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ㅍ님
자캐커플 피크닉을 썼어요~! 감사합니다!
두꺼운 종이에 펜촉을 세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실버는 몰래 자신을 그리는 듯한 에스텔을 애써 모르는 척해주며 가득 찬 바구니를 열었다.
주말이고, 휴일이었다. 공원 잔디밭마다 사람들이 엎드리거나 드러누운 채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판석이 깔린 동상 옆 무대에선 버스킹을 하는 무리가 노랫소리며 박수 소리를 보내왔다. 그들은 분홍색 체크무늬 돗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빳빳한 잔디의 울곡이 그대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크게 자란 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데다, 주변엔 벤치며 선베드가 없어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멀긴 해도 관목 넝쿨 사이로 분수대가 보였다. 한창 더운 낮을 맞아 뿜어지는 물방울이 눈 시릴 만큼 빛나서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스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얼마간 펜을 놀리던 에스텔이 홀리듯 고개를 돌려 비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분수에 집중했다. 그 모습이 순한 고양이 같기도 해서 실버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작은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에스텔이 앗, 하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제 먹는 거야?”
“응. 기대 돼?”
“엄청! 네가 만든 거니까 맛있을 거야. 이제 비싼 제과점에서 사는 과자보다 네가 만들어주는 게 훨씬 좋아.”
“…네가 만들어준 것들도 전부 맛있었어.”
그가 얼굴을 붉히며 한 말에 에스텔이 헤헤 웃었다.
바구니에는 디저트가 들어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일부러 점심을 거르고 나온 참이다. 단 것만으로 배를 채우는 건 에스텔이 사랑하는 호사였다. 커튼을 떼어 만든 천 돗자리 위에 팬에 찍어 구운 벨기에 와플과 생크림, 몇 개만 꽁지를 예쁘게 남겨둔 손질한 딸기, 음료수병, 하얀 사기 접시, 새로 산 푸른색 포크가 가지런히 놓였다.
에스텔이 식기를 정리하자 실버는 크리스털 잔을 꺼내 보틀에 든 딸기 스무디를 따랐다. 딸기 꼭지와 얇게 저민 레몬, 애플민트 이파리를 얹은 다음 하트 모양으로 꺾이는 줄무늬 빨대까지 꽂아 에스텔에게 건넸다. 황홀한 듯 보던 에스텔이 얼른 사진을 찍고는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받아 들었다.
손가락에 차갑고 묵직한 유리가 닿고, 곧장 맺히는 빛나는 물방울. 손이 시릴 것도 같았지만 돗자리 위는 태양 볕과 잇댄 땅에 고스란히 닿아 따스했고 바람은 훈훈했다. 에스텔은 차가운 스무디를 한 모금 넘겼다. 목이 시려오더니 뺨과 턱부터 냉기가 옮아가며 손부채질이 필요할까 싶던 더운 기운이 사그라졌다.
에스텔이 슬그머니 다가오는 고양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안 돼, 슈가. 이건 너무 달아서 네가 먹으면 이빨이 썩을 거야.”
“슈가, 이리 와.”
실버가 슈가 몫의 고양이용 캔을 꺼내서 덜어주자 평화가 돌아왔다. 왜 나한테만 유독 찡찡거리지, 하는 에스텔에게 실버는 “네가 편해서 그런 거야” 대답해주고 크림을 바른 와플 접시를 밀어주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에스텔이 와플을 반으로 잘라 포크로 찍었다.
“실버, 나도 커피 맛봐도 돼?”
“물론이지. 잔 따로 줄게.”
이 더위에서도 보온병에 든 블랙커피를 마시던 실버였다. 에스텔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피잔을 보다가 입술을 조금 대보았다. 생각보다 뜨겁지 않고, 따뜻하고… 더워졌고 매우 썼다. 에스텔은 빨개진 볼로 으흡 하는 이상한 소릴 내더니 조용히 와플을 씹었다. 실버가 얼른 스무디를 들어주었다.
빨대를 쭉 빨아먹고 나서야 살 것 같은 표정이 된 에스텔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내 입맛은 아닌가 봐, 역시.”
“이왕 나왔으니까 상큼한 걸 먹자. 레몬 케이크는 어때?”
“그것도 있어?”
“응, 치즈 크림 넣어서…, 여기.”
알껍데기처럼 푸르스름한 접시 위에 가느다랗고 높은 치즈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투명한 젤리 같은 레몬 무스가 잔뜩 올라갔고, 슈가 파우더 같은 제스트를 뿌린. 에스텔은 키득키득 웃고는 포크로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 먹었다. 촉촉한 시트에서는 초콜릿 향기가 났다.
“맛있어! 어떻게 매번 다르게 달콤한 거지? 나중에 꼭 베이커리 차려야 해, 실버.” 에스텔이 진지하게 말했다. “보답해주고 싶으니까. 있잖아, 실버. 이건 선물이야.”
그러면서 에스텔은 자신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가 끼워진 작은 액자였다. 그리고 스케치북에서 조금 전 열심히 그리던 장을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액자에 끼워 넣었다. 실버는 눈앞에 다가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귀를 붉혔다.
“……내가 가져도 돼?”
“응, 어디든 네가 좋은 곳에 두자.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튤립을 그렸어.”
“튤립, 좋아해. 아주 좋아해.”
이제부터 좋아하게 될 거야. 실버는 생각했다.
그때 슈가가 털을 곤두세우며 하악질했다. 둘이 보니 공원에서 돌보는 듯한, 빨간 인식표를 매단 고양이가 돗자리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기 몫의 그릇을 핥던 슈가가 성질을 내든 말든 그 고양이는 에스텔에게 다가와서 머리를 콩 박았다.
“넌 누구니? 초면에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
에스텔이 얼룩덜룩한 고양이를 끌어안는 동안, 실버는 가만히 슈가를 달랬다. 그러면서 튤립이며 장미와 함께 그려진 자신의 초상을 들여다보았다. 잘 그린 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는 다른 사람처럼 웃는 그림이 낯설었다. 에스텔에게는 이렇게 보이는 걸까.
에스텔이 보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내게도 같은 얼굴이 보일까. 그는 고민하면서 액자의 차가운 표면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젓곤 바구니에서 고양이 간식을 꺼냈다.
아롱지는 볕이 찬란한 여름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