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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

나사르 본주 2021. 2. 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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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라스 그레텔은 이것이 면목 없는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버가 활짝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에스텔은 알지도 못하는 그의 소년 시절을 꿈꾸고 있었다.

에스텔은 소녀였고, 실버의 손을 잡아 꽃밭으로 이끌고 있었는데 너른 교정은 캐모마일이 마구잡이로 핀 잔디밭이었다. 운동을 하는 아이들 발길에 헤집어져 붉은 흙 드러난 곳이 있을 법도 한데 어느 곳 하나 부족함 없이 온전한 풀밭. 잔디 깎는 기계가 지나가지도 않아 풀 끝이 뾰족하고 싱그러운, 이슬이 맺힌 아침. 그들은 같은 빛깔 교복을 입은 채 그곳을 달리고 있었다.

연푸른 회벽에 빨간 지붕을 얹은 학원은 단일한 건물로 되어 있었지만, 그만큼 동화 속 풍경 같은 온화함을 품고 있었다. 가르치는 건물이라기보다는 화목한 집안의 대저택 같은 분위기였다. 봄이 만발한 장원을 가졌다면 이럴까.

실버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 외에는 오로지 적막한 그 집이자 학원 안에는 청결하고 부드러운 린넨, 식지 않아 따뜻한 음식, 세탁하지 않아도 늘 갈아입을 옷이 준비된 마호가니 옷장과 각기 모양새 다른 침대로 차 있으리라고, 그리고 실버는 행복과 웃음밖에는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거기에서 살리라는 걸 에스텔은 알고 있었다. 다른 모든 꿈이 그렇듯 아무 이유 없이, 알 수 있었다.

그런 실버에게 그늘이란 없었다. 몸 여기저기를 꼬집거나 긁어 자해한 흔적도, 육신에 드리워진 사인 하나 없이 망개꽃처럼 피었다. 실버는 어린 에스텔에게 화관을 씌워 주었다. 소녀는.

소녀는 그래도 웃지 않았다.

 

“왜 그래, 에스텔? 왜 슬픈 표정이야?”

“…가련해서.”

“무엇이?”

“여기서조차 너는 슬픔을 알고 있다는 게.”

 

곧장 실버는 무표정해졌다. 볼우물까지 팬 해사한 얼굴에 점차 미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에스텔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천장이 보였다.

 

나무로 대들보를 세웠는데도 석면이나 바른 듯이 버석해뵈는 아침. 에스텔은 뺨에 어린 물기를 닦아냈다. 꽤 오랫동안 울었는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렵잖게 몸을 일으켜자마자 에스텔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눈물 없는 울음이었다. 자신이 너무 가차 없는 것 같아서, 실버는 바라지 않을 실버의 행복을 감히 꿈꾸고 만 것이 가소롭고 괘씸해서 괴로웠다. 게다가 어린 시절이라니. 실버는 결코 겪지 않았을 호시절이지 않은가. 그건 미래조차 아니었다. 어쩌면 에스텔은 실버가 행복해지는 것보다는 그가 본래 행복한 사람이기를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때 마지막 눈물방울이 이불 위로 뚝 떨어졌다. 울음을 온통 게워낸 에스텔은 몽롱하게 벽을 노려보았다. 에스텔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는 먼저 저 액자를 떼어내기로 했다. 너무나, 혼자만의 방 같으니까. 에스텔에게는 이 집을 홀로 누릴 자격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실버가 입원한 지 13일이 지났다.

에스텔은 옷을 털고, 물로만 샤워하고 나와 샤워가운을 걸친 채 보송보송한 슬리퍼를 신었다. 창밖이 환해져 있었다. 커튼을 젖히자… 그래, 완연한 봄. 이제는 이런 두꺼운 가운도 털 슬리퍼도 필요가 없는 계절이었다. 말끔하게 씻어내려 조금 부은 기만 남은 에스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실버가 없는 봄.

그녀는 언 식빵을 토스터에 넣고, 커피를 끓이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기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까맣게 탄 빵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있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해 에스텔은 맛없는 커피만 머그잔에 따른 채(똑같은 포트를 쓰는데 어째서 맛이 다른지 모를 일이다) 부러 창가로 가 앉았다. 늘 그렇듯 거기엔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실버가 자주 앉아 있던 곳이고, 지금은 에스텔이 매일 아침 앉아 새파래진 바깥을 바라보는, 에스텔의 의자.

창에서 가까운 가지가 파르스름한 나뭇잎을 떠안고 유리를 친다. 그녀는 애써 웃어 보았다. 잘 말려 줄 사람이 없어 머리카락이 아직 축축한 채 바싹 마른 뺨을 하고 책장을 넘겼다. 잠이 오지 않아 읽어내려가던 책인 터라 책갈피에서 한참을 되돌아와야 했다. 읽던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은 지도 며칠이나 지났다.

페이지의 절반은 숫자를 친 목록에 할애되어 있었다.

 

단단한 배우자가 되는 법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되 그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루틴을 갖는다.

문화생활과 사소한 여가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루 두 번 햇볕을 쬐며 산책한다.

술과 담배를 멀리한다.

 

등의 환자에게나 어울릴 듯 신뢰 가지 않는 조언이었으나, 어쨌거나 어수룩한 전문가가 에스텔보다는 잘 알 터였다. 에스텔은 바짝 타서 씁쓰름한 빵을 씹으며 글줄에 집중했다.

그러다 접시가 비면 식은 커피를 들고 일어서서 책꽂이를 기웃거렸다. 여기 어디에 실버가 사 둔 시집이 있을 텐데. 짐을 간소화하느라 들고 가지 못한 것 중에는 실버가 좋아하던 시가 실린 책도 있을 터라고, 그걸 보고 싶어서 일어선 것이니 절대 제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자신을 위안하면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시선집을 펼쳐보면서는 또 딴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실버, 이 책을 만지는 걸 좋아했지. 표지가 거친 직물로 되어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다고… 짐에 끼워 넣어 주는 거였는데. 다음번에 가져다줄까. 거기서는 책 모서리를 모조리 잘라버린다는 게 사실인가. 실버는, 이 시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할 날이 있었을까. 아니면 온종일 괴로운 생각을 하면서 보내는 게 아닌지. 자주 찾아가는 건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면회를 너무 멀리하는 건 아닌지.

정신 차려 보니 실버에게 가져다줄 시집을 고른다고 거실 바닥에 책을 온통 펼쳐 놓고 있었다.

 

안 돼. 이렇게는 안 되겠다.

 

결국 비우지 못한 컵을 설거지통에 넣으면서, 에스텔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박박 씻어냈다. 집 안에는 실버의 흔적이 지나치게 많았다. 안에서는 연인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됐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 세탁한 후 그대로 내버려 둔 파란 수건에 코를 묻으면서(거기 체취가 남아 있을까 봐), 에스텔은 결단을 내렸다. 나가야지.

에스텔은 일부러 얼굴에 분칠하고, 예쁜 리본으로 이제는 다 마른 머리카락을 꽉 매고 먼 외출용 구두를 꺼내 신었다. 빨간 에나멜 구두 위에 먼지가 앉아 구두닦이로 닦아내다가, 그 부드러운 촉감과 발그름한 색에 꿈속의 광경이 떠올라 문득 회한에 젖어 들었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오늘 전당에서 무료 전시회가 있었다. 메신저백에 이것저것 챙겨 들고 나가서, 전시회를 보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스케치하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실버 생각도 좀 덜 하고. (이렇게 맘먹으며 곧장 죄책감에 몸서리쳤지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것보단 당장 박차고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에스텔은 문을 열고, 아무런 지표 없이, 당장은 공원으로 향하는 오솔길에 발을 올렸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 그것이 목표라면 목표였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비둘기 떼가 화들짝 날아올랐다. 새가 거기에 있다는 것도 눈치 못 채고 멍하니 앞만 보던 에스텔은, 그제야 바닥이 단단한 보도로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어디선가 물을 튼 분수대 쏟아지는 소리, 팬지꽃에 벌과 나비가 꼬이고, 잎 넓은 상록수가 우거진 녹음이 눈에 찼다.

공원이었다.

저편 멀리에 높은 계단과 그리스식 신전 양식을 흉내 낸 예술회관이 보였다. 에스텔은 그제야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겨우내 하얘진 얼굴에 그은 미소는 비록 가느다랗게 금이 간 것 같더라도, 바람개비에 감기는 실바람처럼 싱그러웠다.

아직 오전이었다. 전시회장까지는 느긋이 걸어가도 될 터였다. 에스텔은 광장까지 가서,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기로 했다. 집에서 챙겨온 버터 끼운 크루아상과 우유병의 무게가 유독 달갑게 느껴졌다. 그래, 오래간만에 뚜렷한 할 일, 해치워야 할 의무 없는 외출이었다. 오늘만은 혼자 느끼는 즐거움까지 반길 것이다.

가까운 곳에, 간혹 실버와 산책을 나오면 들르던 아케이드가 있었다. 주말이라 문을 닫았을지 몰라도 한 번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에스텔은 슬슬 묵직하게 느껴지는 가방을 고쳐 매고 야무진 걸음으로 공원 울타리를 넘어섰다.

수목과 보도를 나누는 낮은 울타리를 따라가면, 탁 트인 광장이 등장했다. 겨우내 퇴색하여 회벽만 못하게 되었던 분수대는 관리인의 노력으로 깨끗이 닦여 눈부시게 물을 뿜어냈다. 찰랑찰랑 떨어지는 물소리와 가벼운 물보라를 몸에 묻히며, 에스텔은 푸하 큰 숨을 내쉬었다. 이 근처로 오니 여느 여름처럼 활달하게 호흡이 벅차지는 것 같았다.

셔터를 내린 가게들 틈에 카페가 의자를 내놓은 것이 보였다. 에스텔은 반갑게 달려갔다. 손에 쥔 딸기무늬 보따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팝송. 직원이 웃는 얼굴로 에스텔을 반겼다.

 

“핫초코… 아니, 아이스 초콜릿 라떼요.”

 

에스텔은 제법 낭랑한 목소리로 직원과 사소한 대화를 즐겼다. 그 애는 막 새 학기를 보낸 대학 신입생으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별로 힘들진 않아요. 재미있는걸요.” 정말이에요, 파트타이머가 가볍게 덧붙였다. 하지만 에스텔은 표정이 조금 굳고 말았다. 고된 파트타임 업무와 데이트를 병행하던 실버가 생각나고 만 것이다.

어쨌든 간에 곧 음료가 나왔다. 에스텔은 빨대를 쪽 빨며 의자를 찾았다. 물이 굉장하게 튀는 바람에 분수대에는 앉을 수 없었다. 칠이 벗겨진 벤치에 몸을 내리자, 에스텔은 무너지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버가 아닌 사람과 일상적인 말을 주고받은 게 얼마 만인지.

따사로워진 이른 낮 햇살에 점차 기온이 올라갔다. 달고 시원한 음료가 더욱 기꺼웠다.

허전하게 먹은 아침 식사에 보태려고 싸 들고 온 크루아상을 꺼내자 비둘기들이 슬슬 다가왔다. 에스텔은 그만 웃음보를 터뜨리며 빵조각을 잘게 찢어 멀리 뿌려주었다. 희고 갈색인 비둘기들이 금세 떼를 맺으며 에스텔 주위에서 구구거렸다.

차가운 버터를 끼운 크루아상은 싸매서 오느라 버터가 빵에 녹아들어 있었다. 귀퉁이를 떼어줘 버린 빵을 베어 물던 에스텔은 신선한 가염버터 맛을 느끼고 싱긋 웃었다. 라떼는 초콜릿 청키 칩이 가볍게 씹혀 차가운 맛과 잘 어우러졌고, 에스텔이 아침에 내려 마신 커피와는 달리 쓴맛이 적었다. 에스텔은 다시금 아리송해져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같은 기계로 내리는데, 실버는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는 걸까.

빵을 다 먹어 치우고 나니 전시관이 열릴 시간은 한참 지나고도 남았다. 에스텔은 한낮의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졸 뻔했다가, 약간 남은 차가운 음료를 빨아 마시며 식곤증을 쫓아냈다.

멍하니 빨대 끝을 잘근거리던 그녀가 불현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시회관 외벽에 걸린 작은 그림들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화가였고, 합동 전시인 모양이었다. 제각기 스타일이 다른 회화를 보니 마음이 동했다.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도록과 팸플릿도 챙겨와야지, 그녀는 마음먹으며 한껏 부푼 기분을 만끽했다. 실버를 신경 쓰고 들어온 의뢰작을 그려내느라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건 굉장히 간만이었다. 실버와 함께 바다에 갔던 날은, 글쎄, 에스텔은 당시를 푸르고 쓸쓸한 광경으로 기억했으니까.

어딘가의 유물 양식을 흉내 내 멋들어지게 지은 계단은, 그 멋에 비해 층계가 상당하고 좁았으므로 에스텔은 낮은 경사를 거닐면서도 몇 번이고 서성대듯 멈추어 섰다. 난간에 떨어진 새똥 하나 안 보이는 걸 보면 관리에 힘쓰는 것 같긴 했다. 마침내 3층 높이의 본관에 올라서선 에스텔은 헥헥거리며 닫힌 매표소를 지났다.

바닥에 붙은 화살표 스티커를 따라가는 게 관람 동선인 모양이었다. 조악하긴 했지만, 무명 화가 몇이 함께 함께하는 합동작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었다. 오히려, 아무리 변두리라지만 번듯한 예술회관에 그림이 걸리는 게 운이 좋은 일이었다.

에스텔을 두리번거리며 고요한 전시관에 들어섰다. 마침 애매한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유명하지 않은 전시라 그런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이 넓은 곳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기분이 좋았고, 에스텔의 걸음은 점점 평소의 명랑함을 되찾았다. 새 구두에서는 걸을 때마다 작은 또박또박 소리가 났다.

첫 번째 구역에는 정물화 대여섯 점이 걸려 있었다. 유화였는데, 마치 수면을 통과해 쳐다본 물건처럼 우연성을 염두에 둔 터치에 한여름 노을처럼 강렬한 색조가 인상적이었다. 쓰는 색이 자유분방하고 강한 데도 한 집처럼 어우러지는 그림들이었다. 에스텔은 화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두 번째 화가는 에스텔이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보다 많이 할애된 공간에 커다랗게 걸린 액자 한 점으로, 군데군데 서툰 점이 보였지만 사물을 배치한 솜씨가 훌륭한 풍경화였다. 에스텔은 감탄하며 천천히 세 번째 섹션으로 향했다.

거긴 옷장처럼 패인 공간으로, 한두 사람이 들어서 있으면 협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좁았다. 그림들도 거기에 맞춘 것처럼 위아래로 길쭉했다. 무얼 그렸는지 추측하기 힘든 한국화들이었다. 먹선이 가늘고 간혹가다 겨울눈처럼 번져 있었다. 의도한 점일지, 의도치 않았지만, 완성도가 높아져 내버려 둔 부분일지 궁금했다. 액자에 얼굴을 바짝 대고 살펴보던 에스텔은 별안간 눈물을 흘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깨닫자마자 화득득 손등으로 닦아내었지만, 눈물은 계속 흘렀다.

그것은 불교 신상(神像)이었다. 늪의 맑은 수면에 반가부좌를 틀고 앉은 보살이 혼탁하게 먹선이 뒤얽힌 지하로 한쪽 발끝을 내리고 있었다. 쭉 뻗은 엄지발가락에는 균열이 가 있었지만, 마치 수초 뿌리처럼 여겨질 뿐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배꼽에서 피어난 연꽃 한 무더기가 상체를 거의 가리어, 이 탓에 그림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했다. 가슴팍에 이르러선 연꽃잎이 흐드러져 은은한 미소와 내리깐 눈을 거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텔이 멈추지 않는 눈물방울에 당황하며 하도 비벼 발개진 손등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에스텔은 초록색 체크무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나이 젊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가까이에서 먹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에스텔은 손수건을 얼른 쓰고 돌려주었다. 아직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지만, 후다닥 돌아서서 달려 나오는 등 뒤로는 보채거나 멈추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독하게 부끄러웠다. 남의 전시장에서 훌쩍거리고나 있다니.

에스텔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연신 찬물로 얼굴을 훔쳐냈다. 화장이 지워져 얼룩진 진줏빛 낯을 보고 있자니, 아침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눈물이 많은 날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눈물이 많아진 사람이거나. 마음은 아직 울적한데, 눈물은 금세 그쳤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울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지만 이유 없이 서글픈 바람에 되레 야속한 느낌이었다.

에스텔은 힘들게 올라섰던 건물 계단을 호흡도 가빠지지 않고 날 듯 내려갔다. 누가 보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으로 알 법했다. 창백하고 불그스레해진, 화장마저 부분부분 지워진 볼썽사나운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숙이고 한참 걷던 그녀는 아무 다이닝에나 들어가 앉았다. 창가 자리에서 고개를 들자 얼굴은 생각보다 멀끔해 보였다. 거울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유리나 물 위에 비친 물건은 뭐든 새것처럼 보이니까.

식사는 형편없었다. 기분이 형편없기 때문일까. 두꺼운 팬케이크는 속이 다 익지 않아 들척하게 달라붙었고, 커피는 에스텔이 만든 것과 비슷한 역한 맛이 났으며 생선과 감자를 함께 튀긴 요리는 밋밋하고 퍽퍽했다. 심지어 감자는 소금을 지나치게 뿌려서 씹히는 건 오로지 굵은 소금뿐인 것 같았다. 그래도 걸어 다녀 배가 고팠고,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한 데다 음식을 남기는 건 예의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에스텔은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삼켰다. 따뜻한 물과 함께 먹으면 고역스러운 가루약을 알약으로 만들어 삼킬 때처럼 조금은 먹을 만한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믿어보기로 하고 다디단 샴페인을 시켰다. 실버 없는 축하주라니, 지나친 아이러니에 한층 울적해지기만 했다.

달리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어서, 에스텔은 술 한 병을 놓고 홀짝이며(샴페인은 맛이 퍽 괜찮았다) 자리에 누른 듯이 앉아 있었다. 썩 좋지 못한 음식을 먹었으니 자릿값이라도 때우고 싶기도 했다. 뜻을 알아챘는지 시간제 근무자로 보이는 종업원이 다가와 식탁을 치우고, 커피를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에스텔은 그냥 따뜻한 물을 한 잔 더 청했다.

술에 취해 다시금 뺨이 발그레해진 에스텔은, 종업원을 보내고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이곳에 실버와 함께 온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도 음식은 식어 빠져 맛이 없고 포도주는 괜찮았다.

잔잔한 물이 가까이 보이는 강변 카페테리아였다. 슬슬 해가 지니, 바깥에 나서면 봄이 다 가기 전 마지막 찬바람이 불어닥칠 터였다. 에스텔은 상상만으로도 몸을 옹송그렸다. 그리고 일찍 나설 생각을 얌전히 접어 두었다.

땅거미 지는 강물이 할로겐 조명 아래에 진열된 싸구려 핀처럼 반짝거렸다. 가게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수 그림자가 왕관 장식처럼 길게 늘어서는 한 저녁. 문을 열고 들어와 앉는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다. 에스텔은 코가 빨개진 채, 몽롱한 눈으로 물결치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변을 따라 놓인 산책로로 혼자, 아니면 둘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지나가고는 했다. 아마 전이었다면 에스텔도 실버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산책을 했겠지. 날이 제법 따뜻해져, 털 장화도 필요 없는 계절이니까. 눈이 녹은 흔적조차 죄 사라진…….

인제 보니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부셔 불쾌했고, 유리창은 덜 닦여 뿌연 데다가 술도 집주변 주류점에서 사는 것보다 못했다. 추억할 것도 없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실버가 없으니까!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든, 누구와 대화를 나누든, 손수건을 빌려주는 과묵하고 상냥한 행인을 만나든 다 소용없었다. 에스텔은 술김에 인정해버렸다. 실버가 없는 생활은 장밋빛 겨울처럼, 스산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세상은 원체 그런 곳이었고, 지금껏 에스텔은 가족과 친구, 연인의 손에 맡겨져 오로지 여름만을 만끽해온 것뿐이었다.

에스텔은 눈물을 삼키는 대신 술을 마셨다. 어느새 반병이 사라져 있었다. 물잔을 집으려다가 거하게 헛손질한 그는 손끝에 부드러운 가죽을 느꼈다. 들고 왔다가 깜빡 잊어버릴 뻔한(일찍 나갔다면 두고 왔을 게 뻔한) 메시지 백이 손에 잡혔다. 무심코 열어보니 스케치북이 잡혔다.

그래, 그림이나 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적어도 돈을 벌어 실버에게 좋은 책을 선물할 수 있을 테니까.

마침 한 연인이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서로 무어라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웃음꽃 피운 얼굴은 즐거워 보였지만 걸음은 무척 더뎠다. 에스텔은 연필을 눕혀 울적하게 해가 가라앉는 강을 슥슥 그려내고, 보이는 것보다 사람을 크게 그려 넣으며 노을 그림자가 드리워 잘 보이지 않는 그들의 얼굴을 마구 상상해 스케치했다. 중간부터는 아예 창밖에서 시선을 돌리고 식탁에 엎드리다시피 집중했다. 평소의 에스텔이라면 노을 지는 아름다운 강가만을 보았겠지만 실버의 빈자리는 어울리지 않는 시기를 마음속에 집어넣은 듯했다.

그림을 마무리하며 에스텔은 설핏 웃었다.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비탄이 어려 있는 미소였고, 그것을 증명하듯 그녀는 연필을 팽개치며 등을 뒤로 기대었다. 가시지 않는 술기운에 절로 한숨이 났다.

깜짝 놀란 건 바로 그때였다. 에스텔은 그들의 옷을 곧장 알아보았다. 에스텔이 화폭에 담아내던 연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스텔은 얼른 스케치북을 덮으려고 했지만, 연인이 동시에 말을 걸어 어정쩡하게 관두고 말았다. 그들은 동시에 저기, 하더니 저들끼리 웃었다.

다시 말이 겹치기 전에 한 사람이 선수 쳤다.

 

“혹시 저흴 그리신 건가요?”

 

어린 학생처럼 뵈는 그들은 이 형편없는 식당에 값만 보고 들어온 게 분명했다. 셔츠를 껴입고 청바지를 받쳐 입은 몰골은 근교에 사는 가난한 대학생 같았다.

그나저나 얼굴은 완전히 다르게 그렸건만, 어떻게 알아본 걸까, 에스텔은 홀린 듯이 대답했다.

 

“네…… 그렇긴 한데,”

“신기한 우연인데, 팔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러니까, 저희한테요.”

“그러니까 이건.”

 

실버에게 꽃과 책을 사 줄 삯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어쩐지 허탈해져 에스텔은 미완된 그림을 스케치북에서 확 뜯어냈다. 시기심에 그린 그림이 제값에 팔릴 리 없지 않은가.

 

“그냥 줄게요.”

 

그림을 건넬 때, 에스텔은 그들이 어떻게 그려진 얼굴을 알아보았는지도 눈치챘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서로가 전부라는 양 사랑스러운 눈길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금처럼.

그런 연인들이 감사하다며 수선을 떠는 새에 에스텔은 식당을 나와버렸다.

나오는 길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라, 에스텔이 발을 대는 곳마다 작열하는 꽃잎처럼 붉었다. 그림자는 또 어찌나 짙은지 낮에 본 화공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아프고 아직 술기운이 홧홧한 탓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줘버린 걸 후회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간 후회했겠다 생각하면서도 소중한 걸 놔버린 듯이 속이 상했다.

에스텔은 실버와 자신을 그렸던 것이리라. 그녀가 아는 행복한 연인의 얼굴을. 그런데 의식지도 못하고 넘겨버렸으니 아쉬운 마음이 당연했다. 마치 지금의 실버와 에스텔 같지 않은가, 웃는 얼굴이 지워져 버린, 떨어져 지내는 그들.

 

집으로 오는 길에 에스텔은 꽃을 사서 트램에 탔다.

휴일 저녁 트램은 북적거렸고, 서서 가는 내내 품에 안은 작약 한 다발은 방해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꽃대가 부러져 있었다.

게다가 조금도 화사하지 않았다. 지금껏 일생이 아름다웠던 건, 항상 등을 켠 집처럼 포근했던 건 제 자취를 쫓는 실버의 눈길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꽃다발을 선물했을 때, 눈가를 조금 붉히며 화병으로 쓸 목이 긴 병을 씻는 그가 없다면, 꽃은 아름다울 필요조차 없는 것이리라.

도시가 환한 불야성의 밤, 에스텔은 불을 전부 끄고 어둠 속에 앉아 무고한 작약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꽃이 벌어져 행복한 실버를 뱉어낼 것처럼.

적어도 오늘 밤엔 웃는 실버가 나오는 꿈을 꾸게 해주리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