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너였을까? 안야오군 오코레는 뿌연 유리컵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유리가 입은 넓데데한 스크래치는 어디에 쓸렸는지도 모르게 생겨 우유 남은 자국처럼 지워지지도 않았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에서 부드러운 행주가 녹아내리듯이 미끄러졌다. 안야는 박살 난 유리 파편 위에 서서 계속 생각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어쩌면 쓰는 것에 관해 생각한답시고 진정으로 해야 할 말을 미루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지금 여기에 적기로 했고, 아마 말하지 않을 터이며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전과 다르니까. 너와 함께 있는 신이고, 어쩌면 영원을 함께하고 싶은지도 모르니까.
고민이 소용없어진 건 네가 벌레를 눌러 죽이는 걸 보고 나서부터. 네 집의, 네 벽지에 생긴 신경 쓰이는 얼룩 하나가 이 상념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몹시 자존심이 상했고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더 상심했지.
눈치 못 챘겠지만, 부엌에 있던 유리컵 하나가 깨졌다. 천팔공이 자주 쓰던 물건이었어. 그때 문득 기억나기를 너는 네 습관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부류였지. 즐기던 것이 사라져도 화내지 않겠지. 상대를 증오하지 않으니 용서할 필요도 없을 거야. 다만 쨍그랑, 소리가 들리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눈동자보다 입매에 걸리는 시원하게 찢어진 웃음이 보이겠지. 그러고 나서 상대를 건성으로 가리키는 거야. “너야?”하고.
천팔공은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아. 하찮은 행위라 여길지도.
그래서 네겐 ‘너’가 누구인진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무엇을 했는지, 그게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충분히 몸을 떨리게 하는지 전율이 이는지, 따위가 훨씬 매혹적이겠지.
내겐 중요한데. 어째서 유리에 흠결이 생겼고 왜 지워지지 않는가, 하는 귀찮은 문제가 거슬리고 신경 쓰여. 하지만 컵을 깬 것도 나였다. 이제 새로운 문제가 생겨. 컵을 놓친 걸까, 놓은 걸까?
말하자면, 천팔공을 놓고 싶지 않다.
너를 닮게 되었으니까. 나를 완성한 게 하필 너였으니까. 질투는 오래가지 않아 시기가 되고 나는 언젠가 가장 중요한 물건마저 깨뜨리고 말겠지, 실수가 아닌 고의로. 그러면 넌 입매를 꿈틀하고는 다시 웃을 거야. 처음 보는 낯을 마주한 것처럼. 재밌어할 거야.
아니, 이런 건 원하지 않아. 나를 만든 네게 가까이 있는 것과 이 ‘원하지 않는’ 욕망(그래, 충족되지 못할) 사이의 마음이 걸려. 내가 고여 있던 곳이 아닌 샘에서 둑이 깨진 것처럼 물줄기가 흘러오는데, 농도가 달라 아직은 그게 독인지 약인지 알 수가 없어.
천팔공을 이해한다.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 둘 다 모른다. 계속해서 모르고 싶지만, 로제타석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 해. 너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제 알아. 네 갈증. 네 광분, 혈투에서 느껴지는 치기. 미욱한 패기. 낮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컵 안의 소용돌이는, 이제 컵을 잃어버려서, 발을 적시고 말아. 나는 신을 배반하고 싶지 않아. 네게 감응한다고, 그런 말로
너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뇌리에 벼락을 만든 너를 증오해. 네가 네게 그러하듯이. 나는 지칠 때까지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을진대. 인제 와서, 담배를 문 네게 화상을 입히는 상상을 한들. 그것이 무척 즐겁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불태우고 싶은 게 너인지 나인지는 모르지. 세상을 수라도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매해 모르도록 하자. 네가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게, 유리가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너를 사랑해야 한다는 목적성 띤 문장에서 너를 사랑하고 말았다는 마침표로 이어지고말았다는 걸 너만은 모르고 있게. 네가 더는 즐거워하지 않게. 한낱 희락 따위로 전락하는 건 우습지 않니.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네가 날 똑바로 보고, 간절해지거나, 분노했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소원을 이제 끝내겠다. 우리는 광기가 유일한 질서인 석굴에서 살아갈 것이다.
사람으로서 그것만을 바라겠어.
“뭐야?”
팔공이 물었다. 안야오군 오코레는 그 큰 손을 들어 올려 거멓게 오그라드는 종이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