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ㅁ님 - 해산물 빠에야
돌발컴션 받앗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는 시시해 빠진 결말로 끝을 맺었다. 고전 명작의 베스트 샷을 모사한 클라이막스에서 극장 안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실소였다. 브라운 반다이크는 팔걸이에 올려놓은 연인의 손등을 매만지느라 스크린에 반응해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둘은 한동안 앉아 있었다. 크레딧이 끝나고, 직원이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며 우회적으로 쫓아낼 때까지. 엔딩 롤에 쓰인 음악이 이 영화가 낳은 유일하게 좋은 것이라고 칭해도 괜찮을 터였다. 브라운은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이 시시한 작품을 돌려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재미가 있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화가 시작하던 따듯한 순간, 닿은 손, 차가운 살갗, 시간에 맞추어 달려오느라 가쁜 숨, 호흡을 가라앉히며 겉옷을 벗는 모습, 혹여 고개를 돌릴까, 그러면 그림자가 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까봐 차마 만질 수 없었던 니에베의 옆얼굴 등을 오래 곱씹고 싶을 뿐이니까.
해서 니에베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말라붙은 라떼 얼룩을 뒤늦게 발견했다. 컵 테두리에 스치며 남았을 희미한 우유 자국을 지우는 표정이 토라진 고양이처럼 샐쭉했다. 표정을 지우지 않고, 니에베가 말했다.
“모레 시간 있어요?”
브라운이 건네주는 가방을 받은 니에베는 젖은 핸드타월을 쓰레기통에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그쪽을 보지도 않는 실력에 브라운은 내심 감탄했다. 그러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니에베는 고개를 기웃 기울였다. 모종의 재촉에 브라운이 얼른 입을 열었다.
“시간 많아요. 하지만 그때 가족들 만난대서 말 안 꺼내고 있었는데.”
“……그렇긴 해도. 저녁 식사 초대하면 올 건가요?”
“당연하죠. 데이트는 많을수록 좋고. 니에베는 괜찮아요?”
“음.”
니에베는 시선을 내려 브라운의 손을 바라보았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그가 얼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결국 니에베의 손도 브라운의 주머니에 얌전히 수납되었다. 차갑고 단단한 손끝을 만지던 브라운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니에베가 입김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아쉽네요. 오늘.”
“내일 일 가야 하잖아요. 다음에 더 놀아요.”
“꼭 와야 해요.”
“꼭 갈게요. 모레 저녁?”
“여섯 시.”
“그래요, 기억. 꼭.”
니에베는 손을 빼는 대신 가만히 눈을 마주쳐왔다. 가끔 불어오는 칼바람에 뺨이 달아 있었다. 브라운은 그제야, 작은 눈사람을 만지듯이 니에베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니에베 이엘로x브라운 반다이크
Paella de marisco
“가족들이 오는 줄은 몰랐어요. 이대로 될까요?”
“저녁이고, 언니 얘기는 그 전에 했으니까…… 아는 줄 알았죠. 미안해요. 지금 그대로도 멋져요.”
“그게 아니라, 빠에야 용 쌀이 없어서 그냥 쌀로 했거든요. 괜찮을지 모르겠네.”
니에베는 오븐 안에서 지글거리는 파엘라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한껏 신경 쓴 브라운의 매무새와 달리 셔츠에 성긴 가디건을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브라운도 지금은 미끈한 셔츠에 아기자기한 앞치마를 꼭 맨 다소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가 손에서 오븐장갑을 빼며 하얗고 깨끗한 접시를 매만졌다.
“맛있을 거예요. 사프란 냄새가 좋던걸.”
니에베는 메인요리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바 앞에 섰다. 손에는 빈 사과주 병이 들려 있었다. 식전주가 떨어진 차에 식사에 곁들일 레드와인을 가지러 온 참이었다.
“혹시 자리가 불편해요?”
“그런 건 아니지만…….”
브라운은 요리에 쓰다 남은 토마토 조각을 니에베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파슬리를 뿌려 약간 매큼한 맛이 났다. 니에베는 열심히 오물거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염려하는 시선에 졌다는 듯이, 브라운이 두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조금은요. 내가 마음이 좀 여린 거 알잖아요.”
“가슴에서 피 안 흘리게 지켜줄게요.”
“보호받는 기분은 좋네요. 약속이에요.”
니에베가 약한 취기에 풀린 얼굴로 웃었다. 브라운은 끊임없이 뭔가 만지작거리는 짓을 포기 못 하고 니에베의 긴 소매를 착착 접어 올려주었다. “그만하고 이제 와요. 거들어줄게요.” 브라운은 가볍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한숨을 폭 내쉬었다. 붉은 포도주와 잔을 나르는 일은 니에베의 손길에 떠밀린 그의 몫이 되었다.
아브릴과 플로레 이엘로는 브라운의 예상보다는 낭랑하고 떠들썩한 사람들이었다. 하기야 둘째는 집안 분위기랑 다르게 크는 법이지… 무의식적으로 상황에서 도피하려는 그를 붙잡는 건 이번에도 니에베였다. 손등을 잡아주는 것이 기분 좋아 정신을 차리자 플로레가 브라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직장 동료라고요?”
“예, 제가 훨씬 후임이죠.”
“니에베가 너무 까다롭게 굴지는 않아요? 착하지만 공무에선 엄격한 애라.”
“아뇨. 사적인 일과는 구분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요. 게다가 상사로서도 잘 챙겨주세요.”
이제는 방도 같이 쓸 때가 많고. 브라운은 알맞은 때에 말을 삼켰다. 니에베를 보니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접시에 달랑 올린 새우껍질을 포크로 열심히 분해하고 있었다. 브라운은 손을 뻗어 니에베의 접시에 음식을 듬뿍 담아 주었다. 그제야 시선이 이쪽으로 왔다.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새우를 쌀죽 아래로 감춰버린 짓을 원망하는 기색이 있었다. 브라운이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편식하면 안 돼요.”
“그래, 니에베.”
아브릴이 말을 받았다.
“맛있기만 한걸. 아직도 끓인 쌀 싫어하니? 브라운은 요리를 잘 하나 봐요.”
“오늘을 위해 배웠죠.”
“말도 예쁘게 하고.”
분위기는 슬슬 브라운을 중심으로 화기애애해졌다. 니에베는 이 흐름이 자신에 대한 잔소리로 이어질 가능성을 떠올리고 가볍게 포크를 휘저었다.
“브라운 괴롭히지 말아요.”
“칭찬인데 뭘.”
“맞아요, 칭찬인데 뭘.”
브라운이 능글궂게 거들었다. 니에베는 말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그것을 본 누군가도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아브릴이 실수인 척 사위라고 말하기만 하면 완벽하게 곤혹스러운 식사 자리가 될 것이다. 이런 걸 예상하진 못했는데. 니에베는 자신에게 질문의 화살이 돌아올 적마다 술잔을 들었고, 결국 반병쯤을 혼자 비우고 말았다. 모두가 조금씩 짓궂고, 일찍 자리를 파하면서는 이제 눈치껏 가주겠다느니, 플로레가 쓸데없는 말을 주워섬겼을 뿐 식사 시간은 평화로웠다.
샐러드에 염소젖 치즈를 조금씩 뜯어 넣던 니에베는 귓가에 닿는 간지러운 손길을 느꼈다. 브라운이 손가락으로 귀 끝을 만지고 있었다.
“왜 그래요?”
“취한 것 같아서. 귀가 엄청 빨개요.”
“이 정도로는 안 취해요. 그냥…”
“그냥?”
“다음에도……”
니에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브라운은 옆에서 자리를 옮겨 마주 앉았다. 그는 보이는 것보다 긴장했었는지 이제야 술을 좀 들고 있었다. 요리에 쓰고 남은 화이트와인에서 달착지근한 꽃향기 비슷한 것이 났다. 브라운이 달래는 것처럼 상체를 낮추었다. 니에베는 음식물이 안 묻은 손등으로 뜨거운 뺨을 식혔다.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내년에도 이렇게 있으면 좋겠어요.”
“원한다면 그럴게요. 난 선약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농담이 아닌데요.”
“나도 농담이 아닌데.”
브라운이 포크를 뻗어 샐러드에 섞인 오이를 콕콕 건드렸다. 포크에 찍힌 채소 조각이 니에베의 입 앞에 드밀어졌고, 니에베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가 우물거리는 동안 브라운이 의자에 걸쳐놓은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손.”
“……뭔데요?”
그게 뭔진 자명했다. 니에베는 손을 내미는 대신 브라운이 마시던 와인잔을 가져와서 물처럼 들이켰지만, 두 모금을 넘기기도 전에 잔을 빼앗겼다. 손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반지에는 하얀 보석이 내각 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험하게 다루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 것이리라. 니에베는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술기운 탓인지 빛이 가물거리는 반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슬쩍 상대를 훔쳐보니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동안 시선도 못 마주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음에 나올 말 또한 자명한데도.
“브라운.”
“타이밍 빼앗기면 부끄러우니까 다음에 다시 할래요?”
“좋아요.”
“좋아. 손에 염소 치즈도 묻어있으니까요.”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샐러드를 씹어먹었다. 그러나 몇 모금 머금지도 않은 술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듯이 브라운의 목이 달아올랐다. 니에베가 낭랑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이런 건 가족이 닮는구나, 브라운은 애써 상념의 머리를 선회시키며 니에베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눈길이 마주쳤다.
이제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택마다 예보된 눈을 보려고 커튼을 열어젖혀 거실을 장식한 가랜드와 때늦은 트리 따위가 들여다보였다.
캄캄해진 유리창에, 우유 자국 같은 얼음 송이가 미끄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