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게 붙어 있는
모질게 붙어 있는
케이크에 담배가 꽂혀 있었다.
‘이기 뭐고…….’
연기가 꺼진 걸 보면 좀 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라세는 소파에 늘어져 자고 있었다. ‘삿쨩이 이칸거가,’ 하고 누루데는 고개를 기웃했다.
지역 무대 MC로 불려 나갔다가 온 터라서, 그의 옷은 여전히 빳빳했고 반짝거렸고, 그리고 늦은 밤이었다. 기실 밤이라기에도 아침이라기에도 미묘한 시간이었다. 묵고 가는 일정이었는데 어째선지 거절하고 말았다. 뭐 그런대로 좋네, 하고 막기차를 타고 도착했다. 그뿐. 그러고 보니 삿쨩이 문자를 보냈었지.
메시지는 간결했다.
- 바보.
뭐고?
그는 소리도 없이 자는 아라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 안에 켜져 있는 불이라고는 텔레비전뿐이었는데, 그나마 편성표가 끝나 공허한 노이즈만 송출되고 있었다. 누루데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그의 얼굴을 향하던 광원도 사라져서, 그는 시선을 잡기까지 조금 기다렸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삿쨩이 어스름히 보였다. 익숙하게 소파 쿠션 사이에 손을 넣은 누루데가 한 번에 리모컨을 찾고, 텔레비전을 껐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에어컨이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삿쨩은 얄팍한 내의만 입고 있어서 또 감기에 걸릴 게 빤했다.
‘이러고 다니니 걸리제.’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어슬렁거리던 그의 눈에 담요가 걸렸다. 아라세가 방송할 때, 무료하게 잡지를 읽을 때 자주 걸치는 와플 무늬 담요였다. 하지만 누루데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배 다 드러나게 입은 거, 이대로 방에 데려다주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아라세를 들어 올리려고 슥 다가간 누루데는 흠칫 놀랐다. 눈을 뜨고 있었다.
아라세가 웅얼거렸다.
“왔어…….”
“쌔빠지게 일하고 왔더니 쿨쿨 자고 있나.”
“음… 미안. 아까 전까지는 깨있었어, 정말.”
“됐다 마….”
탁, 하고 누루데가 불을 켰다.
조명이 들어오자 아라세는 눈을 감았다. 부은 눈꺼풀을 보면 오래 기다린 듯한데, 하품하는 걸 보면 또 일찍이 포기한 것도 같았다. ‘온종일 잠만보맹키로 쉬었겄지.’ 남을 웃긴다는 측면에서 아라세의 ‘일’도 누루데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 니트족 외계인의 일과를 잘 알고 있었다.
환해지니까, 케이크에 꽂힌 꽁초 두 개가 더 잘 보였다. 누루데는 헛웃고서 그쪽으로 턱짓했다. 시선을 따라간 아라세가 아, 하고 둔한 소리를 냈다. 아직 졸려 보였다.
“이거, 삿쨩. 케이크가 상했어.”
“상한 걸 산 기가?”
“응.”
“운도 댑따 없네. 진짜 됐다, 내 사 온 거 먹자.”
“뭔데?”
유령처럼 스르륵 흘러내린 아라세가 좌식 테이블 앞에 앉았다. 누루데는 어쩐지 만사가 귀찮아져서 조그만 케이크 상자를 담배 꽃이 빵 옆에 내려놓았다.
아라세가 포장을 열었다. 사방으로 멋지게 펼쳐진 셀로판지 안에 든 건 무화과와 하얀 딸기가 올라간 설탕 케이크였다. 아라세가 슬며시 입꼬리를 늘였다. 웃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얼굴을 골똘히 보던 누루데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앉았다.
“이런 거 좋아하데.”
“그런가? …모르겠어.”
누루데는 이상하다는 듯이,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 저번에… 링고아메처럼 반짝거리던 빨간 무스 디저트를 잘 먹던 걸 그는 기억했다. 이런 게 떠오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스태프한테 부탁해서 어렵게 구한 케이크인데, 반응이 영 심심했다. 그가 장난인 체하며 손을 뻗어 아라세의 코를 꼬집었다.
“아얏.”
“아프긴 한가?”
“당연하지, 사람이잖아.”
“외계인인 줄 알았데이.”
“재미없어.”
“내가?”
누루데가 웃는다.
아라세는 플라스틱 포크를 입에 문 채, 이제야 환해진 시선으로 누루데를 빤히 보았다. 그가 웃다가, 멈췄다가, 눈을 살짝 떴다가 자세를 좀 멀리하는 모습. 그제야 아라세가 단조롭게 말했다. “이거 맛있어. 먹어.”
그렇지, 누가 사 온 건데, 하고 말대꾸할 기회도 없었다. 누루데는 자기 입에 아라세의 포크가 폭 들어온 걸 뒤늦게 눈치챘다. 본능적으로 부드러운 크림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라세가 눈을 깜빡이더니 투덜거렸다.
“아, 씹어야지. 삿쨩.”
“……갑짜기 이라믄.”
여름이었다.
무화과는 조금 물렀는지 미끄덩하니 넘어가 버렸고, 기차에 실려 온 크림도 축축해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근처에도 괜찮은 가게들이 있는데 뭣 때문에 이걸 공수해 온 건지 황당해졌다. 여름철이라, 과일이 올라간 반짝이는 조각들을 축제처럼 팔고 있었다.
누루데가 다녀온 축제에서는 금붕어 대신 구피를 잡아 살 수 있게 해두었다. 고무 다라이에 담가둔 물고기들은 서로 싸워댔고, 아이들이 그걸 보며 울었다. 가게 주인은 의욕 없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느 모로 보아도, 축제 전날 부스를 강권당해 자기 집 수조에서 구피를 떠온 듯했다. 누루데는 구피를 한 마리 사 오려다가…… 물이 담긴 비닐봉지를 어찌할 수 없어 쭈그려 앉아 잠시 구경만 했다. 아이에게 한 마리 대신 잡아주었더니 좋아했다.
옛날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학창 시절은 여름의 물안개 안처럼 뿌옇고 끝도 없이 밝기만 했다. ‘물어보면 알라나.’ 그는 케이크를 한 점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백열등 빛 속에서 아라세는 먼지처럼 동그맣고 지느러미처럼 흐릿해 보였다.
“삿쨩.”
누루데가 문득 불렀다.
“왜?”
“아직도 좋아하나? 물고기.”
“음, 몰라.”
“그럼 와 그리 키워쌌는데?”
“할머니가 갖다놔서. 죽었어 한 마리씩.”
“글서 우울했나?”
“아냐. 좋았어. 같이… 무덤 만드는 거,”
하고 아라세는 입을 다물었다.
누루데는 후회했다. 불을 끄고 있을걸. 아라세는 실언했다는 듯 얌전한 표정도 아니었고, 산만하게 몸을 기울였다가 케이크에 꽂힌 담배꽁초를 뽑았다. 그게 다 탄 촛불인 양.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누루데는 하루 종일 만담이며 온갖 비주류 연예인 기를 세우고 와 준 터라, 목이 조금 상해 있었는데,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그가 말했다.
“와 이캈는데 이건.”
“오늘은 질문이 많네……. 그냥, 담배 피우다가 재떨이가 없어서.”
“케이크, 버릴 끼가?”
“상했으니까.”
그렇지, 맞는 말이지. 아라세는 만사에 성실히 대답해 주었고 누루데는 그럴수록 성가셔졌다. 벌레가 끓기 전에, 엄한 것이 꼬이기 전에 이 케이크는 쓰레기통에 대충 처박힐 것이다. 높은 확률로 그 짓을 하는 건 아침의 누루데 자신일 터다.
불쾌하다는 건 아니고(아라세는 게으르다는 거 아니까) 그냥, 그는 이런 기분이었다.
‘봤나 그거.’
오늘 축제는 규모가 커서, 지역 방송은 물론이고 공중파에 잠시 송출되기도 했다. 그걸 보면서 기다렸을 것이다. 밤이 깊을 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대신, 그가 뭘 하는지 궁금해서 채널을 돌려봤을까? 불현듯이 익숙한 목소리에 붙들렸고. 아라세는 누루데의 일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오늘 웃겼다, 별로였다 그런 말 없이 꽃다발을 내밀곤 했다.
그것도 오래전 일이다.
파노라마 같은 모습들을 목뒤로 삼키면서, 그는 단맛이 들척이는 입안을 한 번 혀로 훑었다. 그가 드물게 다정한 투로 말했다.
“삿쨩. 또 물고기 무덤 만드까.”
“……왜?”
“좋았다매.”
“아냐. 지금은 삿쨩도 옆에 있고… 글쎄. 금붕어 한 마리 데려올까.”
마음마저 상했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누루데는 일어나서, 상한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턱 버리고 손을 씻었다. 그대로 욕실에 들어가 씻은 뒤 편한 옷을 걸쳤다. 아라세가 구깃구깃 개켜둔 옷에서는 부드러운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삿쨩은 오도카니 소파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추워 보여서, 누루데는 그 위에 잠옷 상의를 툭 떨궈주었다. 덜 말린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이 얼룩졌다.
아라세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낯으로 물방울에 손끝을 직 그었다. 얼룩.
누루데가 말했다.
“있지… 서운하면 말해라.”
“삿쨩, 서운한 거 없어.”
누루데는 관자놀이를 긁고는 일단 아라세를 일으켰다. 에어컨을 껐고, 아라세를 방에 집어넣은 다음 선풍기를 켰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말렸다.
아라세에게서도 유연제 향기가 났다. 포근한… 개성 없는 마트 시판.
누루데는 삿쨩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없었나?
그럴 것이다. 그는 연애할 시절에도 애인에게 많은 걸 묻지 않았고, 그것이 평범하고 단조롭고 평화로운, 자잘한 웃음만 남는 좋은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같은 이유로 차였을 게 빤했지만 하루 서글프고는 말았다. 그 뒤로는 연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뻔하니까.
‘어째 이 녀석, 하나도 뻔하질 않대…….’
무상하게 생각하는데, 뒤통수에 손길이 닿았다. 깜짝 놀라 수건을 제치느라 아라세의 손이 바로 목덜미에 닿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유령처럼.
아라세가 고개를 기웃했다.
“…와 만지는데.”
“케이크 고마워. 맛있었어. 남은 거 냉장고에 넣었어.”
“아니 그니까,”
“머리카락 말려줄게.”
어둠 속에서 아라세는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분명 착각이다.
저 잠옷 상의 야광이었던가.
눈 밑 점은 왼쪽이다. 누루데는 자세를 느슨히 하고, 손길을 허락했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그려본 아라세 사치는, 야광별처럼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고 다시 보면 아, 하고 알 텐데. 함께 있지 않으면 그다질 떠오르지 않고.
또 같이 있으면.
“머리카락 길었네… 잘라야겠다.”
“그래야 쓰겄다. 더워가꼬.”
“내가 잘라줄까?”
“안 되지.”
“왜?”
삿쨩은 아무것도 못 하니까, 라고 대답할 뻔했다. 누루데는 이렇게 말했다.
“삿쨩 손, 너무 작아서 안 된다.”
아라세가 입꼬리를 늘였다. 도대체 포인트를 알 수가 없는 표정이다. 그나마 누루데는 기분이 풀어져 피식거렸고, 선풍기 바람에 얼굴이 팽팽하게 당겼다.
그는 이제 반대로 후회했다. 불을 켜고 있을걸. 그러면 이렇게 헛된 잡념도 들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일찍 귀가할걸, 그래도 새벽 두 시 전에는. 삿쨩이 케이크를 더 맛나게 먹었을 낀데.
“삿쨩.”
아라세가 말했다.
“아침으로 케이크 먹자.”
“뭐? 또?”
“남았잖아. 삿쨩도 먹어.”
“뭔 생각이고.”
“그리고 또… 사 오고.”
아라세는 아쉽지도 않다는 목소리였다. 아라세가 축축해진 수건을 떨어뜨리고, 누루데의 등에 이마를 톡 기댔다. 누루데는 돌아보려다가 말았다. 향기가 너무 진했던 거다.
“따뜻하다.”
삿쨩이 말했고, 그래서 누루데는 그런갑다, 하면서도 긴장이 풀렸다. 달고 흐물흐물한 디저트 빵처럼, 덧없이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라세 사치가 감기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