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ㅎ님
멤버십 커미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유혈 주의!
청신한 낮 하늘을 연한 구름이 나긋한 몸짓으로 가로지른다. 남자는 노천카페에 앉아 빛이 떨어져 내리는 파라솔 날개를 보고 있었다. 앞에 놓인 체스판은 백말을 상대로 두고 지지부진한 먹고 먹히기 중이었다. 기물을 희생시키는 데에 두려움이 없는 그는 이번에도 그러했고, 상대의 나이트와 비숍을 묶고 있는 폰 몇 개를 제외하면 나머지 말들은 별 소용 없이 이중으로 판 위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나마 미들게임이 끝나갈 무렵 퀸에 당할 것이다.
그는 질 것이다. 사실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없어서 앞에 앉아 있던 카포레짐은, 체크를 선언한 뒤 느긋이 커피를 가지러 떠났다.
유르겐 윈체스터가 깍지 낀 채 방어적인 자세로 판을 노려보고 있던 건 이 때문이다. 간단한 커피값 내기였는데 그는 지불할 돈보다도 전략가의 자존심에 있어서 양보할 수 없었다. 한창 그러고 있자니 절로 미간에 주름이 졌다. 거리 너머 학생들이 누워서 책을 펴보는 잔디밭과 이 테이블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냉담한 간극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꼴이 우스꽝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청년은 다가온 것이리라.
오른쪽 폰으로 유인하세요.
…뭐?
너 누구냐느니 하는 걸 물어볼 찰나는 없었다. 유르겐은 체스판의 양 모서리를 꽉 쥐었다. 이 젊은이는 이미 판을 읽은 것이다. 그 뜻을 생각해볼 틈도 주지 않고, 그 애가 연이어 말했다.
나이트로 보호하며 오른쪽 폰을 두 칸 앞으로… 프로모션 하는 척 유인하고, 왼쪽 폰을 퀴닝시켜요. 판에 여왕이 없잖아요.
체스를 잘하나?
어음, 어느 정도는요? 클럽 들었었거든요.
이번 판에 이기면 네게 선물을 줘야겠군. 이름이 뭐지.
이안. 이안 그레이요. 중요한 게 걸려 있나 봐요?
커피값.
이안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며 같은 점퍼를 입고 앞서가는 학생들을 쫓아가는 품이 나이대다웠다. 그러나 유르겐은 환한 보도에서 눈길을 거두고, 깍지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체스판 위를 주시했다. 말대로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 하지만 상대는 승리감에 취해 충분히 이 덫을 밟아줄 것이다.
소리 없는 웃음. 이안 그레이라.
성긴 머리카락과, 입매에 미치던 자른 레몬 같은 볕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
그때. 이안이 말했다. 그때 당신을 알아봐야만 했었어. 당신은 나를 모르면서 선물을 주겠다고 했어. 별 볼 일 없는 내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인상을 구기고 있었어. 퀸이 없으니 킹을 승복시켜야 하는데도 다음 퀴닝만 노리고 있었어. 이기려고, 반드시 죽이려고. 난 그게 재미있고 귀엽다고 생각했었지. 비열함도 알아보지 못하고, 멍청했어. 당신 말대로 나는 …… 어쩌면 내 발로 여기에 온 것일지 몰라. 필연이라는 게 있대. 반드시 생기고야 마는 일. 나는 여기에서 지긋지긋한 체스나 두며 오늘 죽인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할 운명이었던 거야.
당신은 내 몸을 가둘지언정 영혼은 옭아매지 못하니까. 내 영혼은… 스스로 걸어서 이 미궁에 들어온 거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있잖아.
이제 세상이 다르게 보여. 세상엔 죽은 말과 승리한 말밖에 없어. 색깔은 중요치 않아… 난 그중 어딜까 생각해보면, 당신이 프로모션시키고 싶어하는 어떤 폰이겠지. 퀸을 만들고 싶은 거야. 무작정 앞으로 떠밀어서 체스판의 다른 끝으로 보내고 싶은 거야. 하지만 말이야.
당신, 그 내기 이겼어?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페는 파라솔과 의자를 모두 접어 집어넣고 창도 닫았다. 유르겐은 바로 그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앞에는 조악한 휴대용 체스판을 두고. 비록 말도 판도 앙증맞은 크기이며 중간에 경첩이 튀어나와 있긴 하나 목재는 상당히 좋은 품질인 듯 불그스름한 윤광을 내고 있었다. 유르겐은 지루하게 나이트 하나를 쥔 채 만지작거리다가, 우산이 지나갈 때마다 창밖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창문을 딱딱 두들겼다. 지나가던 이가 멈춰 섰다. 이안 그레이였다. 유르겐이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자 그 애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하더니, 체스판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가던 길을 돌이키고 카페 문 쪽에서 딸랑, 하며 우산을 터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이거예요? 아직 시작도 안 했네?
네가 흰 말을 쥐어.
저랑 두시려고요? 삼십 분 정도밖에는 시간 없는데.
그 안에 나를 끝장내면 되겠지.
농담도, 하며 이안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유르겐은 나른하게 입매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웃음에 가까운 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단판 승부가 시작됐다. 좋은 기물을 쓰는 게 참 오랜만이라며 신이 난, 비에 젖어 더욱 곱슬거리는 머리를 한 어린 학생을 검은 승부사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안은 멋쩍게 웃었다.
*
어찌나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지, 유르겐은 바깥 계단에서부터 그 파열음을 들었다. 집안에 그렇게 무겁고 박살이 날 만한 것이 있던가. 있다면 사람 하나뿐이 아닌가. 심장이 귓가에 쟁쟁한 이명을 만들며 뛰었다. 열여섯 명의 메이드맨이 폭사 당한 날이었다. 그런 성과를 내어놓고 단 한 명을 잃을 순 없어. 모든 폰이 살아남아도 퀸이 죽으면 의미가 없어. 나는 승복할 수 없어.
문을 열자마자 무성한 모래밭을 비로 쓰는 소리가 났다. 문짝에 파편들이 밀려 나간 것이다. 한 걸음 딛자마자 구두코에 흑요석 조각이 부딪혀 다른 곳으로 빙그르르 미끄러졌다.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대리석 바닥은 유릿가루와 돌조각으로 발 놓을 틈이 거의 없었다. 유르겐은 외출복을 입은 채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라탄과 부드러운 직물로 짠 소파에 앉아 이안은 흥얼거리고 있었다.
유르겐은 말을 잃었다. 이안의 손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무슨 일이야.”
“떨어뜨렸어. 체스판. 3층에서 여기로.”
“어떻게…”
“어떻게? 그냥.”
무슨 괴력을 발휘해, 방 안에 있는, 묵직한 석상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하고 육중한 물건을 끌고 난간을 넘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엉켜 있었다. 유르겐은 그의 등 뒤로 다가서서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그러다가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르겐이 물었다.
“왜?”
“아니지.”
“반항이 하고 싶었나?”
“당신이 할 말은 그게 아니잖아… 난 옛날 생각에 막 재밌었는데.”
으흣, 하고 이안은 웃음을 삼키려는 것처럼 마른침을 넘겼다. 파리하게 여윈 뺨이 칠한 듯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리 와 봐. 이안이 말했다.
유르겐은 그렇게 했다. 가서 앉은 채 이안을 무릎 위에 올렸다. 얌전한 소년처럼 안겨 오던 이안이 돌연 유르겐의 턱 밑에 차갑고 두꺼운 것을 겨누었다. 손가락 사이로 핏줄기가 움찔거리며 흘렀다.
이안이 쓰는 체스판은 매우 고급으로, 흑요석과 마노를 번갈아 짠 다음 유리 덮개를 씌운 걸작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말은 모두 나무였다. 하지만 유르겐은 이 순간, 그런 멍청하고 미묘한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이안의 손목을 잡았다. 이안은 체스판 모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흑요석 조각으로, 그 둔하고 어처구니없는 무기로 유르겐을 위협하고 있었다.
유르겐은 속에서 무언가 파손되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값지고 빛나는 것… 광물로 짠 고급 기물처럼. 이 물건을 퍽 아꼈었던 모양이라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지. 이안.”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목줄기에 날 선 돌을 더욱 눌러왔다. 살갗만 겨우 베여 따끔거리는 느낌이 났지만 그뿐이었다. 사람은 이런 것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이안은 무수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알려주어야 했다.
“무언갈 죽일 땐 이걸 쓰는 거다.”
유르겐은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빼어 이안에게 들려주었다. 본래 쥐고 있던 것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적막한 실내를 진진하게 울렸다. 이안이 피투성이 손으로 리볼버를 쥐자 유르겐은 총신을 만져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이안은 울음을 터뜨렸다.
폭음.
세 번.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 “나…… 그냥 하늘을…… 보고 싶었어.”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소리. “그래서 높이… 이 말들도 있잖아 가끔은… 높은 곳에서 봐야 하니까, 사람은 원래 그렇게 살잖아…….”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몸을 태우고 싶었다. “그냥 난 당신이…….”
유르겐 윈체스터는 뇌리를 뒤흔들며 작열하는 고통 속에서 그 멀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매무새에 피와 화약을 뒤집어쓴 저 청년을. 더운 낮처럼 밝은 미소를 가진 학생을. 처절함 없이도 판을 교묘하게 뒤집어 이기던 승부사를, 간절하게 구원을 기도하며 성스러운 경구를 읊던 가련한 소년을. 나선형 계단 꼭대기에 서서 모든 걸 박살 낸 그의 애인을. 몹시 떨리는 것이 안쓰러워 만져주고 싶은 연인의 눈썹을.
그는 보았다.
“……봐.”
유르겐은 고개를 옆으로 떨구며 길게 선 거울을 눈짓했다. 이안이 천천히, 섬약하게 떨며 거울 속에서 눈을 마주쳐왔다. 유르겐은 처음에 주었어야 했던 것을 이제야 전할 수 있었다.
“너는…… 내 앞에서 빛이 나.”
이렇게. 말을 맺을 수 없었다. 이안은 멱살을 쥔 손을 떨었다. 떨림은 간헐적이다가 점차 격렬해졌고 분노에 찬 금수처럼 비명을 동반했다. 그는 식어가는 송장을 흔들어대며 자꾸 보챘다. 돌려 내. 돌려 내. 돌려 내. 돌려 내. 돌려 내. 다시, 다시, 다시 하게 해 줘. 이 내기는 아직 안 끝났잖아. 돌려 내. 내 걸 돌려줘…….
열린 문밖에서 가느다란 훈풍이 새어 들어왔다.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