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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인가의 삶(23.09.12)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52

몇 번째인가의

*

 

 

 

 

 

 

모니카, 라고 소녀가 소녀를 불렀다. 모니카는 그 부름을 더없이 낯설게 느꼈다. “네가 날 이야기할 때는.” 모니카가 말했다. “천사라고 해야지.” 모니카가 말을 마쳤다. 모니카는 줄 위에 있었고, 가느다란 외나무다리를 타는 산양처럼 모두의 위에 있었고 균형을 잘 잡았다. 유연하게 구부러진 몸이 줄에 얹혀 한 차례 접혔다. 양팔을 줄 위에 뻗고 발끝은 발레를 하듯이 구부린 채 턱을 들었. 머리카락이 전부 바닥으로 쏠렸다. 피가 머리께에 고이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추락의 감각, 이라고 천사는 생각했다.

아이스는 무언가 해괴한 것을 바라보는,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열일곱의 여느 때다. 우리는 서른세 번째로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이스는, 이번만큼은 나이랄 것을 무시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청소년과 청년 사이에 갇힌 육신으로 정신의 노화를 헤아려 보아야 될 것이 없다.

아이스가 말했다. 팔짱을 끼고 두 다리는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었다.

밧줄이 왼쪽에서부터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요즘에는 무대에 기계장치를 심지. 천사가 아니라.”

사람들은 나더러 유령이나 태양이라 그래.”

유령은 존재하지 않아.”

그럼 태양이 나아?”

그래도 너는 유령 같아.”

천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왼쪽부터 그슬리고 있는 밧줄 위에 허리를 대고, 떨어졌다가는 목부터 부러질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마치 나는 고양이처럼 착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이스는 눈대중으로 거리, 즉 높이를 짐작했다.

최소 6m였다. 이야기를 나누려면 목소리를 키워야 했다. 이 유리 돔은 온실처럼 볕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아이스는 밧줄에 저절로 불이 붙은 걸 의심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빛이 판에 반사된 거겠지. 렌즈를 통한 빛은 주로 개미를 태운다.

천사의 눈동자는 붉은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아이스는 예감했다. 천사가 추락하면 자기 몸 위로 떨어지리라. 그걸 알고 저렇게 여유로운 것이다. 목이 부러지는 건 아이스 프룬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천사가, 분명 인간일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장난친다면 그건 타락이 아닌가?

아니지,’ 하고 아이스는 자신의 전제를 부정했다. ‘저건 천사가 아니라 유령이야. 나는 홀리고 있어.’

네 이름은 모니카가 아니지?”

아이스가 말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이름도 나이도 신분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천사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떨어져 내렸다. 발목에 매인 분홍빛 리본이 시든 장미꽃잎처럼 팔랑팔랑 늘어졌다. 아이스는 등 뒤의 쿠션감을 느끼며 넘어졌다. 천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장미꽃잎은 시무룩한 짓으로 이 중력에 순응했다.

 

아이스는 품 안의 온기를 느꼈다. 인간이었다.

 

너 무척 차갑다. 내 이름은 안젤리카 버니스.”

 

미들네임은 비밀이야, 살갑게 덧붙였지만 농담이었다. 아이스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스는 자신이 그렇게 차가운가 생각했고 어쩌면 유령은 이쪽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는 순간, 등 뒤의 쿠션이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힘주었던 몸이 대자로 퍼졌다.

말하자면 이 바닥은 어린이 방처럼 폭신했다. 줄 놀이를 연습하다가 떨어져 죽지 말라고, 땅 위에 깔아둔 매트리스 덕분이었다. 아이스는 처음부터 저것이 인간이며 고양이도 유령도 천사도 아니란 걸 깨달았어야 했다. 다만 위를 보느라, 이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소녀는 서커스를 보러 왔다. 심령현상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인간인 널 만난 건 당연해.’

아이스는 진심으로 여겼고, 자신의 몸 위에서 뜨듯한 인간을 밀어냈다. 그 와중에도 안젤리카는 조잘거리고 있었다. “정말, 우리 극단에서 쓰는 로봇 강아지만큼 차가워, 너는.”

나는 회의주의자야.”

안젤리카-모니카-버니스가 아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얼음이야.”

아이스가 말했다. 열일곱, 프랑스 여느 소도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