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야기라고, 시취는 생각했다. 필멸이나 불멸, 구원이니 멸망 따위는 종교에서 흔히 거론되지 않던가.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시취는 자상하고 현명한 지도자의 구실을 할 의사가 있었다. 왜, 그들은 뻔한 일을 원할 테니까. 가장 앞장서서 평화를 가르치고 ‘옳은 말’을 하다가 적절할 때 희생되는 것.
그래서 시취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얼어붙는 계절.
추위, 좌우 없이 거세게 흩날리는 눈발처럼 점멸하는 시야,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 그런 것에 죽음이 깃들어 있으리라 시취는 생각한다. ‘평범한’ 이들이야 침대 위에서 편안히 졸다가 죽어가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시취 같은 사람들에게 그건 폭주에 가깝다. 몸이 가장 안온해지는 때에, 문득 눈을 떠보면 온 세상이 흰 터럭을 가진 풀줄기로 덮여 그 진액에 산패해가고 있는 것이다. 손끝까지 훈훈한 온기가 좍 퍼지는 그 순간을 ‘우리’는 자제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정신이 명징해지고 모든 걸 알 것 같은, 경각에 불과한 시간에 도시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눈을 똑바루 뜨고 항시 모든 걸 노려보기. 미친 사람이(하지만 정말로 광인은 아닌) 되어 보기. 손가락을 꼭 옥죄어서 선수처럼 섬세한 몸짓만을 가지기. 하지만 그깟 거, 이미 하고 있지 않던가. 죽음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사라진다는 건 예컨대 조금 더 장미와 같지 않을까. 칠겹의 옷을 껴입은 연밥처럼, 그보다는 작고 수줍게 인생의 변두리에 피어난 한 떨기 주홍빛.
시취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인제 와서 변한다고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게 변태는 꿈꾸지 못하는 몸과 같은 것이라 핀으로 꽂혀 장식되는 것밖에는 남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그러니 겨울이 필요하지.
계절에 의미가 있나요.
낭만적이잖아, 어딘가.
그런데 그대는 누구신지요.
내 이름은 비밀이라고 아이는 말하고서, 눈 덮인 들판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이 아름다워 슬쩍 발을 대보니 가없게 널따란 포자 밭이었다. 시취는 걱정스레 아이를 불렀다.
거기서는 숨이 막힐지도 모릅니다. 내게는 걱정 따위 없어. 신발을 가져가세요. 필요 없어. 단 한 켤레도? 단 한 짝도. 모자나 겉옷은 어때요? 그까짓 옷부림은 만족스럽지 못해. 그대 어깨에 계속 쌓이고 있습니다, 눈이요. 아니, 이게 곰팡이란 것쯤은 나두 알어. 내가 뿌린 게 아닙니다. 당신이 그랬다는 것두 알구.
하지만 나는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다고 아이는 말했다. 시취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바로 앞에 난 자그만 발자국 위로 자신의 마른 발을 겹쳤다. 적은 보폭으로 한참 걸어 나가니 아이의 등 뒤에 설 수 있었다. 아이는 이름을 물으니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다만 시취의 머리 꼭대기보다 한참 먼 하늘을 눈에 담고 있었다. 눈에 담는다는 표현 외의 것은 불가능했는데, 그 눈은 개나 고양이의 것처럼 커다랗고, 투명했기 때문에.
날 보지 말고 저 위를 봐.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보는 거야, 젖은 땅이 아니라.
눈은 내리지 않는데요.
하여간에.
한참 걸어 발밑에 깔린 것이 온통 피어올랐다. 그리고 미동 없이 선 둘의 허리께에서 발등으로, 솜털 같기도 눈송이 같기도 한 포자가 반짝반짝 내려앉고 있었다. 시취는 위를 보았다.
오랜 잠에서 눈을 뜬 그는 밖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나이에 뭘 바라느냐마는 온몸이 찌뿌둥하고 개운치 못한 느낌이었다. 기분은 또 싱숭생숭해서 그는 꿈속에서 들었던 낱말을 부르튼 입술로 되뇌었다. 그러고 보니 은은하게 소독약과 물 냄새가 났다. 깨끗하고 바스락거리는 홑이불을 제치자 침대 밑에 놓여 있던 물그릇과 젖은 수건이 보였다. 이래서 꿈의 냄새는 곰팡이보단 겨울에 가까웠던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누군가 몸을 닦고 방을 환기하고 청소를 했다. 팔목에 달린 수액 줄은 오랜 돌봄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병원이라기보단 요양소라고 해야 할까, 상처를 낫게 하기보다는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이곳. 거울도 없고.
침대가 붙은 벽에서 일 미터쯤 떨어진 곳에 창문이 있었다. 시취는 팔에서 수액을 떼어내고 제 발로 걸어 거기까지 갔다. 바깥으로 창을 밀기도 전에, 격자를 낀 유리에 갈색 머리카락을 한 노파가 비쳤다.
너머로는 계절이 바뀌는 와중인 듯 흰 장미 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그는 아이가 발음한 이름을 가만히 속삭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