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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23.08.02)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50

안식일

 

 

 

 

 

 

1일 차. 주의 나팔꾼이 한 송이 포도를 즙내어오자

 

 

 

 

블나이는 돌아오자마자, 관리하지 않아 죽어버린 안뜰을 손보기 시작했다.

휴일마다. 델프림은 두 번째 주차에서야 블나이의 취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는 이미 썩고 말라버린 장미 넝쿨이 거두어지고 아무렇게나 번지던 벨라도나가 유심히 뽑혔으며, 델프림이 제법 마음에 들어 하던 꽃마저도 예외 없이 싹둑 잘려 나갔다. 그때껏 블나이의 원예 생활에 별 관심 가지지 않던 델프림은 주일을 앞둔 밤, 화분 째로 버려진 꽃을 보고서는 묵묵히 블나이를 쳐다보았다. 블나이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한 손에 커다란 은빛 가위를 들고 있었다.

델프림이 물었다.

그 꽃은 이름이 뭐였지?”

천사의 나팔.”

웃기네.”

그게 끝이었다. 첫 주차는 그렇게 끝났다. 그들의 휴가는 달의 두 번째 주차부터 시작이었으므로. 다음날, 버릇대로 꼭두새벽에 기상한 델프림은 일 층 부엌에서 시끄럽게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내려갔다. 사용인이 또 사고를 쳤다면 아예 갈아치울 생각이었다. (그 어린 천민 하녀는 자꾸 델프림의 심기를 거슬렀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건 유령이었다. 말하자면그건 블나이였다. 블나이가 다도구를 달그락거리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기척을 눈치챘는지, 블나이는 중얼거렸다.

찻잎이 하나도 안 남았군.”

그 하녀 해고해버리라고 했잖아.”

아니, 직접 사 오지.”

델프림은 아직 찻집이 열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부티크는 귀족의 일정에 맞추어 정오 이후에나 문을 연다. 블나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상점에서 직접 떼어 올 거다.”

도련님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즈음 해서, 델프림은 부엌의 기온이 한층 낮아졌다고 느꼈다. 기이한 분위기에 뭐라 덧붙일 새도 없이 블나이가 다시 달그락거렸다. 손을 떨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듯했다. 델프림은 닳아빠진 데다가 나지막하기 짝이 없는 부엌 문간에 기대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블나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르러야 하는 것이 부서진 유리창처럼 갈라진 빛을 냈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서, 델프림은 히죽 웃었다.

그가 말했다.

다녀와. 아침 차려놓으라고 말해둘 테니.”

하면서, 델프림은 마른 입술을 살짝 핥았다.

블나이는 오로지 바구니 한 개만 들고 나섰다. 허리춤에 달린 호주머니 속에서 은화 몇 점이 딸깍거렸다. 아무리 가벼운 차림이래도, 그의 귀와 고급진 직물 냄새를 맡고서 강도질하려는 간 큰 놈은 없을 터였다. 기실 거기까지 생각하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블나이는 무기를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상점에 간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그는 델프림을 볼 낯이 없었다.

저번 일 이후로, 델프림과 블나이 사이의 상하관계를 의심하는 이들이 늘었다. 원래도 없었던 건 아니다. 둘은 친근한 태도를 보였고 주로, 무슨 명령이든 함께 수행했기 때문에……. 게다가 이 둘이 함께 사지를 넘겼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특수한 신분이라는 건 늘 성가신 소문을 동반하고, 델프림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거나 심지어는 기꺼이 여겼지만, 블나이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고 말까 봐, 이렇게 매번 동요하는 것이었다.

구불구불한 정원 길을 지나 대현관을 나오는데, 기어코 비가 내렸다. 새벽녘부터 공기가 무겁다는 건 일찍이 알아채긴 했다만. 그는 일부러 우산도 들지 않았다. 마력을 방출하면 빗방울을 튕겨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극도로 간소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약간 피학적이기도 했는데, 이전까지의 블나이가 회피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델프림 말대로)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것이다. 때리면 맞았다. 그건 안개처럼 가느다란 빗방울에도 적용되는 사안이었다.

그는 두 눈을 멀거니 뜬 채 몇 번 깜빡거렸다. 눈앞이 부연 게 잠이 덜 깼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다. 습한 바람 불고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와중에 군인인 블나이가 멍하니 졸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피식 웃고 다시 걸었다. 구두 굽이 구름을 휘젓는 것처럼 안개를 파헤치며 둔한 소리를 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지껄여도 못 들어먹을 날씨였다.

찻잎이 다 젖겠군.’

말하자면 정상이 아니란 뜻이다. 날씨도, 그의 상태도. 소년 시절로 돌아간 정신을 인지한 순간부터는 이 무딘 몰골이 달갑기까지 했다.

상점은 마차를 타고 십 분, 하녀의 걸음걸이로 삼십 분은 더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으니 블나이가 오가는 데에는 약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델프림은 연무장에서 의미 없이 칼질하다가 쌓아두었던 모래 자루를 터뜨리고 말았다. 우수수 쓰러지며 바닥에 흙이며 자갈을 퍼붓는 꼴 보자니 문득 블나이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착장으로 나갔을진대 벌써 비가 퍼붓고 있었다. 델프림은 홀 안으로 들어가, 시중드는 사람이 건넨 수건을 받아 땀과 물에 전 몸을 닦았다. 시간이 꽤 흐른 듯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넘었다. 그는 곰곰이 거리를 계산해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신경 쓴다는 게 이상했다.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비를 피하려고 펍에 들르는 게 큰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곧 떠오르는 건, 사람 많은 술집에서 떠든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블나이의 성미였다. 군인들끼리 친목 다진다며 승전 연회를 열 때조차 블나이는 몸을 빼기 일쑤였다. 저번의 그 일이 아마 마지막이 될 터였고, 델프림도 저번 사건의 특이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은 뒤 외출용 군화를 신었다. 설렁설렁 나가서 블나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길을 잃었느냐며 좀 놀려주기도 하고.

블나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머리카락과 어깨가 다 젖었고, 고운 실크 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서 번듯한 몸매가 다 드러났다. 셔츠를 쥐어짜느라 들어 올렸을 때는 흰 배꼽이 보였다. 델프림은 하녀에게 간신히 건져온 찻잎 꾸러미를 맡기고 장화를 벗는 블나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델프,”

미친놈.”

멱살이 붙들렸다. 화가 잔뜩 난 목소리. 블나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드물게 표정이 동글해진 걸 보면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델프림은 한 번도 블나이에게 거친 소리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뒷말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본인이 술을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그게 또 다른 뒷말을 낳기는 했지만.) 블나이는 녹슨 금붙이처럼 쉰 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일 있었나?”

없었지.”

……그런데 표정은 왜 그렇지?”

블나이는 달랑 들린 발꿈치가 불편한 듯 꾸무적거릴 뿐 피하지 않았다. 델프림은 곧 놔주었지만, 팍 소리가 날 만큼 센 손길이었다. 블나이는 거의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려야 했다. 델프림이 씹어 뱉듯 말했다. “내 표정이 어떤데? ?”

어떻느냐면, 델프림은 진지하게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전사 같았다. 물론 직전까지 칼을 휘두르기는 했지마는 애끓는 표정과 입술을 물어뜯는 꼬락서니가 꽤 사나워 보였다. 휴가 첫날에 볼 몰골은 아니었고 블나이가 나갔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 하고 블나이는 생각했다. ‘나 때문이군.’

그는 이게 적절한 연상이라고 느꼈다. 멋대로 외출했기 때문에델프림이 화가 난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대체로 블나이를 좋아하지 않고, 애정을 표현한다고 해도 그건 잠깐의 색욕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의 상관이었으며 지배자였는데 본인은 그 자리에 걸맞은 권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품위와는 다른 이야기다. 그건 살롱에 드나드는 아녀자들조차 지닌 것이니까.

블나이는 그냥 고개를 떨어뜨리고, 발끝을 바라보다가, 애써 델프림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미안하다. 날이 궂어서 늦은 거고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2일 차. “이 푸른 찻물이 너의 피요 이 조각 떡이 천사의 살점이라

 

 

 

 

대낮부터 천둥이 요란했다.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고택을 오래 지켜온 집사마저 깜짝 놀라 스푼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델프림은 집사가 흐트러뜨린 식기를 시큰둥하게 내려다보다가 바꾸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이 날씨에 할 짓은 아니었지만 델프림의 마력 장막은 완벽하게 기동 중이었으므로 못 할 것도 없긴 했다.

조금 뒤에 블나이가 와서 앉았다. 뒤따라온 천민 하녀가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진한 우유와 데운 물이 든 주전자 하나씩, 그리고 얼음 설탕 그릇과 스푼 하나씩, 간단한 다과는 얇고 파삭파삭한 비스킷이었다. 둘은 시장에서 파는 간식만으로도 티타임을 보내고는 했다. 군용 건식보다는 맛이 있으니까.

끓였으니 마시지.”

블나이가 말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것이면 무엇이든 써보는 타입으로, 얼음 설탕을 손가락으로 집어 컵에 담고 우유를 부은 뒤, 차를 따랐다. 그 뒤에 델프림의 잔도 채워주었다. 델프림은 언제나 설탕도 우유도 타지 않은 스트레이트였다. 입안이 텁텁해진다는 이유였다.

델프림의 시선이 집요하게 블나이를 향했다. 찻잔을 기울이면서도 예리한 눈빛이 블나이의 손가락과 비교적 가느다래, 부드러운 손목, 올록하게 올라온 손목 복사뼈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옅은 잇자국이 나 있었다. 블나이가 스스로 물어뜯은 것이다. 꽤 가차 없이 굴기에 델프림은 블나이의 입안에 제 손가락을 넣어 제지했다.

그가 말했다.

도시 전체가 꾸물거리고 있어.”

. ……그래, 어제부터.”

오늘도 찻잎을 사러 갈 건가?”

아마도. 이 차 맛을 봐. 형편없잖나.”

떫은 차향은 델프림의 알 바가 아니었지만, 블나이는 퍽 진심 같았다. 우유를 좀 더 붓고서는 허락을 구하듯이 델프림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눈치 보는 갯과 동물처럼 귀여운 꼴이었다. 하지만 델프림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블나이가 일어서서, 테라스에 쳐진 불그스름한 장막을 건드렸다. 손가락이 닿은 곳부터 파문이 일었다. 세공한 크리스털처럼 각진 막이 물결치며 빗방울을 튕겨냈다. 창문처럼 물이 흐르는 대신 지직거리며 증발하거나 전류와 함께 떨어져 나가서 테라스 전체가 마치 격렬한 번개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름끼쳐하며 벗어나려고 했다. 덜미에 뜨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델프림이 허리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하지만 발버둥 치면 용서치 않겠다는 듯 턱을 붙들어오는 바람에, 블나이는 혼이 나는 아이, 혹은 꼭두각시처럼 그대로 잡힌 채 흔들렸다. 블나이의 얼굴을 쥐고 장난치듯 이리저리 돌려보던 델프림이 피식 웃었다. 희고 낭창한 몸이 빳빳이 굳은 게 다 보였다.

그가 일부러 몸을 바싹 붙이고 속삭였다. “나가지 마. 날씨도 이런데.” 블나이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야 아직 턱을 쥐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핑계인 거 다 알아.”

델프림이 말했다. 날씨 이야기인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꾸중하는 건지 불분명했다. 블나이는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놓여났을 땐 찻잔과 주전자가 모두 식어 있었다. 하녀는 덜덜 떨며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블나이가 천천히 구겨진 옷을 추슬렀고 델프림은 상처 비슷한 걸 입은 표정으로 짜증 부렸다. 하녀가 후다닥 자리를 뜨자, 델프림이, 찻잔을 치우던 블나이의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지껄였다.

아니면 나랑 데이트하게?”

싫다.”

에이, 매정하긴.”

장난스러운 내용과 다르게,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 태도의 정체를 채 파악하기도 전 델프림이 테라스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며 가벼운 대화 주제인 것처럼 말했다.

맞아, 블나이. 대단한 소문이 났던데.”

……무슨 소리지?”

저번에 말야. 우리가 한 짓 다 알고 있대.”

?”

너도 알게 될 거야.”

블나이는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하고, 마저 찻잔을 치웠다. 그러다가 설탕 접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은수저를 떨구었던 집사처럼. 양탄자 위로 떨어진 터라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얼음 설탕이 모조리 조각나서 흩어지고 말았다. 그걸 주우려고 주섬주섬 자리에 앉은 블나이가 양탄자 무늬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용 무늬가 새겨져 있는 자수품이었는데, 그려지지 않은 용의 눈 자리의 설탕 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며.

그때 천둥 번개가 번쩍였다.

등 뒤로 비가 들이쳤다. 델프림이 악의적으로 장막을 거둔 것이다. 블나이는 갑작스러운 습기와 추위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기압 차가 나는 탓에 온몸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 딱 오늘 하루만, 형편없는 차 맛을 견디면 될 일이다. 쓰디쓴 커피를 마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저녁 식탁에 꽂힌 병 든 백합은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될 것이었다.

 

 

 

3일 차. 당신이 나의 군대를 도륙하여서

 

 

 

피를 받는 건 퍽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델프림은 도살을 관전하고 싶다고 선언해서, 블나이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블나이는 비위가 약했다. 무언가 저보다 약한 것이 짓밟히고 살육당하는 걸 보기에는 지나치게 점잖기도 했다. 그들은 푸줏간에서 고기를 받아올 수 있었지만, 델프림은 오늘 점심에 나올 미트로프를 블나이가 거절할 거라는 걸 깨닫고 즐겁게 웃었다.

온 바다와 강이 만든 안개가 모조리 수도로 올라왔다. 거의 구름에 가까운 뭉게뭉게한 안개 속을 걷다 보면 손가락은 차가워졌고 목소리도 울렸다. 그나마 우비를 입은 덕에 나란히 젖은 생쥐 꼴은 면했다. 소리도 모습도 안개에 먹히고 말아서, 블나이는 이륜마차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델프림이 경례를 붙이는 걸 보아하니 꽤 고아한 인사인 모양이지. 블나이는 유별나게 구는 대신 상대가 고개를 내밀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 차양이 슥 열리더니 머리칼을 틀어 올린 귀부인의 조막만 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젖을까 봐 눈만 내민 꼴이었지만. 블나이는 에메랄드색 눈동자와 시선을 곧이 마주하면서도 상대가 누군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 꼴이 우습다는 듯 부인이 깔깔거렸다.

경들, 반가워요. 오랜만이네.”

한 달 전에 뵈었지요.”

블나이가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오랜만이라니 승전 무도회에서 만난 여자이겠지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맞아떨어져서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가 말했다.

어딜 가신다면 태워드릴까요?”

아닙니다, 부인. 군인의 장점을 발휘하고 있는데요.”

그게 뭐죠?”

잘 걷는다는 것이죠.”

델프림이 제법 점잖게 응수했다. 블나이 입장에서는 뭐가 재밌는진 몰라도 여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아 참, 하며 그녀가 말했다. “저번 그 일을 사과할게요. 소문이 그렇게 퍼질 줄은 몰랐다니까…….” 블나이는 소름이 오싹 돋는 걸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는데,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세간과 연해서 일이 좋아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델프림도 입매를 살짝 굳혔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발 물러섰다. 여자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말을 맺었다.

특히 블나이 경께 죄송하게 됐네요. 하지만 이 정도는 남자에겐 매력으로 작용하죠.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하하. 즐겁게 보내요, 오늘 하루.”

미묘한 목소리였다. 차락 소리를 내며 보석 차양 너머로 얼굴이 숨어버렸다. 블나이는 멀뚱멀뚱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델프림이 서 있었다. 옷이 피에 절어 우비 끄트머리에서 핏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돼지 피였다.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막 멱을 딴 고기를 줄에 매어 들고 있다. 불길한 광경이었다. 델프림이 블나이의 시선을 따라 제 몸을 흘긋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가 물었다.

아직도 토할 것 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젖은, 손이, 블나이의 턱을 다시금 붙들어왔다. ‘다시라는 건 적절치 못한 어휘다. 블나이는 자신이 어제 일을 진지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깨끗한 비옷이 조금 바스락거렸다. 델프림이 말했다.

아니면, 왜 그런 얼굴이야.”

……내가 무슨 표정인데 그러나?”

태연한 척하긴. 우리 둘 섹스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블나이가 입을 벌렸다. 사냥할 때의 고양이처럼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초점이 흐렸고 눈이 검었다. 일부러 적나라한 단어를 고른 게 분명했는데, 사정없이 놀아나고 있었다. 실제로는 그렇고 그런 관계운운이며 벽난로 앞에 선 취한 작자 하나가 비역질이라며 토하는 시늉이나 해댔겠지사교계란 원래 그렇잖은가…….

그가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말해.”

? 블나이, 반쯤 사실이긴 하잖아. 젖은 몸으로 비비적댄 게 한 거지 그럼 뭐야?”

놔라.”

싫어.”

너는

하고 블나이는 신경질적으로 델프림을 밀쳐냈다. 고깃덩이가 포장도로에 툭 떨어졌다. 고기를 못 쓰게 되었다. 아주 잠깐,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것으로 요리한 무엇이든 그는 먹을 수 없었을 테니까.

블나이가 걷기 시작했다. 집과 반대 방향이었다. 거기에 분명 뭐가 있다는 듯 확고한 걸음걸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너는 그 모든 걸 막을 수 있었으면서, 날 내버려 뒀다.’ 하지만 목 끝까지 치민 이야기를 내뱉기 전에 떠오른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델프림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이 모든 일을, 누가 자초한 건지.

 

자초한 건 너라고 아버지가 그랬다.

 

어머니의 죽음, 집안의 수상스러운 분위기, 요요한 소문, 집안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블나이를 흘금거리는 것, 얼굴이 붉은 신사들이 유난히 친절하게 구는 것, 그리하여 아버지의 심기를 무척이나 거스른 그 모든 일은 블나이 탓이었다. 그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블나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간단한 일이었다. 아무도 아이에게 인간다운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뭇매를 맞게 된다는 걸 블나이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여,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기도 했으나 손등을 호되게 얻어맞기만 했다.

아무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영양소를 맞춘 식사, 곱고 정갈한 옷, 종류 불문하고 관리가 잘 된 책들, 잠이 잘 오는 아늑한 방, 잠들기 전 마시는 꿀을 탄 우유와 잘 가꾸어 아름다운 정원이 그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 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윽고 블나이는 그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했다. 현존하는 자신은 유령이며, ‘그 아이는 이 집에 기거하는, 또 다른 유령이라고. “블나이.” 두 사람이 만나면 하나가 죽고 만다. 그래서 유령과 아이는 기를 쓰고 피해 다녔다. 마주치지 않게, 혼이 나지 않게, 자신이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게끔.

블나이.”

복도 모퉁이로 달아날 때마다, 누군가 그를 불렀으나, 유령은 멈추지 않았다. 뒤에 홀로 남은 그 아이는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무엇을 좋아했고 매일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너무 오래된 일만 같다. 멍하니 보낸 시절에 그 애와는 서로 잘도 피해 다녀서, 블나이라는 유령이 그 아이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아버지의 눈에 비친 그 앤 유독 비실비실했고 아름다웠고 뿔이 있었다. 그런데 블나이는 그중 무엇과도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블나이.”

델프림이 그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 . 장난 좀 쳤다고 이러기야?” 장난…….

안개가 짙어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혀를 내밀면 혀끝에 물방울이 고일 것 같았다. 회색 보도에 자욱이 깔린 구름은 이곳이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하나 아니겠느냐고 묻는 듯했다. 말하자면 블나이는 자신은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지고하신 모친은 천당에 계시므로.

그리고 이 악마, 검은 머리칼의, 크고 멋진 악마가 블나이에게 있다.

델프림.”

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블나이는 일순 그도 유령인 것일까 의심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델프림이 블나이의 뺨을 쓰다듬어주자, 그의 손에 눈물이 묻어났다. 블나이는 얼굴에 흐르는 축축한 것이 분명 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한 게 그건가?”

블나이가 오만상을 쓰며 물었다. ‘그거라니, 아카데미 신입생조차 쓰지 않을 조야한 표현이다. 델프림으로서는 황당할 만큼 진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는 친구 좀 따먹었다고 큰일이 생기지 않으며 소문이 퍼져도 그들이 어쩔 거냐는 사고관이었고, 사실, 정답이었다. 권력자의 꽁무니에는 늘 이러쿵저러쿵이 따라붙는다. 그것은 신과 신왕에게도 마찬가지다. 정도를 넘어서면 그들에게 조용한 벼락이 내리꽂힐 터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삶 따위, 얼마나 재미없는지델프림은 그걸 알고 있었다. 블나이는 사랑받은 적 없다는 게 그가 간과한 유일한 진실이었고…… 이제 막, 델프림은 깨달은 참이었다.

이 버릇없는 고양이가 내 것인 듯하다.

나랑 하기 싫어?”

모호한 대화였다. ‘그것이 무언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으니까. 델프림은, 이 모호성을 마음껏 누려줄 작정이었다. ‘시작한 건 너잖아.’ 먼저 눈앞에 나타난 것도, 포화 속에서 몸을 건져 준 것도, 안락한 휴일을 함께 보내기로 한 것도 네 예정이었고. 델프림의 두 눈이 화마처럼 일렁거렸다. 그가 말했다.

나랑 하기 싫냐고. 묻잖아.”

싫어, 절대로.”

날씨 때문이겠지?”

두텁고 무거운 군용 비옷 때문에, 옷에 습기가 찼고 땀이 흘렀다. 블나이는 온몸에 피어오르는 열감을 느끼며 계속 울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실제로 블나이는 좀 흐려 보였다. 물에 비친 그림자나 빛이 쪼여 만들어낸 물 위의 환상처럼, 또는 그들이 숲속에서 보았던 인어처럼 그랬다. 어젯밤, 비 내리는 테라스에서 몸을 비비고 입맞춤을 나눈 뒤로 블나이는 실존하지 않는 관념처럼 굴었다. 꼭 자기가 유령이란 듯 태연자약하게…….

델프림은, “좋아, 너를 사랑해외의 어떤 대답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굳이 날씨 핑계를 댔다.

이렇게 무덥고 비까지 내리잖아. 완전 망해버린 데이트라고. 다음엔 더 나은 걸 들려주지, 돼지 멱따는 소리 말고.”

 

 

 

4일 차. 전장의 악마가 그 혀를 베어갔소

 

 

 

조금 뒤에 블나이가 와서 앉았다. 뒤따라온 천민 하녀가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진한 우유와 데운 물이 든 주전자 하나씩, 그리고 얼음 설탕 그릇과 스푼 하나씩, 다과는 없었다.

끓였으니 마시지.”

블나이가 말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것이면 무엇이든 써보는 타입으로, 얼음 설탕을 손가락으로 집어 컵에 담고 우유를 부은 뒤, 차를 따랐다. 그 뒤에 델프림의 잔도 채워주었다. 델프림은 언제나 설탕도 우유도 타지 않은 스트레이트였다. 입안이 텁텁해진다는 이유였다.

마시자는 말 뒤로는 딸각거리며 찻잔 놓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날씨가 말끔하게 갰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도시는 쑥대밭이었지만 이 고택은 언제나 그랬듯 정원에 물이 차 휩쓸려간 것 제외하고는 온전했다. 부엌에서 죽은 쥐가 발견되었다지만 하녀가 이미 치워버려, 두 주인이 깨어났을 땐 온 집안이 청결했다. 블나이는 아침을 들고 난 뒤 설거지를 마치기도 전에 차를 끓이러 내려가서 하녀를 당황시켰다.

그들은 사용인들을 투명 인간 취급했다. 지금도 집사와 하녀가 언제든 시중을 들 수 있도록 서 있었지만, 벽의 장식인 양, 델프림과 블나이는 사사로이 굴었다. 그러나 블나이는 신경이 팽팽해진 눈치였다. 델프림이 물었다.

악몽이라도 꿨어?”

꿨다. 악마가 내 혀를 깨무는 꿈이었지.”

길몽일지도 모르겠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꽤 야하잖아.”

그러다 신성모독으로 경을 친다, 델프림.”

예상외로 블나이는 낭랑하게 대꾸해왔다. 델프림은 어깨를 으쓱하고 찻상 위를 쓱 훑어보았다. 블나이가 설탕을 찻잔에 모조리 부어버린 탓에 그릇이 비어 있었다. 즉시 하녀가 와서 설탕 몇 알을 채워주고 다시 물러섰다. 델프림이 피식 웃자, 블나이가 눈썹을 꿈틀했다.

뭐지?”

아니. 그렇게 단 걸 음료라고 마시는 게 신기해서.”

차 맛이 워낙에 쓰레기라.”

날이 갰으니 새로 사 와도 좋잖아.”

하녀를 시키지.”

신기하고…… 기특하고.”

마지막 것은 거의 혼잣말이었다. 델프림이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잘 닦인 군홧발이 테이블보를 살짝 벗어나 보였다. 블나이가 찻물인지 침인지를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델프림은 한가롭게 발끝을 까딱거렸다. 이것으로 저 손을 짓밟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생각을 했으니 저렇게 긴장했겠지.

어젯밤 그들은 사랑을 나누었다. 전장에서 흔한 비역질이 아니라 진짜로. 블나이는 자꾸 놓아 달라고 했는데, 모두 끝난 뒤에는 비척거리며 일어서서 정원으로 나갔다. 물에 불어 터진 흙 알갱이에 손을 묻더니 온몸이 차가워져선 돌아왔다. 돌아와서 말했다. ‘백합이 다 죽어버렸군.’

그러므로 티테이블을 장식해야 할 장미는 거멓게 시들어 일찍이 버렸고, 대신할 붉은 백합을 꽂아 놓았는데, 이것조차 병이 들었는지 점박 투성이에 시들시들했다. 바깥쪽으로 말려 나간 꽃잎에 붙은 것이 그저 점인 줄 알았는데 진딧물과의 벌레이기도 했다. 꽃잎을 쳐다보던 블나이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는 걸 보면 이제야 눈치챈 듯했다. 사용인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 꽃이 어쩐지 의심조차 못 할 것이다. 델프림이 직접 꺾어 온 것이니까.

정원에 역병이 퍼졌다고 블나이가 말했다.

어쩌라고? 그깟 풀뿌리 따위 다시 심으면 그만이야.”

그깟 이라니…….”

아니면, 아예 흙을 다 퍼 올려서 해자를 만들까? 이 집에 우리 둘만 남은 기분이 들 거야.”

블나이가 가볍게 딸꾹질했다. 델프림이 턱을 괸 채 키득거렸다. 소년처럼 들떠 짓는 산뜻한 미소였건만, 거기에서조차 블나이는 일말의 두려움을 구해냈다. 그는 우유가 잔뜩 들어 뿌연 찻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새벽까지 묵직한 먹구름이 깔려 있던 하늘은 이제 맑고 높았다. 곧 계절이 바뀔 터였다. 그러나 블나이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에 일어났던 일화를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그런 일들이 있다. 이 뒤로도 나는 전과 같을 수 없겠다는 예감, 오늘을 비탄으로 기억하리라는 고통스러운 선견지명을 받을 때가그게 으로서의 광휘인지, 다른 세계의 저주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어서

블나이.”

델프림이 테라스 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 타일로 장식한 이 테라스 바닥은 무척 아름다운데, 지난밤 몇 개의 블록이 빠져서 그만 흉해지고 말았다. 새로 채워 넣어야겠다. 그리고 해자를 파야지, 라고 그는 생각했다.

너무 그러지 마,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내가 억울해지잖아. 안 그러겠어?”

……알겠다.”

고분고분하고 좋네.”

오늘까지만이야.”

뭐가, 묻듯이 델프림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블나이가 눈꺼풀을 내리깐 채 눈 안의 주홍빛 햇살을 보고 있었다. 눈보라처럼 희고 소복한 속눈썹에 빛이 맺혀 무척이나 예뻤다. 그가 계속 말했다.

오늘까지만, 네가 기어오르는 걸 봐주겠어. 그 뒤로는 징벌하겠다.”

어떻게?”

어떻게든.”

부족하다고 여겨진 건지, 블나이는 씹어 뱉듯이 덧붙였다. “너를 증오할 테다.”

 

델프림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어디 할 테면 해봐라, 귀엽게 봐주겠다는 짓궂은 놀림처럼 들렸기에 블나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겉옷을 걸치고 나갈 때 델프림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저렇게 토라져 보았자 곧, 해자를 판 이 저택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델프림은 그때를 말미암아 깊고 아늑한 우물을 파둘 것이다. 언제고 더러워질 수 있도록. 기억날 때마다 오만한 성미에 구정물을 부어줄 수 있게끔.

그러면 다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