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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새가 유실된 지난 밤에 관하여
2월 중순이래도 겨울바람은 칼날처럼 불어들었다. 연신 덜컹거리는 기차 칸에 세 시간 넘게 타온 터라 둘은 우선 조금 쉬기로 했다.
탁 트인 역사는 바닷가에 닿아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여민 코트 속을 파고들었다. 아가트가 빈둥거리는 직원이 돌보는 좁은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여름이라면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이들로 바글바글할 텐데 휴양 비수기인지라 사람이 몇 없었다. 덕분에 멀리서도 희미하게, 밀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커피가 생각보다 뜨거워 입술을 오므렸다. 그 모습을 본 아가트가 물었다.
“춥지 않습니까?”
“…소, 손이 따뜻해서. 별로. 당신은?”
“그래도 목도리를 하는 쪽이 좋겠습니다.”
도보에 모래가 섞여들어 발걸음 소리가 바뀌었다. 아가트는 역이 끝나는 지점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유진이 그가 목도리를 풀어내는 걸 보며 가만히 고개를 바로 세웠다. 양손에 가득 찬 커피 컵을 들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은 아가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칠한 지 오래된 것 같은 빛바랜 표지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텔로 가는 길을 표시한 것이었다.
유진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예약 시간까지 조금 남았을 텐데.”
“그런가요?”
“바닷가에 먼저 가보는 게 좋을지도… 로비에 앉아 있기는, 어색하니까요…….”
아가트는 웃음도 흘리지 않고 목도리를 리본 모양으로 묶어주었다. 다시 커피를 받아 든 그가 바람이 눈에 모양 잡힐 만큼 거세게 부는 바닷가를 멀거니 보았다. 감기에 들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것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기침 좀 하는 게 유진이 원하는 걸 거절할 만큼 큰 이유 같지 않았다. 아가트는 한층 도타워진 유진의 차림새를 눈짓하고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한 손으로는 손바닥을 데우는 음료 용기를 매만지면서.
단단한 포석에서 내려서니 얼어붙어 서걱거리는 모래가 느껴졌다. 멀리서 볼 땐 물안개가 드리워졌나 싶었는데, 바다는 북국의 여름보다도 창백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때문에 언뜻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실감이 적을 광경이지만 소매 안으로 기어들어 와 몸을 얼리는 차가운 기온 탓에 몸을 옹송그릴 뿐이었다.
아가트는 잠시 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훌쩍거리면서도 시선으로 해안선을 유심히 훑어보는 유진은 파리한 낯빛처럼 색이 빠진 풍경에서 유일하게 붉었고, 눈에 띄었다. 소리 없는 미소가 아가트의 입가에 머물렀다. 유진이 눈치채기 전 금세 사그라졌지만.
그들은 보도와 흐린 백사장의 경계를 거닐며 호텔로 향했다. 건물은 유선형으로 바다를 향해 휘어 있어서, 시야를 가리는 것은 없었다. 회전문을 지날 때야 유진이 슬며시 손을 뺐다. 아가트는 무심하게 빈손을 쥐었다 펴고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쓰레기통 옆에 올려두었다.
그사이 한산한 프론트에 간 유진이 당혹스러운 듯 표정을 바꾸는 것이 보였다. 아가트가 입술을 핥는 그의 곁에 가서 대신 물었다.
“문제가 있나요?”
“프리미엄 더블 룸 맞으신가요?”
“네, 예약했는데요.”
“죄송합니다. 저희 측 착오로 객실이 바뀌었네요. 즉시 조치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다른 룸을 배정해 드릴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래 예약한 객실은 쓸 수 있는 겁니까?”
“예, 입실한 분들께 상황을 알리고 조처하겠습니다. 조식은 예약하셨나요?”
“아니오.”
“죄송한 마음을 담아 조식 무료예약과 리조트 영화관 예매권을 드리겠습니다. 조식은 프론트로 시간대를 말씀해주시면 룸서비스로 올려보내드립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음~ 그렇다면…. 가서 영화 한 편 볼까요, 짐은 내려두고요.”
유진이 남은 말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무어라 더 따지기에도 미안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사람 하나가 로비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아가트는 준비되면 연락하겠다는 호텔 측의 남은 설명을 듣고는 유진과 함께 방부터 보기로 했다.
일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오늘 저녁은 외출하며 보내기로 한 터라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조식 무료에 영화관 매표권이라면.
임시로 주어진 방은 10층이었다. 둘은 잘 청소되고 바다보다 푸른 양탄자를 깔아 둔 복도를 지나 끄트머리 방으로 향했다. 막다른 벽은 창문으로 뚫려 있어서 갑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양탄자며 벽장식이 푸르고 노란 앤틱 등을 달아 두어서 저 창백한 해안보다도 이 안온한 호텔 안이 더 바닷속 풍경 같기도 했다.
슬리퍼를 꺼내 갈아신고선 거실로 들어간 유진이 약한 탄성을 내뱉었다. 양쪽에 날개처럼 방 두 개가 딸린 고급진 방은, 발코니를 넓게 터서 테이블과 대형 천막을 놓았는데, 아직 겨울이라선지 도톰한 소재로 퍼질 법한 파라솔은 접인 채였어도 역시 바다의 정경이 성큼 다가선 듯 보였다. 바다는 바깥에서 직접 볼 때보다는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물에 비친 진주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유진이 발코니 창을 열었다가 몸서리쳤다. 시야 높고 아름다운 만큼 바람이 거셌던 것이다.
아가트가 거실 또 다른 한 면을 차지한 벽난로를 켰다. 나무를 넣어 때는 옛날식은 아니었지만, 제법 아늑한 분위기가 돌았다. 라디에이터까지 켠 아가트는 그제야 겉옷을 벗고 유진의 옷도 받아 걸었다. 그가 말했다.
“좋은데요.”
“그러게 말예요, 이렇게까지….
둘 다 제법 놀란 듯했지만, 대화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찬바람을 쐰 유진이 추위에 젖은 투를 냈다. 유진은 여전히 미적지근한 커피를 들고 있었다.
“추우면, 조금 있다가 나갈까요?”
“좋아요. 방 구경 좀…”
유진은 현관에 내려놓은 짐을 흘낏 보았다. 어차피 외출 후에 제대로 된 예약실을 배정받을 테니 지금 풀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값지고 청결한 공간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에 마음이 놓였다.
주요하게는 직물로 장식한 작은 침실은 침대와 좁은 탁자가 전부였지만, 남은 한 방에는 측백나무 옷장과, 둥근 고양이 발 욕조가 자리한 욕실로 이어진 화장대까지 거의 아파트 침실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유진은 침대에 털썩 앉아 침대 헤드의 고상한 장식을 쓰다듬었다. 진실로 오래된 것들을 기록하고 다루는 그가 보기에는 상술에 불과한 모조작이었는데 그래도 이야기가 담긴 부조가 머리맡에 있다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가트는 문간에 기대고 서서 풍부하게 채워진 방을 훑어보다가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지 않네요.”
아가트가 천천히 걸어가 유진의 곁에 앉았다. 침대가 푹 들어가서 유진의 몸이 그쪽으로 약간 쏠렸다. 유진이 엉거주춤 자세를 바로 하는 사이 아가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찾아보니 고전영화 재상영을 한대요.”
“…….”
“근래 나오는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면, 그것도 괜찮을 겁니다.”
“딱히 상관없지만… 제목이 뭔데요?”
“<티파니에서 아침을>.”
“…더 근래 작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개봉이면….”
“다른 걸 볼까요?”
“아니요. 세속적이고, 역사적이고, 그러니까, 상관없어요.”
유진이 비싯 웃었다. 그새 몸이 기울어 그는 아가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있었다. 겉옷이 벗겨진 몸에 타인의 온기가 닿자 괜스레 야릇한 기분이었다. 그가 시선을 돌리며 팔을 쓸어내릴 적에 아가트가 살며시 간격을 대주었다.
라디에이터가 돌아가자 방 안은 따뜻해져, 둘은 밖으로 나서는 걸 조금 머뭇거렸다. 특히 유진은 외투가 얄팍했다. 아가트는 다시 유진에게 목도리를 빌려주며 자신은 장갑을 끼었다. 장갑과 목도리가 세트처럼 같은 색이어서 유진은 새삼스러운 마음에 사로잡혔다. 아가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역시, 그 표정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여행지에 왔기 때문에 마음이 술렁이는 것이다. 별 건 아닐 터다. 유진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자신의 수런거리는 감정을 물끄러미 관조했다. 배우와 제작 배경에 관해 떠올리자, 텐션이 잠시 올랐던 게 거짓말인 듯 평소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영화관까지 가려면 광장을 지나쳐야 했다. 유진은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바람이 불 때마다 목을 움츠렸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대리석 분수대는 낙엽을 얹은 채 말라 있었다. 여름이라면 사람들이 대수롭잖게 물을 맞으며 샌드위치를 먹을 법한 자리였지만, 지금은 노천카페 바깥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한 테이블뿐이었다. 관광지라는 게 으레 그렇겠지. 유진이 불 켜진 카페테리아 내부를 바라보는 걸 아가트는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말했다.
“저녁에는 바람이 덜 불 겁니다. 내일 날씨 덕분에 기온이 올라가는 것 같으니까.”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저녁은 이 근처 다이너에서 먹어도 괜찮겠습니다. 산책할 겸.”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유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신발에 꿰인 발가락이 얼어붙고 있었다. 둘은 걸음을 재쳐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유원지에나 있을 법한 전광판과 화려한 기둥으로 조율된 인테리어였다. 매표권을 쥔 아가트가 티켓을 교환해오는 사이, 유진은 낡은 게임장 옆에 작게 붙은 펍에서 콜라와 작은 컵에 담긴 팝콘을 사 왔다. 희미한 기억대로라면 이 중 영화를 볼 때 뭔갈 집어먹는 버릇을 가진 사람은 없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이렇게 하니까. 그런데 보통 영화관에 펍이 딸려 있던가. 뒤에 늘어놓은 고도수 술병들로 추정컨대 바텐더로 추정되는 이는 태연하게 맥주잔까지 닦고 있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티켓을 든 아가트가 다가왔다. 두 손에 콜라를 잡은 채 어정쩡하게 팝콘을 안고 있던 유진이 그에게 가슴을 내밀어 간식거리를 건넸다.
아가트는 티켓 한 장을 건네주며, 손에 들리는 것이 단검인지 비스킷인지 관심 없다는 태도로 팝콘 컵을 받아들었다. 그게 어쩐지 우스워져서 유진이 설핏 웃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아뇨. 으음, 얼른 들어갈까요?… 시간이 애매하니까 가서 앉아 있는 게… 좋겠습니다.”
영화티켓은 빳빳하게 코팅된 종이에, 콘셉트인지 케케묵은 디자인이었다. 책갈피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유진은 잠시 광택 이는 싸구려 종이를 노려보았다. 취미 삼아 이런 걸 모으는 사람들도 있었지. 이렇게 예쁘게 꾸며 놓았다면 소장가치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하루, 단지 바닷가 호텔에 숙박했을 뿐인 하루를 그날 본 영화를 빌미 삼아 떠올릴 수 있을까. 물론 그럴 것이다. 유진은 기록이 꼼꼼한 편이니. 하지만 추억과 기억은 다르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깜깜한 상영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좋으냐 싫으냐 둘 중 하나로 대답하라 물으면, 흑백 논리적으로 답하라는 상대의 필사적임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쪽일 것이다. 기실 그들은 취향이랄 게 드물고, 있어 봐야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이니까. 유진이 특별히 좋지 않다, 고 자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은 ‘나와 같은 관객’을 선호하지는 않을 테니까. 만들고 싶었던 장면이 저녁거리라도 된다는 듯 칼질하는 비평가의 의견이 온당하다 인정하는 창작자가 드물다는 걸, 유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이 상영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하며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기다려보았지만 관 내부를 경비하는 직원 하나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채 타이틀이 올라갔다. 상영 후 십 분이 지났을 때쯤엔 유진은 이미 수첩에 달린 볼펜을 손가락에 끼운 채 돌리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지도 않는 데다 연기에 불과한 작품을 몇 시간이고 앉아서 본다는 건 낯선 감각이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같은 행동을, 같은 장면을 반복할 것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의 기록물이었으므로, 오래된 영화를 리마스터링하는 추억의 미화적 감정을 유진은 알쏭달쏭하게 느끼는 편이었다. 애초에 저들끼리 보라고 걸어 둔 걸 독점한 극장 안에서 누리는 게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작품이 걸려 있는 한은, 이 스크린은 같은 역사를 방영할 것이다. 그리고 잔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웹상에 누군가 적어 놓을 후기나, 영화 일기 따위의 사적인 기록물을 배출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혹자의 예기치 못한 감정을 사겠지. 흥미나 경멸 이상으로 감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진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노트를 집어넣었다. 영상물보다는 분석 논문과 시나리오집 등의 활자물에 익숙한 그에게 스크린에 집중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런 인쇄물은 시퀀스 간의 촘촘한 의미를 재전유할 뿐 배우의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다.
옆을 보니 아가트는 묵묵히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서 송출되는 브라운스톤 주택의 회백색 빛이 콧잔등과 눈동자에 그대로 비쳤다. 화면은 대체로 밝았고, 그래서 유진은 아가트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귓가에는 여배우의 독특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장면 속에서 창문을 열고 남자의 집에 침입한 여자는 제집인 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듯 발칙하게 굴고 있다. 마치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처럼. 남자는 여자를 받아준다. 로맨스 클리셰적인 신사의 면모는 아닐 터다. 남자의 직업은 천박하다고 부를 수 있는 도피성 애인 대행에 불과하니까.
그들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렇게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유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안경으로 구분되는 시야에는 스크린만 꽉 찰 뿐 옆에서 아가트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영화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진은 기록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영화를 객석에 앉아 감상할 땐 그 줄거리를 축약할 수 없는 법이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야 펜을 들어 올리는 것이지.
생각보다 명쾌하기만 한 내용은 아니었고 그들은 기이한 편안감과 침묵 속에서 나쁘지 않은 감정을 떠안고 나왔다. 티파니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또는 세간에서 환호하는 로맨틱한 전개란 저렇구나, 따위의.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전남편이 딸린 농장과 티파니 간판이 걸린 도심에서 보낸 제 삶의 한복판에서.
도망치다가, 결국엔 사람 곁에 머물까.
여긴 바닷가다.
다소 습한 저녁 바람이 나긋하게 뺨을 훑고 지나갔다. 유진은 그것이 영화관 안에서 느꼈던 살갗의 기이한 간지러움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시선이 부드럽게 상대를 훑는 듯한.
로비는 맥주를 마시러 온 손님들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므로 둘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상영관보단 주점 쪽에서 이익을 얻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관광지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도 많진 않겠지, 아마 구색으로 붙어 있는 건물일 것이다. 아가트는 유진의 손을 잡고 걷다가 작은 광장에 잇댄 카페테리아를 발견했다. 전면 유리창에 비친 바로는 바 자리에 몇몇 손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 대개 한산했다. 노천 자리도 모두 집어넣은 채였고.
바닷바람을 느낄 겸 분수대에 앉아 식사하기로 하고, 아가트는 식당 주력인 오픈 샌드위치를 주문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물밑처럼 파르스름한 어둑서니가 서린 광장에서 고개를 들었다. 바다와 맞닿은 저편은 가로수로 모래와 포도를 나누어 놓았고, 너머로 보이는 해변엔 잘못 굴러온 잡초더미가 우거져 쓸쓸해 보였다. 젖은 잿더미와 비슷한 겨울 냄새와 더불어 먼바다의 냄새가 불어왔다. 내일 비가 내린다더니 하늘이 어둡고 붉은 머리카락을 적시는 쪽빛 바람은 눅눅했다.
꽤 큰 자리를 차지한 중앙 분수대는 말라붙어 있다. 초여름에 접어들면 때를 벗기겠지만 지금은 신화 인물처럼 튜닉을 입은 여인이 흐르지 않는 물병을 낀 채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불현듯 유진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휴대용 만년필 깍지를 이로 물어 뺀 그는 여신상의 마모되어가는 콧날에 시선을 모은 채 무언갈 적어 내려갔다.
아무도 날 우리에 가두지 못해요.
난 내가 누군지 몰라요. 이 고양이처럼……,
이름이 없고 누구의 소유도 아니에요.
우린 서로를 소유하지 않아요. 그런 대사였다. 집중해서 보지 않았는데도 명징하게 적힌 문장에 유진은 잠시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이 불에 탄 듯 핏발이 선, 설피운 구름이 쪼개져 든 낙양에 비추어졌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가까이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아가트 맥과이어가 양손에 뜨거운 커피를 든 채 서 있었다. 손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에, 그러나 시선만큼은 이미 저문 햇살처럼 따스했다. 유진은 가만히 마주 보다가 문득 미소 지었다.
바람에 앞머리가 한들거렸다. 시야 안으로 마지막 저녁의 잔상이 느긋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유진은 달큰하게 취한 채 방에 들어섰다. 직원이 짐을 미리 옮겨주어 본래 지냈어야 할 방 안은 정돈되고 완전한 상태로 그들을 맞이했다. 둘은 외투를 입은 채 침대에 쓰러졌다. 이 순간이 냄새로 화한다면 아릿한 포도주로밖에는 설명하지 못하겠다고, 아가트는 생각했고, 둘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입안에 감도는 술맛과 아직까지 감돌고 있는 향취에 기분이 해이했다. 아가트가 몇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 또한 술기운에 나른해진 것이리라.
너른 침대 반쪽 끝에 누워 있던 유진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는 유진의 얼굴에서 안경을 치우고 눈을 감겨주었다. 잘 자요, 그런 말이 들릴 것 같기도 했고,
대칭형의 방에서 그는 꿈을 꾸었다.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었는데 바깥쪽 벽이 없어 침실에 물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빛깔은 적도 부근 해안처럼 에메랄드였다. 어떻게 보아도 남국이었기에 유진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우리가 본 바다는, 시체처럼 희었는데.
찰싹이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짠물이 발등을 치고 먼저 나아갔다. 폭격을 맞은 듯이 부서진 벽 바깥에 섰을 때, 옆을 돌아본 유진은 거기에 석상이 서 있다는 걸 알아챘다. 세월에 풍화되어 잔뜩 무뎌진 신상에서 둥근 얼굴 형태 외의 것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텅 빈 항아리는 반쯤 부서진 채 해수를 뿜어내고 있어서 본래 소쿠리를 깎아낸 거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유진이 신상의 손을 만지려고 할 때 거기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부수고 나온 듯 상은 우르르 무너져 조약돌 무더기가 되었지만 유진 맥과이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아가트?
파도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현란한 태양 빛에 서로의 얼굴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낯선 경험이라 생각하자마자 상대가 손을 뻗었다.
“잘 잤어요?”
아가트가 말했다. 유진은 막 눈을 떠 흐리고 좁은 시야에서 제 손가락 끝을 알아보았다. 슬쩍 움직여보자 잘 딸려왔다. 가위에 눌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햇살 한 알도 맺히지 않고, 먹먹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창을 치는 건 어두운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긴 물방울이었다. 유진은 겨우 몸을 일으켜서 안경을 썼다.
“아가트 씨.”
“예, 유진 님.”
그러곤 잠시 막막한 침묵…… 한 침대에서 잤던가? 가벼운 숙취에 어지러웠다. 아가트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유진이 말했다.
“이 방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잠시 마른 목이 메었다.
“당신은 저쪽 방에 있다가 벽을 넘어서 나왔는데…… 벽은 아마 무너져 있어서…… 당신이 석상인 줄 알았어요,”
아가트는 잠자코 말을 들었다. 유진은 두서없이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헛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꿈을 꾸었든 어땠든 무슨 상관인가. 여긴 여름이 아니었고, 물살이 창백한 차갑게 포말 이는 바닷가. 조약도 대신 거친 모래톱이 버석거리며 발에 걸리는.
유진은 몸을 끌고 일어서서 통창에 이마를 기대어 보았다. 안경이 걸리며 달칵거렸다.
비 그쳐가는 새벽 바다는 칠흑 같았다. 멀리서 여명이 비어지고 있었고, 유진은 참을성 있게 그 가느다란 빛이 파도에 한 줌 아침 주는 것을 기다렸다. 고개를 한참 내려야 모래가 보였고 때문에 유진은 이곳이 아예 다른 세계인 것처럼 느꼈다. 그야말로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그래서 유실된 것조차 없는.
태초의 땅은 물이었던가.
“유진.”
아가트가 가다듬은 목으로 그를 불렀다. 유진은 돌아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희미한 미소 걸린 얼굴이었다. 유진은 그저 끄덕여주었다. 그러다가, 이유 없이 손을 뻗었다.
또 까닭 모르고 마주 잡아 준 손에서 그 표정처럼 퇴색된 온기가 느껴졌다. 막 잠에서 깬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체온이 각별했다. 유진은 손가락을 살며시 움직여 아가트의 손에 난 구멍의 테두리를 더듬었다. 수축한 수평선처럼 둥글었다.
유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냉랭한 불길 같은 아침. 눈꺼풀 안쪽이 주홍으로 살랐다. 그는 지금 눈을 떴을 때 방 안이 어떤 광경일지 알았다. 아침 해가 순간적으로 채색하여 모네의 그림 같은 찬란함이겠지.
방 안은 건조했고 유진은 마른 입술로 말할 수도 있었다. 그는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잤어요? 잔물결처럼 밀려오는 찰라의 현존 속에서.
누군가 입가에 물을 대는 듯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말했다. 잘 잤어요.
꿈을 꿨어요. 당신에 관한 꿈을요.
뜯겨나간 새장처럼 지어진 방. 우리는 진주조개가 죽어간 뭍의 발톱을 어리둥절하게 넘어섰고, 우리는 한결같이 자유로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