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ㅍ님 - 달걀죽
여름 감기는 약도 잘 안 듣는다는데. 이렇게 이야기할 때, 에스텔은 마치 대신 아픈 듯 서러워 보였다. 괜찮다며, 옮는다며 에스텔의 간호를 한사코 사양하던 실버는 그 표정을 보고서야 잠잠해졌다. 실버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순간 에스텔은 방긋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불안감을 일으키는 예쁜 미소였다. 실버는 그 얼굴에 순전히 감동해서 넘어갈 뻔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뗐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저번에는 피도 났으면서…….”
“괜찮아! 그냥 생채기였는걸. 그리고 오늘은 칼 안 쓸게.”
에스텔은 이미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됐는지 실버는 부엌으로 졸졸 따라갔다. 그러나 에스텔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그는 실버의 손목을 잡고 침실에 밀어 넣었다. 차마 저항할 수가 없으니, 실버는 터덜터덜 침대로 가 누웠다. 에스텔이 그의 몸 위에 겨울용 솜이불과 차렵이불과 담요를 차례로 덮어주는 동안 그는 아이처럼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빤 이불에서는 깔끔한 세제 향기가 나서 실버는 잠시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에스텔이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이마가 뜨거워. 얼굴이 빨갛잖아… 내가 죽 끓여줄 테니까, 다 먹고 약 먹어야 해.”
“죽? 약?”
“너 병원 안 다녀왔지? 식사는 못 했을 것 같구. 그럴 줄 알고 내가 감기약 사 왔어!”
에스텔은 뿌듯한 양 웃었다. 바스락거리며 뭔가 잔뜩 든 약봉지를 내려놓고는 허리에 두 손을 짚었다. “그동안 물 마시고 푹 자!” 명령이었다.
하지만 마음 놓고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버는 이마에 놓인 미적지근한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부엌에서 들려오는 와르르 땡그랑 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바짝 서며 손이 움찔거렸다. 실버는 되려 혼자였을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러나 행복했으며, 긴장한 나머지 얇은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 실버.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버는 가볍게 잠투정을 부렸다. 졸려…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전에는 뭘 했더라? 누가 깨우고 있는 거지? 열에 달뜬 시야가 부옇게 밝아졌다. 곧 눈에 든 주홍빛 머리카락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물수건이 떨어지고 머리가 징징 울렸다. 그슬린 깻잎 같은 냄새가 났다.
“계란죽 끓여왔어.”
에스텔이 말했다. 실버는 미간을 찌푸려가며 쟁반 위에 놓인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묽고 흰, 점성 있는 뭔가가 거기에 있었다. 실버는 벽지를 바를 때 쓰는 찹쌀풀을 생각했다.
“자, 어서 먹어. 약간 이상해지긴 했지만…. 맛은 괜찮아!”
실버는 그제야 찹쌀풀 위에 둥둥 뜬 누르스름한 계란노른자를 보았다. 나름 정갈하게 담긴 그것은 분명 쌀죽이었다. 계란을 아주 조금 푼 쌀죽. 아니, 미음? 생쌀을 끓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을 텐데. 분명 밥솥에 든 밥을 썼을 텐데. 요리하는 과정을 보지 못했으니 감히 추측하기란 불가능했다. 실버는 미심쩍은 마음을 숨기며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맑은 국물을 뜬 것처럼 죽이 조르륵 흘러내렸다. 실버는 잠깐 고민하다가 적당히 식은 그릇을 들고 내용물을 마셨다. 부스러기 같은 건더기는 씹지 않아도 잘 넘어갔다. 어찌 되었든 환자식으로는 적합한 음식이었다. 소화할 것도 없을 테니까. 그는 뒤늦게 느껴지는 미끄덩하고 고소한 맛(이라기보다는 향기)을 음미하며 숟가락으로 얼마 없는 건더기를 뒤적거렸다. 이것저것 재료를 충실하게 넣은 듯 꼭꼭 다져진 음식물 가루가 보였다. 실버는 모르는 척 오분 째 물수건을 쥐어짜는 에스텔을 흘끗 보고선 남은 죽을 후루룩 먹어버렸다. 역시 씹을 필요는 없었다.
“음, 맛있다.”
“정말?”
에스텔은 그제야 이쪽을 보았다. 깨끗하게 빈 그릇을 보는 얼굴이 기쁜 듯이 달아올랐다. 에스텔이 상을 침대 밑으로 내려놓자 실버는 일어서기 위해 이불에서 다리를 뺐다.
“아냐!” 에스텔이 외쳤다. “더 누워있어. 약 놓고 갈게.”
“이제 괜찮은데. 네가 해준 거 먹었더니 좀 나은 것 같아.”
“정말??”
에스텔은 높아지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다가,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오늘은 하루조옹일 여기 있을 거야. 그동안 아무것도 걱정 말고 푹 쉬어.”
“너…….”
“내가 저녁까지 만들어줄게.”
감동적인 헌신에 물기 진 목소리를 내려던 실버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당혹스러운 시선과 마주치자 에스텔은 씩 웃어주었다. “자, 다시 누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