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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단 이게 나아요(23.09.15)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52

그것보단 이게 나아요

 

 

 

 

 

 

 

그건 프라이스 역사상 두 번째로 멍청한 발상이었다.

 

애초 이곳에는 비비안 벨벳틴이든 말콤 브라이언트든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게 버나드의 생각이었다. 맞는 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물에 개어 쓰는 가루 형태의 파운데이션이나, 케이크 질감의 블러셔나, 역시나 물에 풀어 붓에 묻혀 쓰는 마스카라 등등은 전혀 멋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온전히 미국적인) 60년대에 붙박인 대학 도서관 사서 여자가 쓸 법한 향수 냄새가 났고 그 대학 총장이 입을 법한 트위드 정장(금 단추, 무릎아래 길이)이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 쇼윈도 바로 앞에 세워 둔 네 개의 마네킹은 각각 여자, 남자, 여자, 남자의 모습으로 남성용 정장은 블랙과 그레이 둘 뿐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커프스단추가 있었지만 그건 곧 버나드의 몫이 될 예정이었다.

말콤은 쓰레기장에 있었다. 버나드는 제1구역 외곽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중이었는데, 그때 쓰레기장을 처음 보았다. 단지 조망도에는 없는 공간이었다. 물론 사람이 살아야 하니 하수구라든지 쓰레기 처리반이 다닐 게 당연했다만, 어쩐지 점프슈트를 입은 새벽녘 노동자를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버나드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애인이 먹다 버린 맥도날드 포장지와 김빠진 콜라병을 들고.

말콤은 낙서 한 점 없는 회벽에 기대앉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다. 너절한 바지 밑단과 슬리퍼가 무언가 지저분한 물질로 젖어 있었다. 짙고 열없는 눈동자가 버나드를 향했다. 버나드는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콜라병 밑바닥에 좀 남은 형편없는 음료를 쪽 빨아 마셨다. 그리고 병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저글링 하던 버릇인지 뭔지 뒤쪽에 있던 알루미늄 폐기용 쓰레기통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 .

뭔데?”

말콤이 웅얼거렸다. 입안이 부은 것 같았다. 이 명료한 미국 동네에 서로 치고받을 일이 없을 테니 자기 뺨을 때린 건지, 라고 버나드는 생각했다. 그는 퍽 쉽게 손을 뻗었다. 말콤이 대꾸했다.

그냥 가지?”

무심코라도 도와주려던 걸 후회하며, 솔직히 그냥 가고 싶어 하던 버나드가 마음을 돌려세운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는 말콤의 멱살을 붙들어 일으켰다. 생각보다 무거워서 중간에 놓칠 뻔했지만, 말콤 쪽도 뭐가 들었을지 모를 쓰레기 봉지 위에 엎어지는 것보다 그냥 일어서는 걸 택했다. 그러자 말콤의 그림자가 버나드를 덮었다. 버나드는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냥 기가 찼다.

그가 열의 없이 물었다.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그럼, 부티크도 있는데 없겠냐고? 너희가 싸고 먹은 게 다 어디로…….”

멀리, 버나드가 애인에게 선물했다고 알려진 빨간 폭스바겐이 보였다.

닥치고 타.”

버나드가 말했다. 말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뒷좌석에 탔다. 차 문 닫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 . 버나드는 잠깐이지만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말은 이렇게 했다. “누가 보면 너는 먹고 싸지도 않는 줄.” “닥치고 가지?”

살짝 열려 있던, 까맣게 썬팅된 창문 틈새로 큰 파리가 날아 들어왔다. 창 안쪽에 붙어 오도가도 못하는 걸 말콤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운전 중이었던 버나드는 헤어스프레이를 꺼내 뿌리지도 못하고 윙윙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결국 짜증스레 브레이크를 밟았을 땐 부티크 앞이었다. 집으로 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말콤의 공간에 발 들이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버나드는 도망치고 있었다. 말콤은 이미 처음부터 그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그가 말했다.

테스터로 화장해도 되나?”

안 될 거야 없지.”

안 된다는 투로 대꾸하는 것이다. 사실 진짜로 안 될 것은 아닌데 이러다가 욕실을 빌리겠다고 할까 봐 투덜거린 것뿐이었다. 물론 말콤도 여기에서 변신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좀 키득이고 말았다.

그들이 내리자 저 교차로에 빨간 폭스바겐이 서는 게 보였다. 버나드는 힐끔거리지 않았지만 말콤은 살짝 흘겨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어깨를 으쓱하고 차임벨 소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을 정정할 때가 왔다.

 

프라이스의 역사상이라기보다는, 버나드의 멍청한 결단이었다. 혼자 있는 게 불안해서 쓰레기장 청년을 데려오다니. 그들이 이웃 간이라는 건 사실이었지만 버나드는 굳이 괜찮은 이웃이 될 생각 없었다. 그는 이 동네의 온화한 주민은 아니다.

말콤은 짤막하고 깨끗한 손톱에 옷감이 걸리도록 하며 한참 걸었다. 부티크를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옷 두어 벌을 아무렇게나 꺼내서 자기 팔에 걸었다. 마네킹이 쓰고 있던 자주색 베일햇도 손에 걸었다. 입어볼 생각인가? 버나드는 칙칙한 남성 의류들 앞에 비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제법 손님과 직원 같았다.

말콤은 제법 긴 시간 끝에 입고 나왔다. 튼튼한 몸이 옷을 다 소화하지 못해서 옷감에 낑긴 꼴이었다. 버나드가 비죽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걸 우러나온 웃음이라고 착각한 건지, 아님 비웃음도 상관없다는 건지, 말콤도 마주했다. 버나드가 말했다.

그건 내가 사주지.”

사야 해?”

찢어졌잖아.”

대학 총장이나 입을 법한 트위드 세트 중 치마는 뭘 어떻게 튿었는지 옆태가 갈라졌다. 덕분에 입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버나드는 이것이 일종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시간에 대한.

값어치.

필요 없어.”

한 뒤 말콤은, 아직 쓰레기 냄새가 풍기는 원래 자기 반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제법 비싸 보이는 지갑이 나왔고 거기에는 빳빳한 신권 지폐가 들어 있었다. 액수도 물어보지 않고 흰 카운터에 탁 내려놓은 뒤 멋대로 금고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파란 별이 붙은 필터가 비죽이 튀어나온 마지막 한 대.

불을 붙인 뒤 말콤이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미국이냐고?” 하면서. 버나드는 닥치라고 나직이 윽박질렀다.

담배 연기가 악취를 살랐다. 버나드가 화가 난 듯 걸어와서 매대에 진열되어 있던 향수 상자를 찢었다. 펌프를 몇 번 누르자 화학적인 꽃향기가 마리화나 탄내에 섞여 들었다. “죽여주는 향기로군.” 버나드는 차마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쓰레기장에 자기 집에서 버려버린 오르골이 들어 있던 걸 기억했다. 그 안에는 화질이 미미한 녹화 장치가 들어 있었다.

빅 마더가 이 향수를 써.”

버나드가 말했다. “그러니 죽여주는 향수지.” 반 흑백 사진 광고 속의 여자처럼 그가 말했고 말콤이 가느다란 웃음소리를 냈다. 연기가 들어차자 쇼윈도에 흐릿한 얼룩이 번졌다. 누군가 안쪽에서 마구 두들긴 듯한 손자국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