ㅆㅈ님 - 자캐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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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아이스크림이야? 아직 봄인데.” 해랑은 포장지 안에서 녹아버려 한쪽이 뭉툭해진 쌍쌍바를 물며 말했다. 우영은 먼저 포장을 찢었다가 왈칵 쏟아진 국물에 손이 끈적해져 있었다. 무심코 손가락 끝을 쪽 빨던 우영은 해랑의 눈치를 보며 체육복 바지에 손을 닦았다.
“어, 요 앞 수퍼에서 할인하길래.”
“하나에 얼만데?”
“삼백오십 원. 갚을 생각 말고 그냥 먹어.”
“응? 돈 갚으려고 물어본 거 아니야. 가는 길에 더 사 가려고.”
이런 상황에서는 온종일 아이스크림이 땡겼는데, 먹고 싶은 걸 생각하다 보니 너한테도 먹이고 싶었고, 그래서 굳이 슈퍼마켓까지 찾아가 사 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우영은 끈적하지 않은 새끼손가락만 세워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은 쌍쌍바 하나를 사서 나누어 먹고도 싶었지만, 통이 작아 보일까 봐 일부러 두 개를 사 왔다는 말도… 이제 생각해보니 그냥 메로나를 두 개 사 왔으면 됐겠네 싶었다. 적어도 초콜릿 맛은 아닌 걸로. 해랑이 우영의 체육복 집업 앞섶에 묻은 초콜릿 자국을 매만졌다. “조심하지.” 그러게, 우영은 약간 민망해져선 물렁한 아이스크림을 이로 뚝뚝 떼어먹었다.
겨울방학은 조금 길었지만, 고등학교 2년생의 방학이란 보충수업과 동의어였고, 오히려 개학과 봄방학 사이의 기간이 더 느슨했다. 고작 일주일이 안 되는 기간에 예습을 시키려는 빡빡한 선생은 얼마 없었다. 그러나 일 년 더 먹었다고 쉬는 시간에도 꾸역꾸역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이 늘어 있었다. 우영은 불법으로 내려받아 틀어주는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음향, 자습하는 애들이 샤프를 누르는 소리 같은 걸 들으면서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유독 영화에 집중하는 친구에게 짜증을 듣기가 일쑤였다. 커튼 좀 열지 말라나.
우영은 교실 안의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떠오르는 것은 여름철 전국대회를 위한 연습 스케줄과 새삼스레 걱정이 드는 내년, 그 내년의 이야기뿐이었다.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빛살이 망막에 화상을 입혔다. 우영은 허공에 점점이 뜨는 초록색 그림자 같은 것을 세면서 생각했다. 이제 이년쯤 남았다. 고삼이 되면 다른 학교 학생과는 매일 어울리기 힘들 것이다. 해랑이가 야간자습을 하면 석식 후에 운동장을 걷는 정도… 뭔가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뭘, 어떻게? 해랑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의식하지 않아서 더 소중했다. 이제 와 조급하게 굴었다가는 이상하게 보일 터다. 우영은 이른 하교시간까지 멍하니 있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해랑이는 지금 뭘 할까. 거기도 자습인가. 끝나면 쌍쌍바 사서 나눠 먹어야지. 어쩐지 해보고 싶었으니까. 신우영에게 앞으로의 진로와 교우 관계 고민이란 5교시 자습이면 대충 마무리될 수 있는 종류였다. 그는 그제야 운동장 철책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랬는데, 해랑을 보니 다시금 마음이 복잡했다. 만약 우리가 대학에 간다면… 이제까지는 그런 얘기가 현실적이진 않았지만, 우리가 만약 대학에 가거나 안 가거나 못 가거나, 몇 가지나 되는 선택지 중에 다른 길을 가게 되면 어떡하지. 1학년은 재빠르게 지나갔다. 2, 3학년이라고 해서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해랑의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드니 세일 전단이 붙은 냉동고 앞이었다. 해랑은 우영의 손을 놓고 바구니에 아이스크림 다섯 개 정도를 담았다. 그 애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계산까지 하는 모습을 우영은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입춘이 지났다지만 해가 길어지려면 더 멀었다. 우영은 건물에 가려져 있던 해가 움직이며 갑자기 눈을 찌르는 바람에 손차양을 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 동이 틀 때처럼 강렬한 붉은 빛이었다. 야트막하게 내려가는 아스팔트 길이 발갛게 물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차가운 손이 팔을 잡아당겼다. 눈이 반짝거리는 해랑이었다. 우영은 아이스크림을 고르느라 차가워진 그 두 손을 잡아주며 해랑의 눈이 지나치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신해랑은 원래 이런가, 이렇게 예뻐서야… 시선이 너무 솔직했는지 해랑이 살금 미소지었다.
“이거 가져가.”
“응?”
“녹아서 다 못 먹었잖아, 가져가.”
봉지에는 고심해서 고른 듯한 다른 종류의 하드가 얌전히 담겨 있었다. 꽝꽝 얼어 있는 걸 꺼내느라 손이 이렇게 차가운 모양이었다. 우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당혹한 해랑이 손을 빼고 뺨을 쥐어왔다. 서늘한 손길이 기분 좋았다.
“어어, 괜찮아? 어디 아파?” 아픈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낮부터 몽롱한 게, 봄 감기인가… 하지만 우영은 고개를 젓고 해랑의 손을 잡았다. “아냐. 가자.”
물이 맺힌 검은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우영은 별말이 없었지만, 오렌지색 노을빛이 잔뜩 묻은 해랑의 머리카락과 옆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해랑이 멋쩍은 듯 웃으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오늘 이상하네. 감기약 꼭 먹고 자고.”
“어? 어어.”
“내일 보자.”
내일 보자니. 더 걸을 수 있는데, 생각하며 앞을 보자 갈림길이다. 잡념에 잠겨 있느라 하굣길을 그냥저냥 흘려보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러고서 응 그래, 하고 들어가라고? 하지만 해랑은 꼭 그러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가는 거 보고 갈래.” 저 다붓한, 웃음기가 어린 눈에 대고 싫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우영은 가벼운 봉다리만 꼭 쥔 채 뒤로 돌았다. 제 속도 모르는 저녁놀이 앞길을 함빡 적시고 뒤로는 긴 꼬리 같은 그림자를 남겼다. 우영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되새기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무엇을 해야겠다, 고 마음을 먹었을 때 이미 달리고 있었다. 우영은 천천히 걸어온 길을 단숨에 뛰어 되돌아갔다. 가만히 서 있던 해랑이 조금 놀라 뭘 놓고 갔는지 묻고 있었다. 우영은 그 말보다, 해랑의 입가에 언뜻 어린 안도의 기색에 두근거리고 말았다.
“밤에.”
“응?”
“밤에! 전화할게.”
“알았어.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문자로 해도…”
“받아 줘.”
해랑은 신우영의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다가, 그럴게, 하고 대답했다. 꼭 받을게.
우영의 표정이 활짝 폈다. 해랑은 그것이 꼭 해바라기 같다고 생각했다. 해를 향해 꽃받침을 돌리는… ‘아직 봄인데.’ 그럼 해는 나일까? 모를 일이다.
“이제 정말 가.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 이번에는 바로 까먹지 말고 냉동실에 넣어둬.”
“응!”
“내일 보자.”
“응, 내일 봐!”
우영은 다시 갈림길 너머로 사라졌다. 신이 나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에 홀로 남은 해랑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다섯 시 반이다. 밤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여덟 시가 넘어서 전화가 올 것이다. 세 시간쯤 남았다.
저녁해가 저물며 자줏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해랑은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듣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올 때처럼,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