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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몽블랑

나사르 본주 2018. 11. 18. 13:28




에스텔은 자신이 만든 정체불명의 메인디쉬를 바라보았다. 한입 베어문 자국이 난 그것은 검은 접시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앉은 실버가 접시 위에서 자꾸만 달아나려는 둥근 떡을 포크로 쿡 눌렀다. 이제보니 동그랗고 통통한 모양이 눈토끼 같기도 했다. 먹는 것과 비슷했지만 절대로 음식은 아니었다. 에스텔은 묘한 기분으로 입맛을 다셨다. 실버가 바둥거리는 눈토끼를 자르기 위해 나이프를 들어올렸다.

안 돼!’

에스텔이 외쳤다. “그거 살아 있어!”

 


오븐이 돌아가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실버가 처음으로 샀다는 오븐은 돌아가는 내내 가동음을 내는데, 에스텔은 그 부드러운 소음을 좋아했다. 실버가 부엌에 있다는 뜻이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가 정성들인 음식은 대체로 에스텔이나 고양이를 위한 간식이었다. 기분 좋은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과 떨쳐내지 못한 잠기운은 별개여서, 에스텔은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겨우 이불을 젖혔다. 겨울 슬리퍼를 느릿느릿 끌며 문을 열자 단 냄새가 물큰 끼쳐왔다.

식탁 위에 앉아 있던 고양이가 풀쩍 내려섰다. 고양이는 에스텔의 다리에 몸을 부비고 꼬리를 감아댔다. 에스텔은 하품을 하다가 혹여 밟을까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울음소리를 들은 실버가 이쪽을 보며 설핏 웃었다. 그가 다가와 에스텔의 눈가를 만졌다.

 

쌍꺼풀 풀렸어?”

. 예뻐.”

 

에스텔은 시원한 손등에 살짝 기대다가, 실버의 두 손을 슬슬 문질렀다. 차갑게 느껴질까 걱정했는지 실버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에스텔이 고개를 따라가 그 뺨에 입맞추었다.

 

손이 차갑다.”

아까 설거지해서 그래. 무슨 냄새 안 나?”

, 축축한 아몬드빵 냄새.”

아몬드는 아닌데. 방금 시트 완성됐어.”

 

에스텔은 다시 하품하며 식탁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고양이가 무릎 위에서 꼬리를 치다가, 싱크대 위에 올라가 앉았다. 실버는 능숙하게 방해를 피해서 접시를 들어올렸다. 동그란 눈언덕처럼 슈가파유더를 뿌린 몽블랑이었다. 에스텔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앞에 접시와 포크가 놓이자 금세 잊어버렸다. “몽블랑이네!” “테스트용이야. 먹고 밥도 먹어야 해.” “, 잘 먹을게.”

실버가 토마토수프를 데우는 동안, 에스텔은 티포크를 들고 몽블랑을 반으로 잘랐다. 소라처럼 동글동글 쌓인 밤 퓌레는 생각보다 되직한 느낌으로 푹 파였다. 깊은 크림 아래에 약한 껍데기 같은 것이 파삭 부서졌다. 양털 카페트처럼 폭신한 시트까지 잘라내고 나란히 놓으니 뾰족한 산 모양 머랭이 들어 있었다. 에스텔은 포크에 묻은 머랭 부스러기를 핥아보았다. 달지 않은 생크림에 둘러싸여 가볍고 보드라운 맛이 났다. 고픈 배에 황홀할 만큼 단 맛이 퍼졌다. 실버가 물잔을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맛있어?”

맛있어! 이 갈색은 뭐야?”

밤 크림. 밤 퓌레와 생크림을 섞은 거.”

 

크림층은 두텁고 시트는 얕았다. 생크림 층보다 푹푹한 밤 크림은 더 묵직한 맛이 났다. 입안에서 녹여먹어야 할 만큼 무겁기도 했다. 밤 크림을 아껴서 파먹던 에스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 이상한 꿈 꿨다? 꿈 속에서도 뭘 먹었는데.”

몽블랑?”

아니. 눈토끼처럼 생긴 떡이었어.”

 

그리고 내가 만든 거였어. 에스텔은 포크를 물고 실버를 물끄러미 보았다. 실버는 따스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에스텔이 그간 태운 냄비들이 생각난 것이다.

 

아무튼, 나 이런 거 해보고 싶었거든. 일어나자마자 후식 먹기. 왠지 사치스럽잖아?”

그게 꿈이었어?”

, 말하자면.”

그럼 내가 꿈을 이뤄준 거네.”

그렇지!”

 

에스텔은 웃다가, 자그만 탄식을 흘렸다. 아까워하며 먹던 몽블랑이 한 조각 남아 있었다. 보기좋게 노란 시트는 바닐라 익스트랙을 조금씩 뿌리며 반죽해서 향기로웠다. 에스텔은 접시를 슥슥 긁어 남은 한 점을 입안에 넣었다. 입안에서 머랭과 빵이 녹으며 달착지근해졌다. 애타는 갈증에 에스텔은 물을 몇 모금 마셨다.

 

다음에도 또 만들어주면 안 돼?”

식사하고 나서. 홍차도 끓여줄게.” 실버는 덧붙이듯이 이야기했다. “같이 만들까. 크림으로 산 올리는 건 할 수 있을 거야. 가르쳐 줄게.”

정말? 진심이야? 내가 또 망칠까봐.”

요리 하고 싶잖아. 같이 만들어 먹는 게 더 즐겁고.”

 

에스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탁이 덜컹 흔들린 탓에 고양이가 놀라 뛰어내렸다. 실버는 맞닿은 입술이 달다고 느끼고는, 그제야 얼굴을 뒤로 뺐다. “고마워.” 에스텔이 말했다.

……내가 더.” 실버는 웅얼거리듯 이야기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가 식탁을 등지고 서도 에스텔에게는 빨갛게 익은 귀끝이 잘 보였다. 결국 맑은 웃음소리가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