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ㅂ님 - 자캐커플, 식물아포칼립스와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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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햇살이다. 벽이 없는 곳에선 해가 원숭이처럼 짖는다는 걸 인간은 오랫동안 몰랐다. 같은 혈족을 자연으로 대적하며 멸망했으니 그야말로 인간적인 마지막이라 할 수 있을까. 이 태양과 인간의 안타까운 통속극은, 아마 뿌리를 깊게 뻗고 채광을 막는 철과 돌이 사라지기를, 그리하여 비린내 나는 문명이 거품처럼 쇠락하기를 기다리던 단호한 풀 이파리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육친이 엉긴 현대 비극 따위에 관심이 없었던 하밀은 시멘트처럼 뻣뻣하게 우거진 녹음에 앉아 폭발적으로 생장한 탓에 그 종을 짐작키 힘든 어린 넝쿨 속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석유로 직조한, 인간이 잠시 맛본 황금기의 의복이 누더기가 된 후부턴 저 태양 빛을 견뎌낼 수 있는 직물은 가칠가칠한 나무껍질뿐이었다. 섬유를 뽑아낼 기계가 녹슬어 인간은 식물이 가진 것을 최대한 흉내내어야 했다. 맹수가 몸집을 웅크리고 집고양이로 변신했던 것처럼.
이제 고양이란 도심에 군림하는 야수 왕이다. 밤이면 그것들의 울음소리가 목숨을 한 움큼씩 긁어간다.
하밀은 어젯밤 그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내가 낡은 물소 가죽 백팩에 담배 보루를 욱여넣고 있었다. 기름진 섬유에 나무껍질을 꿰매어 만든 금파옷(그렇게들 부르곤 했다) 소매가 나달나달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오며 가며 지나치듯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고. 하밀은 입을 조금 열었다가 여물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목소리를 냈다.
‘……부인, 상처에 담배를 누르지 말아요. 이미 말아 둔 것은 약이 아니니까.’
‘다 피워버릴 거예요.’
‘그것도 약이 아닌데.’
‘하밀.’
그는 무언가가 끝나버린 눈으로, 달빛 어린 물웅덩이처럼 아름답고 가련한 것을 보듯이 하밀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도 하밀은 거칠은 나무껍질에 등을 댄 채 졸음에 겨워 있었다. 부인이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믿지 마세요.’
樹歿하는 正午에 짓는 弄
불구경 중 자을 실없는 얘기
티토는 새 보금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바닥이 통째로 폭신한 찰흙이라 잠을 자기에 좋은 곳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응달에는 온갖 벌레가 알을 까고 불이 잘 붙지도 않았지만,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발화에서 도망치거나, 따가운 볕을 피하기에는 좋았다. 정오마다 정수리를 쏘는 햇빛은 머리 위로 무너지다 만 벽에 튕겨 짧은 그림자만 남겼다. 티토가 앉고 눕기에는 충분한 자리였다. 또 다른 사람무리가 여길 털러 들를 때까지는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주변이 이미 초토화된 거로 보아 몇 번이고 들른 무리가 있었던 듯했다. 머릿수를 전부 재우기에는 그림자가 부족한 공간이라 모두 떠난 모양이었다. 홀몸인 티토에게는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군을 떠난 지 한 달째가 되었다.
떠났다고 해도 좋을까. 맞는 말일까. 티토는 꽤 오랜 기간 ‘정복군’에 붙어 있었고, 그만큼 많은 살상과 우둔함을 목격했다. 역겨운 순간을 매번 견뎌내며 질긴 옷을 입은 군홧발 무리에 몸을 담갔다. 그 자신이 벌였다고 해도 좋은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 번, 한 번씩 일어나는 사건은 겨우겨우 삼킬 만큼까지만 버거웠다. 티토는 자신이 여기에, 사람 사이에서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실리적으로 맞는 일 같았다.
그랬던 그가 떠나기로 한 건 순전히 기분 탓이었다. 문명이 주저앉고 교양과 체면은 철 지난 시쳇말이 된 시대에 어차피 결단을 내릴만한 근거란 기분뿐이 없지 않냐고 대꾸할 수 있겠지만, 티토는 그것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온몸으로 애쓰며 ‘기분’이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떠나야만 한다. 아니면 죽는다. (우리가?) 그런 ‘기분’이었다. 종교적인 사람이라면 아마 ‘계시’라고 칭했을 무언가였다.
티토는 약력과 능력, 체류 기간이 타인을 불허했으나 까탈스러운 성질머리와 조그만 체구 때문에 자주 불침번을 대타 서주고는 했다. 말이 대신이지 거의 괴롭힘이었다. 안 될 체력도 아니고, 같은 무리 인간들이 잠들었을 때 평온을 누리는 게 썩 괜찮아 일일이 승낙하던 날 중 하루, 무리는 또다시 ‘원정’ 중에 공터를 찾아 잠들었다.
이상토록 완성된 공간이었다. 느티나무인지 떡갈나무인지 굵다란 뿌리를 널찍이 뻗치고 산산한 피톤치드 향기를 뿜는 나무가 중앙에 마련된 땅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개간한 땅 같기도 했다. 조금 파헤쳐보니 젖은 벌레가 나왔다. 기름진 영토라는 뜻이었다. 원정대는 이곳을 ‘정복’해도 괜찮겠다고 시시덕거리며 캠프를 준비하고, 약소한 식량을 먹은 뒤 잠이 들었다. 마음을 살짝 건드릴 만큼 넘실거리는 쾌청한 숲의 냄새가 꿈을 이르게 끌고 왔다. 티토는 모닥불에서 먼 나뭇등걸에 앉아 가만가만 졸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철커덕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떨쳤다. 품에 안은 장총을 어떻게 잘못 건드렸는지 장전이 되어 있었다. 티토는 찌뿌듯한 어깨를 쫙 펴며 무기에 안전쇠를 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깜부기불이 남아 끔벅…끔벅이고 있었다.
그때 그 기분이 들었다. 티토는 문득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으레 밤이면 시야를 넓히려는 무의식적인 본능 아래에 고개를 들게 되고, 하늘을 메운 나뭇가지가 눈에 들고, 그것이 사람을 향해 뻗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데 평소다운 일이라 생각하던 티토는, 나뭇가지가 정말로 하늘을 가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저것이 저래도 되나. 보통 나무끼리는 서로를 피해간다. 가지의 영역, 뿌리의 영역을 서로 눈치껏 피하고 애먼 벌레가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쌉쌀한 향을 내뿜는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끼리는 서로 엉겨 붙어 연리지가 되고 만다. 만약 서로를 얼싸안은 나뭇가지가 하나뿐이 아니라면, 모든 나무가 서로를 둥글게 어깨 지고 견딘다면 어떻게 될까?
티토는 엉뚱한 질문을 떠올렸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갇힐 테지.
쇠붙이로 이룩된 생물이 멸족한 세상이다. 모든 철이 습기에 녹슨 세태에, 물을 마시고 자라는 것이 연립한다면 그 안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사람은…….
어디선가 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티토는 자신이 숨을 낮고 느리게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둔중하게 뛰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몸의 말단을 조정할 수가 없었다. 총을 쥔 손에 땀이 찼다. 언제부턴지 비가 내렸다. 왜 일어섰더라, 티토는 애써 고개를 숙여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도끼날로 깔끔하게 잘라낸 그루터기. 남자 하나 반이 낑겨 앉을 만큼의 넓이인데, 뭔가 비어 있었다.
이 공터는 그야말로 공허하다. 조금씩 오차가 있지만 거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뿌리 내린 나무들이 찬 달빛을 가로막고 있어서 안쪽에서 본 숲은 누덕누덕한 모닥불 색에 붉게 어그러지는 듯했다.
밤이 잿더미라면 저건 화재다.
나무가 벌겋게 웃고 있다.
티토는 누가 툭 민 것처럼 걸어 나갔다. 사람 사이를 밟고 다니다 동료의 짐 더미를 발로 채고 넘어졌다. 바닥이 무릎을 잡아먹을 것처럼 물렁했다. 콧등에 빗물이 떨어졌다. 장작에 붙어 간신히 펄럭거리던 불이 풀썩 꺼지더니 잉걸만 남았다. 티토는 재차 덮쳐오는 공포에 고개를 확 젖혀 하늘을 보았다. 점점이 눈에 띄는 별 조각 몇 개가 꼭 떨어질 것처럼 물광을 내며 번득였다.
그는 자전을 목격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사람을 뺀 모든 것이 움직일 참이었다. 결국 그는 아무도 깨우지 못하고, 적당한 가방을 챙겨 달아났다. 분명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떠났다고, 제 발로 거처를 박차고 나왔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선지를 고민한 날만큼 걸었고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무너지기 직전인 담벼락 아래 누워 익숙해진 불안에만 침잠했다. 그는 침묵하기로 했다. 무엇에냐면, 무엇이라고 짚기 힘든 그 모든 공포에. 언제나처럼 굴종은 편안했다.
그리고 여기, 압도적인 세계에 배를 까 보이는 남자가 하나 더 있다. 티토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담벼락과 바닥에 걸쳐 널브러진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정오인지라 티토가 숙인 만큼 조그만 그림자가 테두리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이제껏 이 남자가 시체라고 생각해왔는데, 며칠간 썩지도 않을뿐더러 새벽마다 나는 소리가 들짐승이나 부패음이라 하기엔 어설퍼 어쩌면 산 것이겠다고 생각한 참이다. 게다가 오늘은 남자의 얼굴과 드러난 가슴이 진흙으로 덮여 있었다. 티토는 그 반죽음과 간격을 두고 조심스레 앉았다.
“이봐.”
티토는 조금 당황했다. 목소리가 꼭 녹이 슨 것처럼 거칠고 흠이 나 있었다. 사람과 마주치지 않은지도 근 삼십 일이 되었으니 자신의 소리조차 타인의 것만큼 낯설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 그가 당혹스러워 머뭇거리는 사이 하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턱 밑에서 마른 진흙이 후드드 떨어졌다. 기이한 병색이 깃든 얼굴을 본 티토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뭐 하는 짓이야?”
“…볕을… 피하고 있어요.”
“나흘째?”
“날짜를 세는군요.”
자신을 깔보는 대답이라고 생각해 화를 내려던 티토는, 거뭇한 안색에 파묻힌 표정을 확인하고서 애써 입을 다물었다.
‘얼이 나간 거야.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 위험하지 않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안락한 판단에 어이없는 기분마저 들었다. 가시를 잔뜩 세운 채 지켜온 긴장감이 한순간에 탁 풀렸다.
티토는 남자의 옷깃을 잡아채고 자신이 만든 조막만 한 넝쿨 자리로 끌고 왔다. 서늘한 그늘에 몸을 누인 남자가 앓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장 정신을 잃었다.
하늘이 은신하고 있다.
하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누워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극도로 사실적인 천장화가 아니라면, 하늘이 옷을 지어 몸을 가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위로 꺾지 않아도 될 천신이 부끄러워할 게 뭘까? 오히려 머리를 들 수 없는 게 수치인가? 거대한 돼지처럼. 과연 천상은 우주의 가축인 것일까? 노골노골하게 풀린 몸으로 꿈결에 빠져 있던 하밀은 커다란 그림자가 시야를 뒤덮자 기겁하며 몸을 세웠다. 세우려고 했다. 급기야 하늘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만 하루 만에 깨어난 사람이 반가워 고개를 들이밀었던 티토는 하밀과 나란히 이마를 쥔 채 은신처 안을 뒹굴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니 넝쿨을 엮어 담과 이은 움막 안이었다. 하밀이 유심히 보던 것은 시들어가는 줄기풀이었고 집의 차양이자 위장복이었다. 하밀은 뭐라 이야기하려다가 이 살아남음이 놀랍고 우스워서 웃기 시작했다. 티토가 뾰족한 시선으로 하밀을 째려보는 와중에도, 하밀은 이까짓 일에 눈물이 난다는 게 기뻐 미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결국 한 대 맞았다. 뻣뻣한 승모근에 가해진 타격이 퍽 강력해 어깨가 탈골되었나 잠시나마 걱정해야만 했다.
팔뚝을 붙든 하밀을 흘겨보던 티토가 묽은 수프를 내놓았다. 두들겨 구부린 철붙이를 불에 얹고 약 성분이 든 풀뿌리에 군용 비스킷과 깡깡 말린 육포를 팔팔 끓여서 모조리 개 놓은 꿀꿀이죽이었다. 하밀은 올곧은 시선으로 티토를 잠시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티토는 타인이 건넨 음식을 흔쾌히 드는 하밀을 되레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티토가 턱을 괴고 바라보는 동안 하밀은 뜨겁고 뭉글뭉글한 건더기까지 마셔버렸다. 티토는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그 역겨운 걸 다 먹네.”
“……먹을만한걸요.”
“진흙보다는?”
“구더기보다는.”
티토가 진심으로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밀이 전보다 혈색이 도는 얼굴로 웃었다.
“이것 참…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드릴 것도 없는데.”
티토는 이게 값을 안 주려는 수작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았다.
“나도 알아. 그보다 말은 놓지, 존댓말 쓰는 거 이상해.”
“이상한가요?”
“아주 이상해.”
하밀은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티토가 뭐 그리 즐거웁냐며 볼멘소리로 타박했지만, 그마저 기쁜 듯 보였다. 티토는 하밀이 묻는 것마다 꼬박꼬박 답해주었으므로 투명한 저녁이 온전해질 때까지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람이 고픈 자들에게는 안전한 잠과 같은 시간이었다. 하밀의 선량한 목소리에 달가와진 티토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 남자는 진실 외에는 입에 바를 줄 모른다.
하밀은 아내와 헤어졌다고 했다. 언젯적 이야기인지 물어보니 모른다고 답했다. 수를 세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며. 해가 뜨고 지고, 날이 바뀌는 것이 망국의 풍습 같다고 말했다. “나라는 무슨, 전부 다 망했는데.” 티토가 투덜거리자 눈썹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티토는 맛없는 칡을 질겅거리다가 퉤 뱉었다. 말라비틀어져 더는 쓴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밀이 기운을 차린 듯 넝쿨을 젖히고 주섬주섬 일어섰다. 티토는 하밀의 넝마 자락을 붙잡으려다가 애써 손을 거두었다. 하밀이 말했다.
“불을 더 지필 건가?”
“…아니. 내버려 둬.”
“달이 뜨면 금세 추워질 텐데….”
“아까는 왜 그런 거야?”
젖은 나뭇가지를 든 하밀이 티토를 돌아보았다. 눅눅한 풀줄기로 지은 발 뒤에서 티토가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벗은 발등을 만지면서. 하밀은 문득, 저 몸이 약하고 질겨 물기가 마르면 부서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런 몸으로…견뎌온 걸까. ‘불길을.’ 하밀은 긁어모은 장작을 그대로 내려두었다.
티토는 이가 빠진 칼날처럼 다루기 힘들어 뵈는 표정으로 하밀을 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금 물었다.
“몸에 진흙을 바르고 있었잖아.”
“그건… 해를 막으려고. 또, 불타지 않으려고.”
“자연발화 말이지?”
“그것도 그렇지만.”
하밀이 잠시 말을 숨겼다. 그는 텁텁한 구름 지붕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드물게 자기 자신을 견제하는 투였다. 티토는 그가 무언갈 의심할 줄 몰랐기에 조금 놀랐다.
“자네는 나무가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나?”
“있지. 매일 다르게 자라서 뭐든 덮어버리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상타 할 만큼 압도적으로……보이도록. 하밀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더 설명하지 않았다. 티토는 질문을 곱씹어보았다. ‘나무가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나?’
있다.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도망쳤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말해도 될지는 미지수였다. 어째서인지 티토는 하밀이 ‘그쪽’일지도 모른다고, 붉고 압도적인 나무의 편에 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밀은 어딘지 인간보단 눅눅한 풀줄기 같은 면이 있었다. 시들어가는, 말라붙지는 못한 무언가. 냉장고에 오래 두어 상한 냄새가 나는 나물 반찬처럼…. 결국 티토는 본 적 없어 그런 거, 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밀은 안심한 듯이 벌쭉 웃었다.
“다행이다. 보지 않는 게 낫네.”
“당신은 안다는 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다지 말하고 싶지는 않아. 끔찍한 것이거든.”
“어째서? 문명귀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인간 같지 않은데, 당신은.”
“발화점 말이야. 대체 어디쯤일까 생각했었어.”
“또 딴소리.”
“미안하네. 하지만 조금 들어 주어. 이상하잖나, 이 습하고 더운 열대를 도깨비가 다닌 것처럼 불이 붙는 나무란 것은. 게다가 그것들은 전부 뿌리가 있었단 말이야.”
“어떻게 아는데.”
봤으니까, 라고 하밀은 말했다. 그게 아주 당연하다는 투였다. 티토는 군에 있을 때 불붙은 나무를 조사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뿌리를 내렸는지, 살아서 죽었는지 아니면 죽어서 불이 났는지를 알아본 적은 없다는 걸 떠올렸다.
“물방울이 타는 것처럼 이상해서…… 불이 나면 달려가서 지켜봤어. 그랬는데 그건…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러고 있었지. 불이 나무에 닿은 게 아니라, 나무가 불씨를 피워내더군.”
“자연발화란 게 다 그렇잖아, 원인을 모르지.”
“하지만.”
불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하밀은 꽉 찬 주머니를 더 닫지 못하듯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실수했다는 눈을 했다. 티토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긁어 흙을 가득 쥐었다. 하밀이 침묵을 밀어내며 넝쿨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나란한 옆으로 무릎이 닿았다.
이 이야기를 믿나? 하밀이 물었다. 그치고는 은근한 목소리였다. 믿지 않아. 티토가 대답했다. 맞아. 거짓말이었네. 보답으로 해줄 것이 이야기밖에 없어서. 당신을 믿지 않지만, 나도 아는 게 하나 있어. 하밀은 무어라 조르지 않았다. 그래서 티토는 말해버렸다.
“나무 열두 그루가 사람을 유인해서, 잡아먹으려고 한 적이 있어.”
“본 건가?”
“당했지.”
“많이 다치지는 않았고?”
어딘지 엇나간 대답이었다. 티토는 하밀을 흘겨본 후 조금 편해진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한 그루는 누가 베어낸 후였어. 남아 있는 그루터기가… 그때도 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이테가 없어. 끌어안기 힘들 만큼 밑동이 두꺼웠는데도.”
하밀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티토는 너무 겁을 주었나 싶어 옆을 돌아보았다. 하밀이 발을 앞으로 쭉 뻗고 넝쿨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멍이 큰 그물처럼 어설피 엮은 풀줄기 안으로 언제부턴지 뿌연 빛이 닿고 있었다. 먼지가 쌓인 창문 같은 희멀건 우윳빛 달이 떴다.
“부인은 떠나기 전에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땐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로 들렸네.”
“지금은 달라?”
“바로 이걸 말한 게 아닌가 싶어.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지. 자네가 겪고… 내가 본 것들을.”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살아야지.”
“이래도, 계속?”
“그래. 계속.”
이제 잘까, 하밀이 덧붙였다. 긴 얘기가 끝났으니 촛불을 불어 꺼야 마땅할 것 같았지만 그만한 기름불은 없었다. 티토는 다 죽어가는 깜부기숯을 보다가 망막에 탄 자국이 남을 때쯤 눈을 감았다. 누군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티토는 목을 헐게 할 노래 따위는 부르지 않으니 누구일지 자명했다. 그는 이 맥없는 인간이 내일도 남아 있기를 바랐지만, 눈꺼풀보다 입이 더 무거운 탓에 말을 하지는 못했다. 하밀에게는 이보단 실없고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자기 직전에야 간신히 떠올랐는데 그것은 연가였다. 직접 들어본 적은 없어도 보통 여인이 자장가로 부르는 곡이었다. 티토는 문득, 자살하는 숲과 빨간 덫과 멀건 달과 맥아리 빠진 노랫소리 중에 어떤 꿈을 꿀지 궁금해졌다. 그때 고양이가 불도깨비처럼 힘껏 부르며 우짖었다.
밤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