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문인
구르듯이 떨어져 내리며, 파이라이트 레녹스는 생각했습니다. ‘아, 지루해. 어서 박살 나버리라지.’
눈이 펄펄 부서졌다. 파이라이트는 무언가 커다랗고 흰 덩어리가 퍽 뭉개져서 그 파편이 눈송이가 되는 것이라 믿었다. 아니, 눈과 우박은 뭔가…. 다른 식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은데. 알 게 뭐야. 라이는 너무 오래 중력을 거스른 사람처럼 딸꾹질했다.
이제 이것은 추락보다 부유에 가까웠고, 충분히 배운 아이들이라면 이제 지구의 중심을 지나 비상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파이라이트는 아예 몸을 가누려고 들지조차 않았다. 대적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파이라이트의 궤적에 휘말려 파라라락 따라붙던 눈송이는 녹았는지 어쨌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전혀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파이라이트는 목을 꺾어 저 깊은 공동 안을 바라다보았다. 그건 마치 새까맣고 우울한 동공 같았다. 라이는 오로지 더 빨리 떨어지기 위해 휘적 헤엄쳐보았다. 그러자 몸이 수천수만의 날개로 화해 ‘박살이 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파이라이트 레녹스는 반짝 눈을 떴습니다. 고운 인상의 소년이 우스꽝스러운 모잘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시선을 슬쩍 내려 물끄럼 바라본 자신의 몸은 이미 푸른 원피스를 입고 냅킨을 두른 채였습니다. 파이라이트는 저 모자만큼이나 우습게 목에 매달린 냅킨을 확 뜯어냈습니다. 소년은 끈기 있게 대답을 기다리다가, 살폿 웃습니다.
“어지럽지?”
“응.”
“너무 오래 날아서 그래. 눈이 충혈됐잖아.”
그리고 그 뺨만큼 흰 손가락에 찻잔을 걸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톱으로 긁은 듯 묽은 생채기가 진 손이었습니다. 어쩌면 손톱만큼 둔한 칼날이 스쳤을지도 모르지요. 조금 전에 난 상처처럼 핏물이 반짝거렸지만, 소년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라이는 어째선지 소년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펠릭스 시그먼드.”
“응?”
“일어나고 싶어.”
“자, 일어서 봐.”
릭은 여상하게 눈을 감으며 라이의 잔을 채워주었습니다. 보랏빛 찻물이 입술을 대고 마셔야 할 정도로 높이 차올랐습니다. 라이가 벌떡 일어서자 몽둥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책상이 흔들렸습니다. 책상다리가 부러진 것입니다.
“내가 고장 낸 것 같아.” 라이가 말했습니다.
릭이 대꾸합니다. “이제 짝수가 됐네. 열 두 개 말야. 원래 열셋이어서, 별로였는데….”
라이는 이 소년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감고 차를 따르는 소년, 괴상한 모자를 쓰고 수은 냄새를 풍기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년. “향기롭지?” 릭이 묻습니다.
“아니. 이건 네 취향이잖아.”
“당연한걸. 난 모자 장수니까.”
“헛소리 집어치울래?”
“봐. 일어설 수 있잖아.”
부드러운 햇살이 릭의 눈동자에 납작한 빛무리를 먹였습니다. 라이는 그 눈이 꼭 염소 눈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말이나. 산양이나, 제단이나.
그 제단 위에 새파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털북숭이에 입에는 조그맣고 긴 대롱이 달려 있었습니다. 파이라이트는 나무 밑으로 걸어가서 벌레를 움켜쥐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햇살이 라이의 귀를 찔렀습니다.
“라이, 그만둬. 쐐기벌레를 건드리면 아플 거야.”
“상관없어.”
“그 밑에 있는 건 독버섯이고.”
“아니. 이건 제물이야. 제단이니까, 당연히 제물이지. 마법을 쓰지 않는다면.”
하지만, 그것은 버섯이었습니다! 붉고 하얀 얼룩무늬가 장미처럼 어린 독버섯이요. 릭이 일어서서 찻잔 두 개를 들고 다가왔습니다. 그가 갑자기 일어선 것 때문에 의자 다리를 삼키고 있던 잔디밭이 홱 뒤집어까지며 의자가 넘어졌습니다. 바닥은 몹시 보드라워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걸 먹으면 너는 죽게 될 거야.”
릭이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차를 마시면, 라이. 너는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어. 투명해지다가 닿지 않게 될 수도 있어. 목이 아주 길어져서, 총에 맞고 뼈가 부러질 수도 있지.”
“그래서 싫어?”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럼, 두려워?”
릭은 입술을 다물고 빙긋이 미소 짓습니다. 소년의 하얀 아미가 오그라졌습니다.
“아니.”
신중한 대답. 라이는 머뭇거리다가 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릭은 한 손에 쥔 찻잔을 놓아버리고, 예쁜 검지 끝으로 파이라이트의 입꼬리를 꼭 눌렀습니다. 라이가 볼멘소리를 뱉었습니다.
“내 눈은 붉지 않아.”
“알아.”
“그 잔을 내게 줘.”
파이라이트는 허리를 굽히고, 입술을 대고 가득 찰랑이는 찻잔 속의 파도를 조금 마셨습니다. 릭이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이 길고, 총에 맞고, 아주 조그맣고, 웃지 않고, 다 너니까. 그 모든 게 네 이야기야. 어두운 품속으로 떨어지는, 쪼개진 빛. 하지만 넌 지금 폭풍을 마시고 있구나.”
보랏빛 찻물은 무척 따스했습니다. 절망적으로요. 라이는 무심코 입을 열었습니다. 릭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머금고 부풀어 오르더니, 모자가 둥실 떠올랐습니다. 이 때문에 라이는 하려던 말을, 가슴을 꼭 누르던 느낌을 잊고 말았습니다.
“자, 이 레몬 향기를 맡아 봐.”
릭이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