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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된 계절

나사르 본주 2024. 8. 27. 08:31

삿된 계절

 

 

 

 

 

 

 

 

거위 솜털 같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키스멧은 눈 쌓인 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체온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조그만 전나무는 눈의 무게를 감당치 못할 테고, 아마 키스멧은 이대로 보드라운 눈굴에 묻혀 사망하리라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생각해 버릇하는 건 어느새 생겨난 타성이었다.

그때 야벳이 말했다.

 

나랑 가자.”

 

아무 대답 없는 키스멧을 향해, 그는 성가시다는 듯, 머리카락에 쌓인 눈송이를 훌훌 털어냈다. 키스멧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그러니까, 그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을 테고, 그럴 희귀한 필요성이나마 느낄 사람들은 죽어버렸고, 자연히 나도.

여기에서.

지금.

 

 

 

초인종이 울렸다.

막 돌아와 외투를 벗던 라시드는, 간격을 둔 종이 두 번째 새소리를 지저귈 때야 정신 차렸다. 인공적으로 변주된 벨 소리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끔찍한 소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불협화음을 감상했다.

라시드는 오늘 저녁 라디오에서 연주할 클래식 악곡을 듣고 있었다. 이미 악보를 다 외운 후였지만, 작가에게서 연주자의 힘이 실리면 좋겠다는 다소 트릿한 주문을 받은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연주에 어떻게 해야 무언가가 실릴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택배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어딘가에서그를 돕고있는 재활센터에서 보낸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비밀리에 행동하기도 했다. 아니면.

 

왜 그러겠어? 세상이 그들 편인데 왜 기사로 속이지?’

 

이런 의문이 든 건, 이미 입을 틀어막힌 후였다.

라시드는 무력하게 벽으로 떠밀렸다. 들어온 택배기사는 모자를 깊이 쓰고 있었고, 그 밑으로 몇 가닥 빠져나온 채도 낮은 머리카락. 찌르는 듯한 녹색.

검은. 옷 안에 입혀진 것을 라시드는 알았다. “메이.” “.”

 

야벳이었다.

야벳이었다!

 

라시드의 파리한 뺨이 이내 상기했다. 두근, 하고 가슴이 울렸는데 두려움 때문일 터였다.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두 손으로 꼭 누른 채, 라시드는 벽에 갇힌 파라오처럼 굳었다. 이 꼬락서니를 본 메이드맨이 싱긋 웃고 손을 뗐다. 그리고 라시드의 입술에 장갑 낀 검지를 눌렀다가, 뗐다.

입술에 낙인이 남은 것 같았다. 라시드는 그 시커먼 맛을 느끼려고 제 입술을 할짝거렸다. 메이드맨은 이제 이쪽은 보지도 않고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침대 밑, 책상 서랍 밑, 화장실 변기통 물탱크 뚜껑에 붙은 도청기를 하나하나 제거했다. 그가 품에 넣은 기계에 도청기를 갖다 대면 기기는 불이 희미해지며 먹먹해졌다.

 

악취미야? 신정부 놈들도. 그렇지 않아, 라시드?”

 

에둘러 말을 거는 투였으나, 라시드는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채였다. , 어떻게 메이드맨이 여기 와 있는지, 기실 어떻게 살아 있는지부터 놀라웠다. 눈밭에서 만난 메이드맨이 손수 차를 끌어 센트럴로 바래다준 일은 그저 꿈속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감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내, 가슴의 미지근한 열상을 꾹 압박하던 라시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메이드맨이 멈칫하며 이쪽으로 왔다. 그는 라시드의 턱을 콱 쥐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모자를 벗었다.

늦은 오전. 위쪽에 나 있는 창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야벳의 긴 머리카락도. 마치 금타래처럼 부스스 떨어지는 머리칼을 라시드가 멍한 눈으로 주시했다. 야벳이 말했다.

 

키스멧.”

…….”

이제야 대답하네. 나랑 가자.”

?”

가자고, 방 비워놨어. 이게 아닌가. 잘 지냈다고 먼저 물었어야 해?”

피아노. 피아노 치고 있어.”

저런 게 피아노야? 플라스틱 키보드 같아 보이는데.”

 

야벳은 무릎 위에 올려놔도 될 만한 키보드 세션을 흘끗 곁눈질했다.

 

설마 방송국에 온에어 사인 붙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지는 않겠지.”

 

사실이었다. 키스멧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야벳은 목소리를 살살 굴리며 아이를 꼬여내는 투로 다시금 말했다.

 

노던힐 갈래?”

 

정신이 든 키스멧은 후드득 고개를 저었다. 턱이 붙들려 있어서, 그다지 세찬 부정은 못 되었다. 야벳은 키스멧이 저항할수록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라면 얼굴에 멍이 들 것만 같았다.

야벳이 너그러이 손아귀 힘을 풀어주었다. 키스멧이 가볍게 마른기침했다. 콜록거리며 가린 입가에는 시뻘건 자국이 부어 있었다. 야벳은 느긋한 만족감을 느끼며, 채근했다.

 

불가능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어.”

……정말?”

 

야벳은, 마치 키스멧이 할 말을 이미 다 파악해 둔 것 같았다. 그건 안 돼. 불가능해. 네가 위험할 거야. 나도 위험할 거고, 사실 나는 살고 싶지 않아. 죽을 거야. 이렇게 사는 거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상태로 죽어갈 수도 있지…….

그러나 한 가지, 야벳이 허용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반갑지?”

.”

그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죽지 마.”

 

야벳이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키스멧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식탁으로 향했다. 그가 헛웃었다.

 

이런 걸 먹고 지내? 무슨 어린애처럼.”

 

키스멧이 움찔했다. 식탁 위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우유에 불린 오트밀이 놓여있었다.

그에게 아침 식단으로 주어지는 것은 여기에 사과나 포도 몇 알 정도였고, 저항할 의지나 체력이 생길 만큼의 간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파삭하게 마른 비스킷처럼 의욕을 상실케 하는 간 덜 된 음식이 그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표상이었다.

키스멧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저도 모르게 끄덕거렸다. 두 번 다시 야벳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는 거짓말도 포함됐다. 거짓말은 크나큰 배반이었고, 그것이 우리 편일 때는 죄악이었다.

키스멧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목쉰 소리가 났다.

 

다들 날 싫어하니까. 오트밀이 문제는 아니잖아.”

흐음.”

 

야벳이 팔짱 낀 채 키스멧을 내려다보았다. 욱신거리기 시작할 손자국에 슬슬 상한 핏물이 배어가는데도, 또 목소리가 시들해져가는데 키스멧은 불평 하나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진대, 까닭 모를 충만감이 들었다. 야벳에게는 무척 드문 것이었고, 그는 키스멧을 납치하고 싶은 또 다른 열망을 느꼈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그는 할 수 있겠지, 이대로 홀연히 사라질 수 있었다.

키스멧을 데리고 사라지는대신,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단말기기를 꺼냈다. 이제 단종되어 찾아보기도 힘든 피처폰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멀뚱히 선 키스멧을 침대에 앉힌 뒤, 그의 손가락을 들어 버튼을 눌러주었다. 곧장 전화번호부가 떴다.

야벳이 말했다.

 

이게 전화번호부야.”

…….”

긴급하게 연락이 필요하면, 1번을 길게 누르면 돼.”

…….”

일단 연락하게 되면 내가 끊을 때까지 끊어선 안 되고.”

…….”

알아들었어?”

또 온다는 거지?”

 

야벳은 잠시 말을 잃고, 순진하고 시무룩한 키스멧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가까웠다. 이대로 입술을 물어뜯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핸드폰을 쥐여준 뒤 허리를 폈다. 아직까지는 인내가 필요했다. 정말로 그가 원하는 것은 며칠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얻지 못한다면.

야벳이 말했다.

 

때가 되면 다시 연락할게.”

 

오늘 저녁, 그는 자신이 키스멧에게 전화를 걸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이 되면 도청기가 제기능하지 않는 것을 신정부가 눈치챌 것이다. 키스멧이 도망칠 작정이라는 것도.

아무도 키스멧을 신뢰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서로 총구를 들이댄 공범자로서,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키스멧이 야벳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 시퍼런 눈동자가 잠시 충의로 빛난 듯도 했다.

야벳이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키스멧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물끄러미 건너보기만 했다. 야벳은, 벌레가 끓기 시작한 우유 그릇을 개수대에 처박아 두고 문고리를 쥐었다.

멈칫한 그가 물었다.

 

연락 받을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야벳은 키스멧의 턱과 뺨에 난, 이제 풀어져 가는 누런 멍을 흘긋 볼 수 있었다. 그는 안심했다.

 

 

문이 열렸고, 닫혔다. 키스멧은 그대로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맥이 빠진 듯도, 줄이 끊어진 듯도 했다. 키스멧은 겨울밤에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쳐 왔던 길을 지웠고 키스멧은 구조자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에게는 연락을 위한 어떤 통신 장치도 없었다.

길의 한중간이었지만, 눈더미가 흙을 덮어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키스멧은 추적대원이 아니었다. 그는 있는 것을 찢고 절단할 수만 있었다. 누구처럼 여물고, 다물고, 삼키고, 치우는 데에는 능력이 없었다.

침엽수 가지 아래 앉은 건 단순한 기억의 명령이었다. 조난당했을 때, 나무 밑 눈굴에서 버텼지. 반나절만 더 지났어도 얼어 뒈졌을걸.’ 친근히 무용담을 늘어놓던 사람이 누구더라?

나는 무슨 작전을 수행하러 온 거지? 손안이 허전한 기분이었다. , , 톡 탁 하는 익숙한 소리가…….

그때 유령이 다가왔다. 키스멧은 휴대전화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너는 오게 될 거야.’

 

노던힐로, 무덤이어야 했던 곳으로. 키스멧은 제멋대로 뒷말을 이어 붙였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는 택배를 배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트밀 한 상자를. 그에게 허가된 품목은 조금 더 많았지만, 맛을 고를 만큼 한가로운 범위는 아니었다. 그는 오트밀 덩어리를 시킬 것이다. 그리고 냉장고에 남아 상해가는 우유에 톱밥 플러그 같은 오트밀을 집어넣고 떠날 것이다.

그때 야벳이 살아 돌아올 것이다.

 

메이드맨.”

 

차마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키스멧이 일순 목덜미를 확 붉혔다. 몸에 피가 흐르는 뜨거운 느낌 때문에,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건반을 두드리던 힘조차 잃고 손가락이 문자판 위를 배회했다.

그는 아무것도 써 보내지 않았다. 이래도 야벳은 알아챌 테니까.

내가 그에게 있어야 한다는 걸…….

 

내가 필요하대.’

 

원리원칙을, 직관을 무시한 망상이 들끓었다. 아니 어쩌면, 하는 생각. 키스멧을 몰아붙이는 건 야벳의 독특한 눈동자였다. 멀리 세워진 등대를 엿보이는 까만 나락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키스멧은 많은 것을 몰랐지만, 갈망을 알았다. 그는 예전부터 옛 시절에 갈증이 나 있었으니까.

누군가 그에게 지시하고, 보호하고, 같은 편으로 보살펴 주던 안락한 나날들.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없어도 위험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젖은 신문지를 씹는 것 같은 축사의 일일.

그 시절이 다시 도래할 터였다. 키스멧은 다시 한번 두 손으로, 가슴께를 꼭 눌러보았다. 두근. 두근…….

 

라시드.’

 

야벳의 목소리였다. 목 끝까지 열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