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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

나사르 본주 2021. 9. 2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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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경험하는 모든 일은 특별하다고 하던가.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고언을, 에스텔은 새삼스레 되새기고 있었다. 실버의 집에 발을 들이는 첫날이었으니까.

실버는 머쓱한 표정으로 먼저 들어가, 가방을 받아준 뒤에는 부산스럽게 손님용 슬리퍼를 찾는 중이었다. 에스텔은 신발도 벗지 않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버와 같은 거구의 남성이 머물기에는 좁은 것 같았다. 에스텔만한 사람이 한 명 산다면 모를까. 방도 하나밖에 없었고, 자주 주인이 바뀌는 셋집인 탓에 벽지에는 얼룩이나 패인 자국, 액자를 걸었다 뗀 자국이 여럿 있고, 무엇보다 천장이 낮았다. 어린 시절 다락방까지 딸린 이층집에 살았던 에스텔에게 거주공간으로서는 부적절해 보였고 낯설었다.

하지만 실버에게는 에스텔처럼 좁은 방으로부터 떠나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이곳이 바로 이겠지. 타인의 흔적 따위가 가득한 곳을 집으로 삼는 건 어떤 기분일지 문득 궁금했다. 실버가 손님용 물건을 찾는 걸 포기하고 털레털레 돌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내 걸 신어. 바닥 청소해서 괜찮아.”

실버가 오래 써서 닳아빠진 실내화를 꺼내주며 말했다. 물건의 꼴을 이제야 확인하고서는 약간 수치스러운 낯이었다.

고마워.”

에스텔의 발은 작아서 얄팍한 슬리퍼에 쑥 들어갔다. 헐렁거리며 종종걸음치고 손을 씻는 게 귀여워 실버는 남모르게 살짝 웃었다. 곧 미소를 거두며 당혹스러워했지만. 그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 뭐 해?”

에스텔이 작은 소파 한쪽을 차지하며 물었다. 실버도 앉는 게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몸이 너무 닿을까 봐 머뭇거리다 결국 부엌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에스텔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래서 실버는 그녀가 좋았다.

평소에는…… 영화를 봐. 아니면 소설을 읽거나.”

보통은 책을 읽는다고 하잖아.”

소설이 좋아. 다른 삶을 꿈꿀 수 있거든. 영화도, 지금이 아닌 데로 도망갈 수 있으니까.”

실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 간절한 것이어서 좋아하는 작품을 꼽을 수도 없었다. 여기에는 이것이, 저기에는 저것이 있고실버는 텍스트 속에서 늘 자기 자신을 잊었으니. 좋아한다는 말 따위로 이 몸뚱어리를 개입시킬 수는 없었다.

에스텔이 빙긋이 웃으며 동의했다.

나도. 내가 40년대의 뉴욕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아. 티파니에서 반지를 고르는 상상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것처럼, 값싼 반지에 이름을 새긴다거나.”

실버도 그 씬을 알았다. 로맨틱한 명장면들, 예컨대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문 리버를 부르는 것, ‘티파니에 들어가 저렴한 것을 구하는 남자에게 그런 것은 없지만 가지고 있는 투박한 반지에 머리글자를 각인해주며 티파니는 이해심이 많습니다하고 돈 없는 그들을 보석상의 고객으로 만들어 주는 장면.

실버가 좋아하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귀부인의 정부 역할을 하며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남자의 집에 할리가 창문을 통해 무단침입하는 장면. 남자는 그녀를 아직 타인으로 생각하면서도, 멋대로 들어와 집안을 휘젓는 걸 막지 못하고, 그녀가 안기면 등을 감싸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할리는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통곡한다…….

그는 자신이 어느 쪽에 이입하고 있는지 늘 혼란스러웠다.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하고 외딴 방법으로 돈을 버는 남자? 아름답지만 외로워 끊임없는 부를 추구하는 여자? 어쩌면 둘 모두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커플인 데에는 이유가 있어, 둘이서 한 사람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안타깝지만 실버는 영화 속 인물이 아니었다. 에스텔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명장면만 알고 있으니, 한 번 다시 보자고 청해왔다. 결국 딱 붙어 앉아 영화를 같이 보게 된 건 그것이 단순히 에스텔의 부탁이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버는 여행의 추억을 되감기 하듯이 장면 장면을 새로운 감회로 느꼈다. 자기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 영화를 봤었는지를 새삼스럽게 되새기면서……. 그러다 보니 에스텔이 잠든 것은 늦게서야 깨달았다.

어깨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온이, 향기로운 머리카락이 느껴지는 것은 진즉에 알았으나 실버는 그 행동에서 큰 의미를 찾지 않았다. 빳빳하게 몸을 세우고 앉아 있는 게 힘든가보다, 이래저래 연애나 교우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로서는 사람 간의 거리를 재는 일에 도리어 둔한 편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하게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읽고 나서 노트북을 닫았을 때, 에스텔이 자신의 어깨에 여전히 기대어 있었고, 체온이 그대로 묻어 있는 가까운 숨결에 몸이 굳었다.

풋내 나는 유월이었으므로 싹이 튼 가지가 창문을 쳤다.

, 톡 하는 소리에 맞추어 실버는 천천히 숨을 끊어 내쉬었다. 둘의 숨소리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실버는 자신의 불규칙한 내쉼이 부끄러워지기 전에 에스텔을 천천히 눕히고, 머리에 쿠션을 끼워 주었다. 소파는 딱 둘이 앉을 만큼 작았지만 에스텔이 웅크리자 딱 맞았다.

에스텔은 무방비해 보였다. 여기에는 지나치게 둘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실버의 뺨이 확 붉어졌다. 손님을 초대해본 적 없으니 타인이 여기에 발을 들인 적은 방을 처음 임대했을 때 후로 가물가물했고, 그래서 실버는 이곳이 집이라고 여겨본 적 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에스텔을 초대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둘을 흘끗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은 안전했다.

실버는, 주인의 기분을 느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잠이 든 에스텔을 내버려 두고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스텔은 더위 때문에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몸에서 보드라운 양모 담요가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여름이 다 왔는데 이런 걸 덮고 잤단 말이야?

자세히 보니 자신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멈추어서 생각도 해보고, 그리고 깜짝 놀라 소파 밑으로 종아리를 내렸다. 자기 전에 함께 보고 있던 노트북이 작은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여명이 드는 새벽이었는데, 밤새 켜놨는지 값싸 보이지만 제법 은은한 무드등이 벽을 비추고 있었다.

실버가 덮어 줬나 봐. 에스텔은 몽롱한 정신으로 담요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청결한 세제 냄새 너머에 포근하고 따스한 체향이 묻어 있었다. 실버의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대로 거실을 차지하고 있을 수도 없어서, 그녀는 얼른 일어나 총총거리며 실버를 찾았다. 닫힌 문은 하나뿐이어서 금방이었다. 노크하자마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미 단정하게 갖추어 입은 실버가 나왔다.

에스텔? 무슨 일이야?”

잠들어서 미안해! 너무 편했나 봐.”

오디오가 물렸다. 하지만 실버는 다시 이야기하는 일 없이 멍하게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실버?” 에스텔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실버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입을 가렸다.

편했다니. 잠이 들 정도로 편안하고, 네게도 안전하게 느껴졌다니이 추레한 곳이.

실버는 새삼 거실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에스텔이 몸을 비빈 흔적이 눈에 들어와 살풋 웃었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네가 있어서 나는 좋았어, 에스텔.”

에스텔의 얼굴이 천천히, 끝까지 빨개졌다. 둘은 홍조를 띤 채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무척 낯설고 왠지 불안해서, 실버는 문을 열어둔 채 나와 부엌으로 도망쳤다. 커피를 내린답시고 물을 끓여 붓고 있으려니 목덜미가 차차 식는 게 느껴졌다.

에스텔은 그 김에 실버의 방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침대와 책상이 들어차 발 디딜 공간도 얼마 없는 평범한 구조였다. 책상에 잇댄 책장은 꽉 들어차 있었다. “구경해도 돼.” 실버가 말하자마자, 에스텔이 빙긋 웃으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외풍이 들어와 한기가 지는 방이었다. 창문은 컸고 아침 햇살이 느릿느릿 기어들어 오는 중이었다. 침대는 이미 정리되어 있고, 그나마 낮은 베개와 담요에 가까운 이불이 다였다. 책상에는 연필과 종이가 몇 개 굴러다니긴 했으나 사사로운 소품은 없었다. 책을 읽을 때 쓰는 독서 등만이 덩그러니 켜져 있어 그 밑에 놓인 빼곡한 글자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장미 넝쿨이 야생적으로 드리워진 느티나무 아래에선, 황야에 부는 바람을 맡을 수 있었다. 진하고 싱그러운 히스 향기가 관능적인 붉은 장미 냄새에 섞여 아찔했다)

처음 보는 책이었다. 만연한 묘사는 읽는 이가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실버는. 의외라고, 에스텔은 생각했다. 낭만시와 연애소설을 읽을 만한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의외의 일면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이 자주 닿아 먼지 없는 책장에서, 얇은 동화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실버, 나 이거 빌릴게.”

그걸?”

실버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투로 물었다. 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그림책으로, 절판된 것인데 헌책방에서 발견해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다. 장서를 모으는 취미는 없지만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한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 그리고 다음에 돌려줄게.”

에스텔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실버는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그가 웅얼거렸다. “……. 또 와.”

꽃향기란 한 점도 나지 않는 도심의 셋방이건만, 실버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아스라한 기분을 느꼈다. 짓이긴 꽃처럼, 그의 삶에 향기로운 물이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