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ㅈ님
씨씨 뷰포트는 말하자면 …… 연속적이었다. 데미 피아프의 판단에 따르면 그렇다. 데미 피아프에게 씨씨 뷰포트는 여전히 얼마간은 블렌헤임이었고, 씨씨의 남편을 잘 모르는 데미에게는 그것이 타인의 성이라기보다는 한때 씨씨가 머물렀던 집과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안온한 적 없던 물가를 기어이 망가뜨린 것은 씨씨 뷰포트였는데…… 데미는 다만 생각했다, 모든 게 망가져 어디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탕아는, 이렇게나마 살아 있어 주는 게 다행일 따름이라고.
씨씨가 알았다면 비웃었겠지. 물론 실제로도 비웃었고. “내가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 당신 눈앞에 살아 있는 것 같아? 난 유령이야, 유령. 그걸더러 사람이라 하는 당신도 나만큼 겁쟁이인 거야!”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데미 피아프는 잠긴 문을 열쇠로 열었다. 이것이 제 손에 있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문을 열어젖히려 한 적 없었는데 무상한 세월이 손에 이것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타인이란 그다지 따스하지만은 않다. 오래된 우산살보다 녹이 슬어 각자의 몫대로 끼걱이고 있어, 데미 피아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더는 가칠가칠해지지 않도록 자꾸 매만져주는 일. 그것이 몹시 어려운 힘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렇다고 했다.
씨씨 뷰포트를 포기하라고, 그 마녀, 그 괴물, 그 정신 나간 여자.
하지만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씨씨 뷰포트는 블렌헤임이었다. 전장의 뷰포트였고 목숨보다 값진 학구열을 향해 가만가만 종이를 넘겨 보던 소녀였다. 씨씨는 언제나 그였으므로, 사람은 달라질망정 틀릴 일은 없으므로 데미 피아프는, 사람 곁에 일부러 다가서거나 떠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산 밑에서 고개를 내밀어 거리감을 잃다. 그러므로 데미는… 실감 나지 않았다. 씨씨 뷰포트가 죽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지만 정말로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망자의 집구석은 누군가 정리해주어야만 했고 그것은 자연스레 데미 피아프의 몫이었다. 떠밀어대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시선으로 떠밀었다. 그제야 데미 피아프는 피로를 느꼈다. 씨씨가 깨진 술병을 제 목에 들이밀며 학대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피곤을.
문이 열렸다.
사람 사는 냄새가 안 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살갗에서 풍기는 먼지 섞인 땀내 따위 없이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훑자 데미는 새삼 계절을 느꼈다. 가을이다. 여름에 죽은 사람은 흔적이 오래 가는 걸 의사인 그는 알았다. 하지만 이제 가을이고 씨씨의 집은 이미 주인을 내친 지 오래인 듯 취흔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사람이 살고 죽는 건 많이 보아 왔는데, 시체 한 구가 아닌 방식으로 죽은 이를 기리는 것은… 기린다고 했나, 내가. 데미는 차라리 웃고 싶었다. 그냥 물건을 정리해, 기부할 것을 빼놓고, 나머지는 버리고, 그런 일일 뿐이다. 데미는 어떻게든 마음을 다독였다(그래야만 한다는 게 비참하긴 했으나).
씨씨가 내다 버리거나, 태우거나, 깨부수어 처치해야 했거나 해서 남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창문 귀퉁이가 나가서 여태 냄새를 훔쳐 갔을 가을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사는 사람은 없어도 고쳐야겠다고, 데미는 생각했다. 겨울에 눈보라가 불면 휘파람 소리가 날 테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유령이 사는 집이라 무서워할 테고 죽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니까…… 내세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데미는 최소한 그가 죽어서도 편협함에 시달릴 일 없었으면 싶었다. 그건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테고.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 누군가 귓가에 대고 이기적인 인간, 쟁쟁하게 외치는 것 같았다.
해진 카펫을 돌돌 말던 데미는 문득 멈추었다. 쭈그려 앉은 채 손에 닿는, 먼지 낀 양모를 내려다보았다. 여름인데도 이걸 걷지 않고.
슬픈 건가. 데미는 여전히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듯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이 미처 깨지 못한 여자가 살다간 터라, 물건들은 황망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게 다리가 없어 유감이라는 듯이. 한낱 무정물이 아니었다면 주인에게서 달아났을 거라며… 데미는 조금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세상은 이 그리움에 동조해주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대낮에 멀거니 서 있었다. 나동그라진 우산에 빛이 고였다. 태양이 외눈박이 괴물처럼 내리쬐었다. 데미는 그 볕이 좋았는데, 왜냐하면 공평하니까. 이제야 그것을 알았는데 가만히 있자니, 그늘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눈에 띄는 음지. 검고 푸르스름한, 얼마나 추운지 몰라도 두 눈동자를 박은 사람인 이상 무시하지 못할. 그러나 사람의 눈 두 알을 가지고서는 어떤 평화도 연성할 수 없을 것. 그러니 다만 손을 뻗는 것.
당신의 그림자에 너무 늦게 당도했다. 나의 마음이라는 걸 아는 데에 인간 한 명분의 재료가 필요했다. 등가교환이란 얼마나 비정한가, 사실 이런 건 하나도 공평하지 않은데. 사람이 그렇게 살지는 못할 것인데. 무서운 사실 하나, 데미 피아프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이 집에는 거울이 없었다. 맑은 유리도, 투명한 물도. 수도꼭지 돌아가는 낡은 소리만 요란하고 얼굴을 비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을 싫어했겠지. 제 얼굴이 어떻다고 말해줄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나조차 모르는 걸 자꾸만 알려고, 사랑하려고 드는데 얼마나 두려웠을까. 데미는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 피아프의 눈을 보려면 씨씨 뷰포트는 두 유리알에 비친 자기 자신을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은빛 시선만큼 말가니, 끝도 없이 발목 높이라는, 얕고 평온한 남국의 바다를.
품에 안긴 건 더욱 적었다. 돌돌 만 양탄자와 깨진 그릇과 술병 두어 개(나머지는 파편이 되어 쓸어 치워야 하니까). 그것을 안고 문을 여는데, 안경을 벗은 시야가 흐릿해 문고리를 잘못 쥐고 만 모양이다. 나뭇가시에 손이 베였다. 이것도 다듬어 놔야지 생각하며 데미는 울었다. 주저앉아서 부어오르는 손가락을 쥐고 핏방울을 처음 본 아이처럼 조용히.
슬슬 저녁이 되어가는지 서늘한 바람이 들었다. 집안에서도 바깥의 황량함이 느껴져, 데미는 그것을 탓하며 한참 피를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