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ㄴ님
레진 코믹스 웹툰 〈불멸의 날들〉 주인공 멸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였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이라 쓰는 게 즐거웠어요~
저가 빙과류 할인판매점이 사라진 자리에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점포가 새로 생겼다. 한 달만의 일이었다.
가게 외관은 네온사인과 전광으로 번쩍번쩍한 일반적인 프랜차이즈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레이스 양산 같은 걸 팔 것 같은 하늘하늘하고 고급스러운 외관이었는데, 고풍스러운 직물을 연상케 하는 크림색 벽과 반짝임을 곁들여 넣은 정도로만 장식한 금빛 소품, 짙은 나무 격자를 끼운 유리문 안쪽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분홍 글씨가 적혀 있었다. ‘OPEN: AM 09:00~PM 08:00’. 세워놓은 칠판에 마찬가지 진한 분홍색 흘림체로 써넣은 문구. “사랑스러운 맛!” 멸은 가만히 서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은?”
“안 샀는데요?”
“뭐? 왜?”
“많이 비싸더라고요.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마치 심부름을 맡겨놓은 양 굴던 필이 책상 위로 늘어뜨렸던 팔을 내렸다. 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너 이제 여유롭잖아?” 멸은 잠시 청소를 멈추고 걸레 밀대를 붙든 손등 위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 개어 놓은 카펫을 보며 월세와 생활비, 보험회사로 빠져나갈 돈, 아플 때 사용할 최소한의 비상금, 교통비, 쥐꼬리만 한 적금, 다 갚아낼 수 있을지마저 요원한 빚을 떠올렸다. 미래가, 당장 내일이 쉬워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멸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렇지만도 않아서.”
“상위구역에서 유명하던 데야. 이번에 이쪽으로 2호점을 냈나 본데. 다시 가면 사람들 와글와글할걸?”
“진짜요?”
“먹고 싶지 않아?”
말하며 필은 짓궂은 얼굴로 카드를 흔들었다. 멸은 대강 손사래 쳤다.
“이 더위에 다시 다녀오라고요? 됐어요,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난 먹고 싶은데?”
“잘 다녀오세요. 전 딸기랑 초콜릿 중에서는 초코요.”
치열한 가위바위보가 벌어졌다. 경쟁적으로 임한 결과 멸은 주먹, 필은 보자기를 냈다. 속임수 아니냐며 내뻗은 주먹을 흔드는 일련의 사건이 진정된 후 패배한 멸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나오게 되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보도에 짙게 드리워진 마지막 그림자 아래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로 먹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줄을 서가면서는. 바로 옆에 자주 가는 수제 아이스크림 집도 맛이 나쁘지 않으며 심지어 더 값싸다. 필이 자신을 곯리려는 수작이라는 생각만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좋아, 제일 인기 없는 거로 사다 줘야지. 굳은 결심 후 멸이 길을 나섰다.
날이 몹시 더웠다.
습도가 높지 않았는데도 피부가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땀이 흐르는 탓이다. 서로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표정이 나빠질 만한 작열감. 불판 위에 올린 고기를 대충대충 뒤집는 손길처럼 인정 안 봐주는 태양에 멸은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건물 곁으로 비어져 나온 그림자들은 급기야 피멍 같은 보랏빛을 띠었다. 존재를 전제시켜주는 강렬한 빛을 견디지 못하는 그림자로서 자신이 한심하다고 여기는지 좁게 움츠리기까지 했다. 멸은 점포 차양으로 걸어 다니며 연명하려던 얄팍한 수를 버려야만 했다.
거의 익어버리기 직전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줄은 없었다. 들어서니 피부를 때리는 에어컨 바람과 채도 낮은 그늘이 덮쳐왔고, 멸은 지끈지끈하고 기분 좋은 흉통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기온 차이를 겪자 심장에 맺힌 열기가 느껴지며, 눈앞이 녹색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돌처럼 달구어진 몸이 식고 난 다음에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멸은 몸을 숙여 아이스크림 진열대를 바라보다가, 깨끗한 유리 돔에 손자국을 낼 뻔하고는 약간 조심스러워졌다. 유리에 반사광을 덜 만들기 위해 매장 안은 최대한 자연광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조명이라고는 홀 중앙에 매달린 샹들리에 두어 개와 카운터 뒤의 간접조명뿐이었다. 오히려 진열대 안이 더 밝고 화사해 보였다. 어디 보자… 시그니처는 믹스베리… 멸은 모호한 표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덟 종류 정도 준비된 아이스크림 중에서 시그니처 다음으로 통이 제일 비어 있는, 그러니까 많이 팔린 것 같은 메뉴는 견과류가 들어간 초콜릿이었다. 아몬드와 다크초콜릿 칩이 잔뜩 섞여 있는데 흰 우유에 초콜릿을 녹여 연한 마블링을 만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전형적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려도 그것뿐이었다. 비싼 아이스크림은 좀 다른가?
가격은 시그니처보다 비쌌다. 멸은 잠시 다른 메뉴를 보았다. 그린티요거트, 헤이즐넛, 망고바나나, 콘앤차콜…… 차콜?
“저, 이건 뭔가요?”
멸이 ‘콘 앤 차콜’이라고 쓰인, 스쿠프로 두어 번 퍼낸 자국이 나 있는 잿빛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김이 나는 커피머신 뒤에서 움직이던 점원이 흘긋 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옥수수랑 숯이요.”
“네?”
“맛있어요! 달아요.”
아이스크림이니까, 당연히 달지 않을까? 멸은 간신히 마주 웃어 보였다. 점원은 상쾌하게 방긋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음료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콘앤차콜은 망고바나나와 함께 저렴한 메뉴였다.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혼자 주억거리고는 주문했다. “초콜릿, 싱글 콘으로 주세요.” 물론 ‘전형적인 초코’ 는 아니었지만, 초콜릿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하나뿐이었으므로 점원은 쉽게 알아들었다. 멸은 결제할 때에 조금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별것도 아닌데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이런 사치재라니.
지금이라도 소장님 카드로 긁을까. 아니다.
이왕 부리고 싶은 사치인데, 다른 사람 돈이면 소용이 없지……. 짧은 순간 멸의 이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쳐 지나갔다. 점원은 두 손으로 쥐어야 할 만큼 큼지막한 콘에 아이스크림을 몇 스쿱이나 꾹꾹 눌러 담아 주었다. 매장 안이 시원한데도 진열장에서 나온 순간부터 아이스크림 표면이 사르르 맺혔다. 멸은 투박하고 성가시기까지 한 외관을 보며 당황하다가 앉을 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커다란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걷다가는 뜨거운 날씨에 줄줄 녹아내릴 것 같았다. 먹고 가야지.
많지 않은 테이블은 모두 차 있었고, 사람들은 유아차를 세워두고 있거나 나이대가 엇비슷해 보이는 일행과 함께 앉아 있었다. 멸은 홀로 앉으며 조금 머쓱하게 목덜미를 훔쳤다. 땀이 다 말라서 살갗을 만지는 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별생각 없이 아이스크림을 입가에 대고 크게 물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저민 아몬드를 헤치자 우유와 초콜릿이 비스듬하게 느껴졌다. 완전히 뒤섞이는 대신 손을 잡고 소용돌이를 그리는 듯한 맛. 게다가 골을 당기는 느낌 없이, 상냥하리만치 부드러웠다. 딱 좋은 정도로 시원해서 혀가 굳지 않았고 맛을 느끼기가 편안하다. 아기가 핥아먹어도 무르게 무너질법한 질감이었지만 얼음이 소금처럼 얼어 비어 있는 부분 없이 우유와 당분만이 밀도 있게 씹혔다. 오독오독 소리를 내며 쌉싸름한 초콜릿 칩이 씹히고, 그리고 입안에서 두어 번 굴리면 삼키지 않아도 절로 넘어갔다. 멸이 가끔 사 먹던, 느끼하고, 시럽과 토핑 맛에 의존하며, 어쩐지 사박사박 씹혀서 입안에 오래 남아 다 먹고 나면 찝찝해지던 아이스크림과는 이름부터 다른 음식인 것 같았다. 맛이 있는 걸 넘어서서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에 멸은 불쾌한 날씨마저 잊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어 문 자국이 남은 콘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콘이 손에 닿는 느낌도 평소에 먹던 것과 조금 달랐다. 맛은 담백한 비스킷 같았고, 양을 많이 담기 위해서인지 두껍게 말아 구웠는데도 텁텁한 밀가루 냄새가 오래 남지 않았다.
멸은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파트타임 근무를 할 때 신속하게 구워내던 콘을 회상하면서 아이스크림을 살짝 핥아먹었다. 이런 걸 만들려면 엄청 힘들겠다. 교육을 오래 받으려나, 시험도 치고.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불쾌지수는 착실하게 날아갔다. 테이블에 팔꿈치까지 올린 채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바삭바삭한 과자를 함께 베어 물면서, 멸은 무심코 생각했다. 필과 일하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힘든 사치였겠지. 약간의 목숨값이라고 해도… 재계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예전처럼, 외곽 공장이나 서비스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두 자릿수는 간단히 넘어가는 이력서를 넣는다. 하루 여덟시간 규정 근무를 마친 후 ‘스스로’ 한 시간쯤 연장근무를 하거나, 돈과 시간이 아깝다면 삼 교대 로테이션 근무로 이주에 한 번씩 밤낮이 바뀌는 리스크를 감수한다. 사실 낭비되는 시간은 둘이 엇비슷하고 교대근무는 몸만 더 축낸다. 다들 좀 피곤해지기만 하지 과로를 한들 죽지는 않으니까. 블루칼라 직종은 몸에 익기만 하면 피로에 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고. 하지만 나는 해당되지 못하는 효율이니 건강을 갉아먹는 근로를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다. 처음 일을 구할 때, 시간이 곧 돈이니 뭐라도 아껴보겠답시고 야간에 도전했다가 골골 앓았지. 그러니까 어느 정도 불이익은, 불합리는 참아가면서… 주5일 비실비실한 맛이 나는 점심을 후다닥 해치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피해 냉방기가 돌아가지 않는 창고에 멍하니, 홀로 앉아 있는다.
내가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감수해야 하는 것들. 제법 견딜만하지만, 선택지가 있다면 절대로 견디고 싶지 않은. 나의 오랜 일상. 겨우 몇 개월 전인데 끔찍스러운 과거로 느껴져 멸은 헛웃었다. 몸이 살짝 들썩이자 콘을 쥔 손가락에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렸다. 그는 무심코 손가락을 쭙 빨았다. 자연스레 올라간 시선에 창밖의 풍광이 들어왔다.
안에서 목격한 바깥은 더위마저 황홀하다. 그는 무심코 길가를 샅샅이 훑다가 슬며시 웃었다. 이런 날에는 산책하는 개를 보긴 힘들다. 보여서도 안 되고. 발바닥에 화상을 입고 마니까.
멸은 필과 함께, 값이 싸서 밀가루 맛만 나는 조그만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각각 해열제 냄새가 나는 딸기와 멀미약 같은 맛의 바닐라를 핥으며 프리스비를 하는 개들을 구경하던 때를 떠올렸다. 쾌청한 날씨인 데다 새파란 잔디밭은 모래나 돌처럼 뜨겁지는 않아서 개들은 뙤약볕을 기꺼워했다. 멸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치던 눈길을, 아주 잠깐 당황하지만, 곧 씩 웃는 표정을 생각한다. 내색한 적 없지만 필과 있을 땐 보통 그렇다. 항상 주시당하는 느낌.
그와 있을 때 내 일상을 보전할 수 있다면, 그는 나와 있을 때 뭘 기대하는 걸까. 다른 말로, 내가 없으면 뭘 잃는 걸까? 우정. 소속감? 그런 건 꼭 이 방식이 아니어도 되잖아. 이해?……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해.’ 그게 불멸자와 불멸자, 필멸자와 필멸자 간이라고 해도. 우리의 다름은 서로를 화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같은 곳을 보지 않는 것처럼, 내가 보는 걸 무시하고 내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훔쳐보는, 이해하기 힘든 당신의 눈길을 언급할 필요 없다는 이유로 말 꺼내지 않는 나처럼.
신뢰는 늘 어렵다. 멸은 뚝뚝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을 두 입으로 해치우고 손을 털었다. 그러고는 입안에 가득 찬 과자를 곤란해하면서 열심히 우적거렸다. 생각해보니 필에게 가져다줄 것도 사야 하고, 그러려면 주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입에 뭔가를 가득 넣고서야 떠올리다니! 그러나 간식거리를 잔뜩 욱여넣고 먹는 기분은 썩 좋았고, 또 콘만 씹는데도 진한 옥수수 맛이 느껴져서 멸은 자신의 먹는 버릇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필 몫의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는 건 간단했다. 콘 앤 차콜도 꽤 맛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직원 추천이니까. (좀 짓궂은 감이 있긴 해도, 심부름 복수 같은 건 아니었다. 멸은 옥수수 전분이 든 콘과 옥수수 맛 아이스크림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드라이아이스가 든, 물방울이 맺힌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멸은 심호흡했다. 입안에서 견과류 맛이 느껴졌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수상스러운 고용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현기증이 돌 만큼 달콤한 더위 속으로…….
필은, 하고 많은 메뉴 중 굳이 옥수수에 숯 맛을 가져온 멸에게 짜증을 부렸으면서도 맛을 보더니 귀여운 노란색 스푼을 물고 고민했다. 반 통 남은 아이스크림은 냉동실에 고이 보관되었다. 멸은 입안이 새카매졌을 필에게 말을 걸려고 노력해보았지만, 필은 언짢은 표정으로 욕실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곧 맹렬한 양치질 소리가 들려와 멸은 소파에 엎어져 웃었다.
멸이 퇴근할 즈음엔 낮의 열기는 과장된 회상일 뿐이라는 것처럼 날이 수그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