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ㄽ님 - 바다
일반타입입니다 감사합니다!
야간열차는 밤보다 낮은 곳으로 달렸다.
낙조가 다 꺼지기 전 켜둔 독서등이 촛불처럼 후르륵 흔들렸다. 여행사는 통신기기가 잘 터지지 않는 일등열차의 문제점을 힐링, 분위기, 책과 커피, 한낮의 여유로운 카페테리아… 등 번지르르한 키워드로 닦아 두었다.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을 강조하는 홍보물과 달리 식당 칸은 지루해 보이는 각색의 여행객들로 붐볐기에 둘은 아늑한 개인실 안에서 저녁까지 해결한 참이었다. 베르토는 관광책자보다 하등 나을 게 없는 잡지 몇 권을 들추다가 간신히 발견한 소설 하나로 남는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들인 돈이 아깝지 않게, 방은 조금 흔들리고 모든 가구가 접이식이거나 벽에 접착되어 있기는 했지만, 두 장신이 편하게 발을 뻗어도 넉넉한 공간이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호세는 결국 베르토의 어깨에 턱을 묻었다. 선로 이음새를 지날 때라 목소리가 보채듯이 떨렸다. “자기야.” 그가 이쪽으로 시선을 겨누었다. 방심한 것처럼 낙낙한 여유가 묻어나는 눈이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신 뒤로 몸이 나른했다. 호세는 별로 참지 않고 키스했다. 입맞춤이 진해지자 베르토는 호세의 턱을 살며시 쥐고 물러났다. “지금 지나는 곳이 해변이라고 합니다.” 책을 덮는 왼손등이 부드럽게 반짝거렸다. 베르토는 주로 따뜻한 피부로 덮인 오른손을 서서 호세의 몸을 만지고, 가끔은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호세는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바로 했다.
“벌써? 도착하려면 몇 시간은 더 가야 할 텐데.”
“세상에서 제일 긴 해변이라고.”
“그렇다면 사막이라는 말이 더 맞지 않나.”
“낭만적일수록 잘 팔리니까요. 호세, 당신은 어느 쪽이 마음에 듭니까?”
“나는 속물이라, 아마 팔리는 쪽이 마음에 들겠지.”
그럼 해변인 것으로 하죠. 베르토는 헐렁하게 중얼거렸지만, 무언갈 계속 생각하는 듯했다. 호세는 베르토가 읽던 책을 가져와 어둑한 조명에 자세히 비추어 보았다. 어린 왕자, 근래에 나온 완역본이었다. 너절한 모양새길래 벌레가 좀먹은 초판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단지 손때를 탄 모양이었다. 끝까지 읽지는 못했거나, 마음에 드는 페이지만 읽거나 했는지 가름 줄이 처음 몇 장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흥미가 가는 문장은 없었다. 호세는 다시 책을 돌려주며 상대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차가 커브를 도는지 베르토의 이마 언저리에 각진 그림자가 어렸다.
“모래 위에 기찻길을 세울 수가 있는 건가.”
“모르겠네요. 다음에 내리면 어떤지 한 번 볼까요.”
“좋지, 슬슬 좀이 쑤시는걸.”
“즐겨 보죠. 간만의 휴가지 않습니까.”
그는 시선을 내리며 나직이 웃었다. 답잖은 모습이다. 호세는 새삼스레 베르토의 입술이며 뺨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어깨를 힘주어 쥐어왔다. 그다지 긴장된 상황은 아니라, 어쩌는지 보자는 식으로 호세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주었다. 베르토는 그 옆에 털썩 몸을 던졌다. 어느 한쪽 스프링이 나간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느긋이 천정을 바라보는 호세의 입술에 막대사탕이 물려왔다. 들큼하고 독특한 맛에 불가리아산 장미 향기가 났다.
“어때요?”
베르토가 물었다. 조그만 숨소리와 기차간 덜컹거리는 소리가 섞여 머릿속이 혼곤했다. 호세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베르토를 보았다. 그의 숨결이 목께에 닿고 있었다.
“뭘 말하는 거지?”
“이 여행이.”
“따지자면 아직 시작단계인데, 뭘 어떻게 평가하겠어.”
“냉정하군요. 다 좋다, 모르겠다, 정도로 대답해도 괜찮을 텐데.”
“다 좋아.”
“완벽하게?”
“그건 모르지.”
“정말 냉정하네요.”
호흡이 웃음처럼 쪼개졌다. 호세는 자신의 입에 들어 있던 사탕을 베르토의 입가에 드밀었다. 베르토는 빨간 혀끝으로 사탕의 겉면을 길게 핥아먹었다. 물뱀의 입처럼 귀여웠다. 그걸 보는 사이 정적이 흘렀다. 호세는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린 뒤에야 이마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알아챘다. 누구 것이라고 할 것 없이 숨에서 농후한 장미 냄새가 났다. 베르토가 먼저 입술을 움직였다.
“호텔은… 야외 테라스가 아름답다고들 합니다.”
“거기서 식사를 하면 좋겠네. 몽글몽글한 관자 수프 같은 걸… 네 귀에 장미 몇 송이 꽂아 놓고.”
“농담도. 바닷가에 꽃이 피진 않을 텐데요.”
“왜? 자본으로 못할 건 없어.”
“소금사막에 정원을 일굴 셈입니까?”
“못할 것도 없다니까.”
호세는 눈을 감으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사탕 막대가 떨어지려는 찰나 베르토가 그것을 잡아챘다. 호세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쥐는 금속성의 온기를 느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도타운 암흑 속에서 말했다.
“아직 악몽을 많이 꿔?”
“글쎄요. 악몽인지 아닌지, 자주인지 아닌지는……”
“꿈도 자란다던데.”
“이상한 말이군요. 변하기야 하겠지만.”
“꿈의 고도가 높아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래.”
베르토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뜨문뜨문한 숨결을 내쉬었다. 잠시 조용하던 그가 속살거렸다.
“만약에 먼 곳에서 지구를 바라보던 사람이 있다면…”
“하하. 귀여운 가정이군.”
“만약에. 그렇다면, 파란 물의 행성을 상상했겠죠. 청록으로 가득한 휴양지 섬 같은 곳을요.”
“우주인은 안 돼봐서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지.”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기대와 현실이 다르면 실망하잖습니까.”
호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다. 베르토가 쥐고 있던 소설의 표지에는 투박한 푸른색으로 그린 구슬과 금발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베르토는 허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의 손길에 닳아빠져 페이지가 반들반들한 동화 이야기를.
“그렇지. 어린 왕자 얘기군.”
“결국 사막만 보고 갔지 않습니까. 결국엔 그랬어요. 난 그런 결말이 두려워서 책을 오랫동안 뒤적거렸는데, 정말 그렇더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안 나. 암울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로 아는데. 뭐… 호텔이 수준 이하일까 봐 무서워?”
“아뇨. 옛 생각을 좀.”
“그것 때문에 완벽이니 뭐니 한 건가?”
대답이 없었다. 호세는 몸이 기울어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베르토가 상체를 일으킨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 떨어지기 전 호세는 베르토의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먼저 소리를 낸 건 호세였다. 그는 신음 어린 하품을 낸 뒤에 말했다.
“바닷속에 떨어져도 바다를 못 보지.”
“…….”
“정확하게, 완벽하게, 찬란한 휴양지 해변에 떨어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거야. 명궁이 그 애를 시위에 끼워서 세상에서 가장 긴 해변 같은 데에 꽂아 넣지 않는 이상. 게다가 여기도 거의 사막이잖아.”
베르토는 뺨을 지분거리는 손을 잡고 제 목에 둘렀다. 손가락이 맥이 뛰는 곳에 닿았지만, 철갑으로는 박동이 얼마나 빠른지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토의 눈길이 게슴츠레해졌다.
“무슨 생각 해?”
“세상에서 가장 긴 해변에 대해서요.”
“상술이 달가워졌어?”
“어쩌면 어떤 사막은 정말 해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러니까, 금발 곱슬머리 꼬마애도 체력과 운이 따라줬다면, 모래를 다룰 줄이라도 알았다면 결말이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그런. 최소한 독사가 아닌 바다 민달팽이에 쏘여 죽는다거나.”
“우스운걸.”
“그러게요. 독사가 낫지.”
“하지만 걔도 포기하지는 않았잖아. 계속 걸었지, 힘이 닿는 데까지. 완벽한 여행은 아니었겠지만, 하필 거기여서 다행이라는 생각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최악은 아니니까.”
“작가가 바다에서 실종됐다는 걸 생각해보면 기묘한 완결인데요.”
“끝까지 맞는 궤도로 떨어지진 못했나 보군.”
“하하… 호텔은 좋을 겁니다. 지은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니, 로비에 대추야자 탑이라도 쌓여 있다면 더 좋을 텐데.”
“나는 망고가 끌려.”
“그럼 그것도.”
“바닐라꽃이랑.”
베르토는 얼마간 더 시시덕거렸다. 졸음을 못 이긴 호세가 남은 사탕을 와드득 깨물어버릴 때까지 그랬다. 둘은 새벽 언제쯤 잠들었는데, 벽시계가 없어 열차가 유난히 조용하던 구간이라는 것밖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호세는 물이 밀려드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자 풍요로운 모래폭풍이 짧은 손톱으로 차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자 밝았다. 열차가 사막의 발등 위를 넘었다. 발등 위는 밤의 지하였고, 낮보다 멀리까지 환했다.
사위가 고요했다. 호세는 눈꺼풀을 벌리고 비져드는 햇빛에 못 이겨 눈을 떴다. 간밤 탓인지 눈가가 건조하고 입안이 말랐다. 주변이 전날보다 더 훈훈한 것 같기도 했다. 호세는 짐이 빠져 넓어진 방안을 확인하고 창을 열었다. 열차 칸은 방이 되어 있었다. 완전히 멈춰선 열차는 일등칸보다 그저 방이라는 이름에 더 어울렸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을 멀끔하게 넘긴 베르토가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한쪽 어깨에 가벼운 짐가방을 걸머진 채 손을 내밀었다. 호세는 부스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계단을 내려섰다. 바깥의 햇볕은 생각보다 더욱 따가웠다. 누군가 그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푹 씌웠다. 호세는 그보다 선글라스가 고픈 눈길로 모자를 젖혀 상대를 바라보았다. 웃음이 보였다. 파란…
차가운 금빛… 하지만 살갗을 긋는 열기는 진짜였다. 지평선을 덮은 빛무리가 시시때때로 움직이며 밀려들었다. 호세는 곧 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많은 물, 푸르지는 않은 아침 녘의 바다였다. 해변은 창백하게 희었고, 선로는 모래가 끝나는 지점의 단단한 언덕 위에 지어져 있었다. 간이 역은 상쾌할 만큼 사방이 탁 트여 있었다. 호텔로 가는 길목에 짐가방을 놓고 쉬는 사람들마저 조그맣게 보였다.
“호세.”
그는 빛을 익혀가는 초점으로 베르토에게 집중했다. 사방이 이상할 만큼 환해서, 그의 표정도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
베르토와 그 사이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발자국으로 어지러운 땅이었다. 자취들은 모래사장을 꿰뚫고 젖은 물가에 꽂혔다.
“사진보다 훨씬 넓군.”
“가장 긴 뭐란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죠.”
“갈까.”
호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베르토의 손을 잡았다. 물이 모래를 미는 곳으로 갔다. 꿈이 구멍 난 자루처럼 쏟아지고, 잊혔다. 꿈을 꿀 필요도 없었다.
환락이라 칭하기 미안할 정도로 조도가 높고 명쾌한 풍경이 연속된다. 호세는 완벽하다느니 완전히 상상한 대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걷는 모습으로 보아 적당히 만족스럽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다. 그는 호세를 바라보다가 금세 뱃속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낀다. 잘 모르겠지만, 이것은 살아 있다. 무엇의 끝인지는 몰라도 여기에서 멈추고 싶다. 멈추었다가 거기서부터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한 걸음씩, 제대로, 맨발로, 파묻히고 밀어내면서. 이 매일에 계속되는 것이 있다면 파도 소리나… 나날이 살이 붙는 성가신 갈매기뿐이다. 만약에, 어떤 푸른 구슬 속, 거의 사막인 곳이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바다와 만난다고 가정한다면. 이……
거대한
행성에도, 물과 모래가 만난다는 당연한 사실이 있다면.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파도가 치는 곳은 특별히 물거품을 만드는 지점이 아니다. 그냥 완성된 것이다. 모든 것이.
호세에게 단단히 붙들린 베르토는 중간에 신발을 벗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맞는 방향인지 묻지 않고 따랐다. 오래지 않아 발가락 사이로 물길이 들었다. 물이 드는 곳에서는 쐐기 같은 발자국이 자꾸만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