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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커플 드라이브 커미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72번 해안도로는 각종 휴게시설이 입점하여, 사실은 마을에 인접해 있다고 해도 좋은 관광지였다. 해외 자본가들의 흰 별장 저택이 한참이나 들어서서 부내를 풍기는 지역이기도 했다. 테베는 깎아지른 절벽 끝에 앉았다면 앉았지 이런 우글우글한(그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날의 폭풍으로 비행기가 연착한 김에, 그리고 크릿이 시장기가 돈다는 듯 굴었기 때문에 짧은 체류를 승낙했다.
슬쩍 눈치를 보고 조금 더 달려 보자고 말한 건 크릿이었다. 그는 가방을 한참 뒤적이는 테베를 가만히 눈여겨보다가 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애초에 그걸 기다린 듯이 테베는 얌전하게 빨간 트럭이 렌트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왜 트럭이냐 하면, 남아 있는 차 중에서 크릿을 견딜 만한 운전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공항 근처 규모 꽤 하는 대여점인데도 그랬다. 대여점 주인이 크릿의 덩치를 보고서는 허헛 웃기도 했다.
테베는, 트럭에 시동이 걸리자 조수석 문을 닫으며, “이 뒤에 타본 적 있어?”라고 물었다. 크릿은 동생들이 위험하게 장난치는 걸 막아본 적은 있어도 짐칸에 실린 적은 없다고 답했다. “나는 있어.” 테베가 다시 말했다. 기분 좋은데, 하며 뒤를 돌아보는 게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아서 크릿은 손수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차는 소음도 움직임도 심각했다. 꾸러미를 가득 실은 것처럼 차체가 요동쳤고, 테베는 차가 급한 코너를 돌 때 함께 기울었다. 크릿은 그 대단한 가벼움에 관해 생각하다가 이내 운전에 집중하고는 했다.
테베는 크릿을 흘끗 돌아보다가, 창밖의 정경에 마음을 빼앗긴 듯 눈을 빛냈다. 노을녘이 테베의 두 눈에 들어차 있으므로 검보라색, 푸르스름한 자줏빛으로 물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크릿은 거의 그림자로만 보였다. 바닷물이 까만 바위 한 점 없는 바닷가에 찰싹 부딪히는 모습은 가히 찬란한 정황이어서, 미끄럽게 반짝이는 모래에 드리운 사람 그림자 정도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사실, 테베는 거의 모든 인간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하늘이 금빛이었고 테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걸 보라고 했다. 크릿은 운전에 해가 가지 않을 만큼 흘낏 보고 나서는 앞창의 차양을 내리고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는 하와이안 셔츠처럼 무늬가 복잡한 옷을 입고 있어서 휴양지의 휴가꾼 같기도 했다.
그럼, 여기 사는 깨나 부내 나는 인간이겠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테베는 피식 웃었다. 지나치게 안 어울렸기 때문에, 차라리 장사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테베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가 멈추었다. 크릿은 천천히 입을 뗐다. 치즈버거를 사 올 텐데, 청량음료가 낫겠냐 커피가 낫겠냐 하는 물음이었고 무척 신중한 발음이었다. 테베는 망설임 없이 “슬러시.”를 주문했다. “오바마 버거인가?” 테베가 바깥에 선 점포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서편, 그러니까 도로 바깥쪽에서 쬐이는 석양이 워낙 강렬해 안짝에 불을 켠 창문보다도 외벽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불길도 곧 가실 거라고 테베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따라가지 않고 차 안에 곧잘 앉아 있었다. 오늘 이곳의 태양은 내일 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보고 있을 테니까 다녀와”라고 그가 말했다. 마치 자신이 목격한 것은 크릿이 알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간에 크릿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곧 커다란 플라스틱 컵에 담긴 무지개 빙수에 한 손을 내맡긴 채 돌아왔다. 높게 쌓인 무지개가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냄새를 맡고 보니 치즈버거 쪽이 구미에 당겼던지 테베는 종이봉투를 먼저 받아 들었다. 크릿이 컵 가장자리로 흐르는 얼음물을 닦는 동안 테베는 치즈가 녹아 노르스름한 감자튀김을 한 조각 집어 먹었다.
황홀경에 가깝도록 차 안은 뜨겁고, 빛났고, 먹음직스러운 냄새로 가득 찼다. 테베는 감자튀김을 조금 먹고, 그런 다음 반쯤 녹아내려 형이상학적인 색채가 되어버린 슬러시를 쪽쪽 빨기 시작했다. 크릿은 군말 없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남은 치즈버거를 먹어 치웠다. 결과적으로 테베는 기름지고 젖은 손을 갖게 되었다.
크릿이 부스럭거리며 테베의 손을 닦아주면서 물었다. “트럭 뒤에 타면 바람이 느껴지나?” 진지한 투는 아니었기에 테베는, 그때 자신의 머리칼이 얼마나 날렸던가를 기억해보았지만 어릴 적이라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뺨을 간질이던 머리칼이 기억나 “오토바이만큼은 아니지만.” 라고만 말했다.
“오토바이보다는 안전한가?”
“글쎄, 트럭 뒤에 타는 게 재밌었어.”
어린 시절에는 뭐든 재미있는 법이긴 하지, 크릿은 대강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여간에 당장 테베를 짐칸으로 내몰고 싶지는 않았다.
경중이 다른 식사를 하며 샌들을 벗고, 시트를 뒤로 누이기도 하면서 시시덕거리다 보니 선바이저에는 기름기 있는 손자국이 묻고 해질녘조차 저물어 갔다. 기어코 바닷빛에 패배해 구름은 암운 어린 녹색이 되어가자 금파길도 닫혔다. 차창을 열면 깨나 떠들석한 것이 느껴지던 인적이 드물어지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색채가 저 모양이니 비가 내릴 터였다.
바닷사람인 크릿도 이런 사실을 깨달아서 다시 시동을 걸고, 테베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창턱에 팔꿈치를 괴려다가 제지당한 테베를 보고는 싱긋 웃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이쪽이 제일 안전하지. 하고 중얼거리자 테베가 맹랑하게 되물었다. “카약이 제일 위험하잖아.” 그건… 그렇지, 하는 크릿의 옆태는 지금까지 푸른 선으로 빛나고 있었다. 테베는 차창으로 몸을 열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수동식 기어를 움직이는 크릿의 손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것이 꿈틀거릴 때 힘줄은 와장창 솟는 숲길의 청록색 계곡을 연상케 했으므로 테베는 그의 눈과 손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손을 잡을 수 있는 거겠지.
테베가, 제 팔을 앞으로 쭉 펴자, “피곤해?” 크릿이 물어왔다. “아니. 좋은데.” 대답에 즐거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크릿은 이 짧은 노닥거림이 마음에 든 듯해 다행이다 하며 공항 쪽으로 차를 몰았다. 가로등이 점점이 켜지고 있었다.
크릿 에버네시의 눈에 얼음을 점등한 이는 그의 손이 무얼 쥐고 있는지 몰랐던 거겠지.
테베는 짤막하게 열린 차창 안쪽으로 새어 들어오는 뜨듯미저근한 밤공기를 느꼈다. 적도 근처이니 언제나 열대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