그가 내 어깨를 턱, 붙들었다. 히카는 별생각 없는 멀뚱멀뚱한 얼굴로 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단지 나카하라가 손을 놓은 것이 아쉽다는 듯, 그 고운 손가락을 움츠리기만 했다. 마디마디가 복숭아처럼 발갰다.
히카가 말했다.
“음……. 지워버릴까?”
그것이 죽인다는 뜻인 줄 알고 나는 놀랐다. 나카하라가 저쪽엔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나는 거기에 안도하고 말았다. 이 사내는 날 없애버리는 쪽을 원했을 것이고,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다면 내게 못마땅하다는 듯 쯧,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카하라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부탁해, 공주님.”
보드라워 보이는 손바닥이 다가왔다. 이마에 깃털이 닿는가 싶었고, 직후 머리가 무거워졌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게 끝이다.
히카리는 쓰러진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츄야는 신문 배달부로 추정되는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별다른 답을 찾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 “마피아는 아닌가 봐.” 히카리가 그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었는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츄야의 손에는 탄환 두 개가 정확하게 남아 있었다.
애초에 이 탄환을 수거해오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전투나, 여타 부수적인 폭발은 그들 탓이 아녔고 예상한 바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츄야는 히카리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히카리는 맨발이었다. 츄야가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신발 신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땅에 발 닿지 않게 해줄 테니까, 아기 천사처럼. 물론 농담이었지만 히카리는 진심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츄야도 별수 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 다녔다. 이 소년과 마주쳤을 땐 잠시 숨죽인 채 쉬던 중이었다.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털털거리는 선풍기 날개 안쪽에서부터 뜨듯한 공기와 기름진 음식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배고파.”
히카리가 말했다. 마치, 친오빠에게 투정 부리는 여동생 같았다. 츄야는 그것이 귀여워 비스듬히 웃고는 이마를 톡 마주 댔다. 그가 반쯤 놀리듯이 대꾸했다.
“간식도 많이 먹었으면서.”
“하지만, 이런 데 있으면 기가 빨린단 말이야…. 바깥은 별로인 것 같아.”
“그래? 그럼 ‘안’은 어떤데?”
“흐음. 나카하라가 있다면 언제나 즐거워.”
츄야는 아주 잠깐, 히카리의 힘으로 기억을 없애버린 소년을 흘끔거렸다. 언제 보든 굉장한 능력이었다. 츄야가 한 번도… ‘히카리는 내 기억을 건드린 적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건 그들이 아주 오래, 정서적으로 교감해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뭐 이런 어린애가 있나 싶었지만.
그는 밝은 쪽으로 걸어갔다. 전투는 끝났다. 상황 종료, 아가씨에게는 맛있는 집밥을 먹여야 했고, 실내화도 신겨줘야 할 것 같았다. 잠깐 주저앉았다고 옷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는 히카리에게 한 톨의 불결함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이 외출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목격했다. 온실 속 화초도 가끔 외풍을 쐬어주어야 한다지만.
“이거 꼭 쥐고 있어, 공주님.”
츄야가 히카리에게 탄환을 건넸다. 사실 거기에 각인된 몇 개의 활자가 아니었다면 굳이 수거할 필요도 없었고, 평범한 탄이었지만, 히카리는 막중한 임무라도 맡은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으니 고기 썰러 가야지.”
하는 츄야의 이야기에는 이해하지 못한 듯 갸우뚱하고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