ㅈㅇ님
사과를 먹으며 우울을 극복하고 생존 의지를 다지는 장면, '나는 살아서 새벽을 맞을 것이다', 독백 위주, 다 먹고 남은 사과 뼈다귀 키워드로 작성했습니다!
썩은 흙과 나무 냄새가 코끝을 때린다. 가네트 바넷은 허리를 굽혀 막사 문을 들어 올리면서 동시에 인중을 긁다가 머리를 바닥에 찧을 뻔했다. 비틀거리며 자세를 갖춘 그는 음습한 숲을 헤매는 기분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불성설이다. 이번 전투지인 발름 평원은 사방이 훤하게 뚫린 지루한 곳이었으니까.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서 오크 냄새에 시달리는 까닭은 값싼 럼 때문이었다. 질 나쁜 통에 숙성시킨 술은 단맛이 강하게 났고 목을 거칠게 긁는 만큼 도수가 셌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전장 막사에 보내져 오는 고급진 물건을 제외하면 이만한 술에 취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보급품으로 들어오는 증류주는 물을 섞어 시큼하고 후유증이 강한데, 개중 부상병들에게 지급되는 럼은 질 낮은 대신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함으로 매우 독하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이 사실을 갈취하다시피 한 가네트는 곧장 술병을 약탈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마음이 아프시다 마음이.” “수작 부리지 마십쇼, 경.” “아 진짜 아프다니까.”) 의무관은 피에 젖은 수건을 추스르며 벌써 나라를 잃은 듯한 피로한 얼굴을 했다. 가네트는 단지 핼쭉 웃어주었다. 그는 실제로 나라 잃은 병사들을 알고 있었다.
대체로 목숨과 함께.
평원에서 벌어지는 난전은 자칫 길어졌다간 양쪽 모두 피만 보게 된다. 뮤터 왕국 측은 이미 패기를 느끼고 있던 탓에 등 털을 곤두세운 들짐승처럼 옹송그린 채 반격의 순간을 엿보았고, 아스라이 비치는 승리를─상부에 따르면, 피해를 최소화하며─잡아채야만 했던 제국은 전장을 단번에 휘어잡을 기회를 노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종종 암습의 징후가 밝혀졌다. 첩자임이 확실한 청년들은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덜미가 잡혔다 싶으면 곧장 약을 깨물고 자진했다. 첩자 질이 성공한 적은 (적어도 여태까지 아는 한은) 없었고 이대로 가며 갉아 먹히는 건 뮤터일 확률이 높았지만, 백작가 후계가 아닌 한 기사로서, 가네트는 차라리 누구 하나가 죽어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으면 싶었다. 싸움이 있든 없든 사람은 고통을 당했고 후자에 처한 이들은 쓸모없이 목숨을 소진해가는 듯한 나약한 두려움마저 호소했다.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느려졌다. 명령을 받드는 복된 전사이면서 휘하에 병사를 둔 가네트에게 느릿한 풍경을 거느리며 걷는 것이 하나의 괴로움이었다.
의무 막사는 직전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달고 온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수족 하나가 잘려 나갔거나, 잘라내야 할 처지는 차라리 다행스러웠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내상을 입어 독주로 연명하는 이들은 호흡보다 신음이 밭았다. 가네트는 매일 밤 긴장한 채 전운을 기다리면서도 나직하게 흩어지는 부상병들의 통곡을 들었다. 개중에는 갓 성인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년들이 몇 섞여 있었다.
비명을 지르느라 상한 목소리만큼, 그들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있으나 없으나 한 목숨으로 여겨지며 전장에서 싸운 청춘의 기억은 아마 표창으로 남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살아 남든, 어디 하나가 모자라진 채 돌아가든 평생, 말발굽 소리에 경련하며 변두리 술집에 인생을 바칠 테지. 노련한 중견에게서 그러한 예후를 들은 뒤로 가네트는 소년들에게 무작정 들이닥쳐 공놀이나 칼놀이를 하잡시고 덤비고는 했다. 유력한 계급 차에 얼어붙던 이들이 나중 가선 익숙해진 듯 투덜거렸다.
“제 몫인 럼주가 목적이시죠?”
“섭한 소리를. 그래서 안 할 거야?”
내기. 가네트는 무게가 잘 잡힌 단도를 던지고 받았다. 살상에 쓰이지 않는 장식 검이었으나 혹시 모를 때에 눈이라도 찌르라며 기본은 잡아 놓은 것이다. 이 값진 칼은 여기서 사과를 꿰뚫는 장난감으로 쓰였다.
그럼 내가 하지, 라며 던진 단도가 둥근 의자 파편을 튀기고 나무에 박혔다. 가네트는 혀를 차며 소년에게 턱짓했다. 가서 뽑아오라는 거였다. 과연 힘은 좋았는지 칼을 뽑을 때는 발까지 써가며 낑낑거려야 했다. 소년은 한숨을 쉬며 돌아서다가 쓰러진 의자와, 흠집 하나 없는 새빨간 능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독기 어린 눈으로 손에 든 칼을 쏘아보았다.
가네트가 다가갔을 때 소년은 세운 의자에 칼을 내려놓고 사과를 박박 닦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그 애가 과실을 와작 베어먹었다. 기사는 눈을 휘둥글 뜨며 버릇없는 등짝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야!”
“아! 이거 진짜 아픕니다!”
“그걸 먹으면 어떡해! 내가 몰래 따오는 거 몰라?”
“몰랐지만 이제 몰래는 아니네요.”
“왜 그런 거야?”
왜냐니.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년은 침통해졌다가, 또 퉁명해져서 한 입 베어 먹힌 사과를 건네주듯이 던졌다. 가네트는 손바닥만 한 능금을 쉽게 잡아채고 도로 던졌다. 너나 먹으라는 태도에 소년은 질렸단 듯이 상한 과일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가 칼을 쥐고 돌아가며 뇌까렸다.
“보세요.”
가네트가 물러서자,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온 칼이 사과를 맞추고 함께 굴러떨어졌다. 베어먹은 부분에 흙이 묻어 지저분해졌다. 가네트는 잠시 거기에 시선을 주다가 아직 자리한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말했다.
“맞았습니까?”
“깔끔하게!”
“어떻습니까?”
어떻냐니, 뭐가? 애매한 질문이었다. 가네트는 대답 대신 떨어진 사과를 주워서 칼을 회수했다. 깨끗한 날에 과즙이 엉겨 신 냄새가 풍겼다. 떨어져 선 소년이 다시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당연하지!”
웃음소리.
“제 술 다 드십시오!”
그 애는 다음 날 새벽 죽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찾아갔더니 이미 자리가 정리된 후였다. 소지품은 모두 나누어주었다며, 송장을 확인하겠냐는 물음에 가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서야 소용없는 일.
살아남겠냐고 물을 제에 그 애 얼굴은 어땠을까. 거리가 좀 되는 데다 햇살이 각도 나쁘게 기울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웃는 소리가 들렸으니 웃고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게 대체 어쨌느냐는 말이다. 시신은 습하고 누운 자리는 추깃물에 젖어 기분 나쁘게 차가울 텐데.
가네트는 새삼 막사 내부를 돌아보았다. 처치를 받는 자가 신음하는 소리. 더는 줄 수 있는 게 없어 방치된 병자의 파리한 낯…… 이게 정말…… 벌건 대낮이 맞느냔 말이다…….
이제 나에게는 소년이 없다.
우리에게는 정녕 단 한 명의 소년도 없으므로…
적진은 여태 잠잠했다. 터덜터덜 돌아간 가네트는 테이블 위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과 한 알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에는 정말로 눈과 입이 하나씩 있었다. 베어 먹힌 외눈은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있었고 칼날로 째져 겨우 붙은 턱주가리가 간신히 윗동을 지탱했다. 기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로부터 내내 술이 필요했다. 꼭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는 것처럼.
가네트 바넷이 눈을 떴다. 눈꺼풀이 구겨질 만큼 꽉 다물고 있던 탓에 눈가가 뻐근했다. 어질어질한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보인 건, 놀랍게도 새붉은 능금 하나. 한 알이라기에는 어딘가를 잃은 채인, 외눈과 턱이 있는 괴물 같은 과실이다. 어쩌면 저건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취기가 이는 바람에……분간 못 하고 있는지도. 그러나 이상한 일이지. 우리에겐 소년이 없는데도 왜 소년이 베어먹은 사과가 놓여 있는 것일까? 그런 건 말이 안 돼.
비틀걸음으로 다가간 가네트는 숨을 훅 내쉬었다. 미간 근처 머리칼이 휙 오르내렸다. 그는 테이블을 실수로 걷어차지 않도록 두 손으로 내리누른 채 사과 꼭지를 쏘아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과 코 깊은 곳에서 불쾌한 오크 냄새가 솟았다. 피가 몰린 탓인지 눈물이 떨어졌다. 감각이 둔해질 만큼 취기가 심해서,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히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가네트는 입술을 깨물고 테두리가 갈변해가는 노란 과육을 정말 밉다는 듯 내내 보았다. 그러다가 심술 난 아이처럼 잡아챈 과일을 꽈득 씹어먹었다.
술처럼 달고 시큼한 맛이 났다. 며칠간 공기에 드러난 부분부터 숙성이 된 거겠지. 즙이 풍부해서 입가가 자꾸만 젖었다. 과육은 으슥으슥 씹혔고 껍질이 질겼다. 공들여 씹어 삼키면 혀가 오소소 떫어 왔다. 이 짠맛도 과일의 일부일까? 그러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네트는 사과를 전부 씹어먹었다. 혀끝까지 알딸딸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혓바늘이 돋겠지. 그건 늘 쏘는 것만 같았던 소년의 목소리를 연상케 해서, 어울리잖게 웃음이 났다. 쓸데없이 전투적으로 먹어댄 탓에 턱이 아팠고 과실은 뼈다귀만 앙상해졌다. 공격하듯이 먹어 치운 후에야 과일 속에 있던 씨앗 자리가 드러나 보였는데…우는화살 촉처럼 알알이 둘러 박힌 절묘한 모습이었다.
그는 탁자 테두리를 잡고 쭈그려 앉아 신기하다는 듯 씨앗을 뜯어보다가 하나 입에 넣어보았다. 눅눅한 껍데기가 부서지며 밀랍을 씹는 아늑하고 몽롱한 식감이 이어졌다. 맛없었다. 들척지근한 입안에 부서진 사과 씨를 담고 있던 가네트는 몇 번 퉤퉤 거린 끝에 씨앗을 뱉어낼 수 있었다. 입술이 저릿하게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였으므로 꽤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크게 훌쩍인 뒤에, 양손으로 얼굴을 비벼 울적한 물어림을 지웠다. 다음 순간 바로 뜬 그의 두 눈동자가 추수철 아침의 하늘처럼 맑고 새파랬다.
아직 머리가 해롱거렸지만, 정신이 점차 개었다. 우리에게는 소년이 없다. 그런 것을 지켜낼 필요가 없으므로 전장은 어린애와 노장을 구분 않는다. 우그러진 철모를 쓴 이는 모두 병사다. 하지만 내게는 소년이 베어먹은, 내가 먹어 치운 과실이 있다. 우리에게는 소년이 없는데도…그게 어쨌단 말이냐!
나도 젊다!
우리는 살았다. 이것이 전장의 법칙이라면 마땅히 받아낼 것이다. 전쟁이 명예를 요구한다면 반드시, 내가 먹고 뱉은 씨앗을 보여줄 것이다. 그 내일을 위해 살아남아서 오늘 새벽을 맞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토해내야 하느냐고 묻지 않겠다. 나는……갈변한 목숨을 업은 자.
가네트 바넷은 뱃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슬슬 먹은 걸 게워낼 때가 된 모양이었다. 요 며칠을 그렇게 보낸 그는 뜨악하며 당장에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안에 토사물을 묻혔다가 밤새 고약한 냄새를 견뎌야 했던 기억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과 한 알. 하나?
과육을 잃어버린 씨앗이 남았다.
그것은 아기 팔뚝보다 자그맣고 눈도 턱도 발라내어 앙상했는데 방금 먹어 치운 덕분에 조금 붙어있는 살이 물기 어린 금빛으로 말갛다. 입에 넣고 굴리면 새큼한 맛이 날 것 같았다. 말라 비튼 꼭지가 달려있어서 꼭 몽당양초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이 붙어 주변을 밝혀줄 리는 만무했으나. 막사 주인이 진지 주변을 마구 달리는 동안 그것은 허전한 무게에 어안이 벙벙한 혼령처럼 안을 지켰다.
일주일 후, 사납게 갠 하늘을 찢으며, 효시가 울려 퍼졌다. 높새바람이 소용돌이를 이루는 이 땅에서는 원한조차 땀 냄새를 못 견디어 말라붙고 말리라.
그러면 언젠가 몇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