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ㅂ님
자캐커플 써드렸습니다~ 비 오는 날 크림커피를 마셨어요!
도노반 밀러는 우산을 접은 채 미니메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마 끝에 맺히던 보슬비가 꾸준한 기세를 멎지 않아 낙숫물 떨어지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소매를 들추어 손목시계를 살폈다. 약속시간에서 십 분이 좀 넘어가고 있었다. 늦는 건 그다지 상관없고, 미니메이에게 사고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도 부질없었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정에 어떤 문제가 벌어졌는지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령 차 사고가 났다면 보험사가 오기까지 미니메이가 일을 쉽게만 처리할 거라고는…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미니메이에게 온 전화였다.
“메이?”
- 나 가고 있으니까 거기서 딱 기다려요!
그리고 전화는 뚝 끊겼다. 도노반은 허허로운 마음으로 빈 배경 화면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런 종류의 연락은 대체로 이쪽 처지에서 해야 할 터고… 실제로 도노반은 걱정스레 묻는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아니면 문자라도. 요란하게 연락하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상황이 아니라면 문자메시지에 답장할 테니까.
멀리에서 미니메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고서. 도노반은 얼른 우산을 펴고 나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미니메이를 받았다. 미니메이는 도노반의 팔에 덜컥 의지한 채로 씩씩거렸다. 촉촉하게 젖은 흰 이마와 머리카락, 물방울이 짓친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원피스가 평소답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싶어 도노반은 가만히 기다렸다. 거기에 더 골이 난 미니메이는 결국 버럭 소리 질렀다. (그는 분명 차분하게, 직접 만나, 제대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겠다 결심했었다.)
“도노반!”
발칵 성을 내는 목소리에 도노반은 되려 침착해졌다. “미니메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여기에서 ‘그런다’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가 도노반에게는 많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게 차분해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렇게 우산도 없이 달려오고… 나나는요?”
“당신은 나나밖에 몰라요?”
“그게 아니라. 나나를 귀가시키고 오는 길이니 혹시나 해서요.”
“혹시 다른 여자 생겼어요?”
그나마 예상해본, 하고많은 말 중에, 금시초문이다 못해 상황에 맞지 않게 뜬금없기까지 한 소리였다. 도노반은 애써 당혹을 숨겼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물론 이 멸렬한 대꾸에 그녀가 만족하진 못하리라.
“도미닉은 당신이 요새 다른 여자랑 붙어 다닌댔어요! 어린 후배라면서?”
그 문제였군. 도노반은 탄식처럼 이해했다. 도미닉에게는 그다지 악의 따윈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늘 미니메이의 사고력을 간과한다. 도노반은 최근 A급이 되었다는,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한 탓에 힘을 제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던 어린 대원을 기억해냈다. 이 나이 때면 다 그러겠지만 겨우 스물을 넘긴 나이가 지나치게 위태로워 보여서 얼마간 조언을 주었고, 그 애는 새 학기에 반이 바뀌어 곤란을 겪는 전학생처럼 도리 없이 의지했다. 본래 그러한 성격은 아닐 것 같기에 도노반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서로 또 데면데면해지리라고 예견했다. 드물게 확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숙달된 예견과 미니메이의 불타는 염려는 결이 다르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도노반은 갑자기 힘이 빠지는 기분에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미니메이의 빨간 코끝을 보다가 말했다. “걱정할 만한 관계는 아닙니다. 제가 답지 않게 선생 노릇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도미닉이 후배라고 한 거죠.” 올바른 처신인지 알 수 없었다.
미니메이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도노반은 주의를 집중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 가족은… 우리잖아요!”
어디서부터일까.
“맞아요.” 나의 집은….
이 비가 시작되는 지점은. 도노반은, 지금 당장 천둥이 치고 벼락이 내리꽂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지 않았고, 대신 안도했다. ‘이건 평범한 일이군.’ 그런데 어디서부터, 이 생경한 물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는지, 그는 오래전에 쌓아둔 얕은 둑이 스르륵 무너진 모습을 발견한 기분으로 눈을 크게 뜨고 미니메이를 보았다. 미니메이의 얼굴에 물방울이 맺혔다. 분을 못 이겨 흐른 눈물인지도.
그는 우산을 더욱 기울여서 미니메이를 감쌌다. 머리와 목덜미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그와 그의 부인이라고 할지라도 다를 건 없을 테니까. 도노반은 가슴이 선뜩해진 이유를 이해할 때까지, 그리고 미니메이가 진정할 때까지 단순히 기다리기로 했다.
사랑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미니메이는 골이나 얼굴이 망가지는 것을 느꼈다. 비를 한껏 맞고 달려와서 꼴도 말이 아닐 텐데 거기에 표정 관리도 못 한다니. 게다가 비는 점점 더 거세지기만 한다. 우산을 팽개치고 달려온 게 후회되고 있었다.
결국 이쪽이 패배한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늘 사랑이 쟁취, 라고 생각했고 도노반 밀러와의 관계에 적용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혈기를 완전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본래 생기란 그런 것이다.
나나를 하원 시키고 도미닉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타코벨 내부 소음과 약간의 취기를 동반하고 있었다. 느지막이 점심을 때우며 맥주를 좀 걸친 모양이지, 어쩔 수 없는 동생이라 생각하며 미니메이는 연장자의 배려를 발휘해 캐묻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우울한 낮에는 술 좀 마셔줘야 하지 않나? 맥주는 거의 음료수에 가깝지. 그런 경쾌한 기분으로. 어쩌면 도노반과 오붓한 바에서 칵테일을 마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도미닉이 소식을 물어다 준 것이다: 매형 요새 좋아 보이더라고. 다른 사람이랑 잘 지내기도 하고.
좋다, 환하다, 놀다, 등의 수사는 ‘건강함’ 또는 ‘덜 우울함’을 나타내는 도미닉 특유의 캘리포니아식 과장이라는 걸 대충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화가 났다. 이어지는 말에는 더욱. 챙겨준다고? 다른 사람을? 도노반이? 그가 기뻐한다면, 활기를 되찾는다면, 그건 자신의 옆이어야만 했다. 배우자란 그런 거니까!
갓길에 차를 멈추고 짧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미니메이는 자신의 감정에서 별다른 흠결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를 내는 게 맞는 거야.’ 미니메이는 도노반 밀러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에게 더욱 기꺼워질 때 분통 터뜨리지 않는다면 그 사랑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니메이는 (먹구름 가득 낀 날이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 만나기로 한 날이다. 그러나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교통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니메이는 몇 번이나 클락션을 울리고 운전대를 쾅쾅 내리쳤다.
도착하자마자 글러브박스를 뒤져 우산을 꺼내 들었다. 차 문을 열고 우산을 펼치려는데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펼쳐지지 않았고, 급기야 힘을 주어 밀어붙이기 시작했지만 녹슬었는지 덜컥거릴 뿐 순순히 열릴 모양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분기탱천해있던 미니메이는 식식거리며 우산을 안에 던져넣고 문을 닫았다. 자동차가 잠기는 삑삑거리는 소리를 뒤로하며 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는 와중 빗줄기가 세졌다. 마음도 급해졌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엉망이 되는 것도 감수하고, 여기에 서 있는데, 도노반은 멀거니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산을 내주는 것은 몹시 마음에 들었다) 미니메이는 하고 싶은 말이 용솟음치는 바람에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놓았다. ……당신이 즐거울 곳은 여긴데! 그런데… 오는 길에, 내가 늦는데도 전화 한 통 없었어. “이건 합당한 의심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도노반은 아무리 기다려도 이끼 낀 둑이 허술하게 내려앉은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미니메이. 비가 많이 옵니다. 감기 걸려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들어가서…… 뭐라도 먹을까요.”
미니메이는 열성적으로 화를 내느라 빗물이 살갗을 두들기는 것조차 그제야 느꼈고, 기꺼이 응했다.
둘은 거의 젖은 꼴로 카페에 들어섰다. 바깥 테이블과 의자를 전부 들여놓고 테라스 창을 다 닫아놓은 통에 입구를 찾는 것도 좀 오래 걸렸다. 카페 안은 꽤 북적거렸다. 그러니까 전혀 오붓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직 나무로 지은 인테리어는 따뜻했으며 에어컨 바람과 원두 갈리는 냄새, 오래된 이국의 시티팝이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미니메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약간 훌쩍거리며 안쪽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둘은 몹시 지쳐 칼로리가 제일 높은 메뉴를 주문했다. 곧 점원이 내온 건 크림이 담뿍 올라간 커피였다. 헤이즐넛 향기가 따스하고, 고소했다. 온도가 적당해 바로 입 댈 수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노반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향기롭고… 굉장히 진해요. 꾸덕꾸덕하고 부들부들한 치즈 머핀 생각이 나는걸.”
무지 달근한 느낌. 혀끝에 걸리는 오밀조밀한 거품을 삼키느라 미니메이는 잠시 화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계속 소리를 지르기에는 배가 고프기도 했다. 뜨거운 샌드위치나 커다란 머핀을 더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앞니와 입술에 달콤한 우유 크림을 잔뜩 묻힌 채로 웃어 보였다. 장난기 발동.
그러고서는 장난이라곤 모르는 도노반이 냅다 닦아줘 버렸지만. 도노반이 이어 말했다.
“어떻죠?”
“뭐가요?”
“저는.”
미니메이는 딱 숨 쉴 만큼만 고민했다. “좋아요.”
“…고맙습니다.”
“사랑해요.”
“저도…….”
“어물쩍 넘어가는 건 안 돼.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요.”
여기서 ‘그러는’ 게 뭐냐고 물으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도노반은 겨우 살려낸 데이트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도록 하죠.”
“문자 말구 전화를 더 해주고요.”
“……노력하겠습니다.”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걸 티 내줘요.”
어려운 주문이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컵 손잡이를 만지고 있자 미니메이가 씩 웃으며 도노반의 뺨을 잡아당겼다.
미니메이가 말했다.
“역시 배고프죠?”
“많이요. 뭘 더 시킬까요?”
“브라우니. 커다란 치즈 머핀. 카레가 들어간 세모 모양 샌드위치랑, 버터랑 사과잼 바른 벨기에 와플. 내가 먹을 거예요.”
“전 머핀이면 됩니다. 아마.”
“농담이에요. 당신이 다 먹어요. 당신은 먹을 때도 멋있으니까.”
도노반은 오랜만에 진땀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는 명치를 조이는 느낌이 멈춰가는 비처럼 녹아 사라졌다. 당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그럭저럭 결론을 내렸다. 그가 일어서서 주문을 받으러 가는데, 등 뒤에서 창밖을 보고 있던 미니메이가 말했다. “와, 저기 봐요.”
비가 그쳤어요.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는 사이, 앳된 얼굴의 점원이 테라스 창을 왼쪽으로 밀어 반쯤 열었다. 비 뿌린 뒤의 파르스름한 바깥, 신선한 공기가 훅 끼쳐 안에 있던 그는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빵을 굽는 냄새와 노릇한 토스트에 바르는 녹아내린 꿀의 향기를 같이 들이마시었다. 사람은 언제나 변한다.
사람은 언제든 변하는데…… 고작 달콤한 크림커피 한 잔에 이렇게 되는 거라면, 어쩌면, 그와 그의 가족이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을 테지. 그저 비를 피할 따뜻한 곳 어디든 들어가 무언가를 먹으면 되는 것이다.
안쪽에서 미니메이의 것이 분명한 조그만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가보며, 그는 가는 길에 시럽 제형의 감기약을 사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서늘한 날씨에는.
엄마와 몹시 닮은 딸이 비슷한 감기를 앓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설탕과 우유가 잔뜩 들어간 뜨거운 카페라테를 두 잔 집으로 들고 가도 괜찮을 거였다.
부부는 주문한 음식을 전부 해치웠다. 특히 도노반은, 굉장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