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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

나사르 본주 2022. 1. 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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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천사, 지고한 순수로 낙하를 모르고

 

거실이 아득할 만큼 차가웠다. 따스한 침실에서 슬리퍼에 잠옷만 걸치고 나온 에스텔은 서둘러 들어가서 숄을 걸치고 다시 나왔다. 빼꼼 발을 디뎌보니, 두꺼운 슬리퍼 너머로도 한기가 스몄다. 에스텔은 실버가 아직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서는, 한숨을 폭 쉬며 벽난로를 향해 총총 뛰었다. 걸을 때마다 종아리에 찬 바람이 감겼다. 오스스 떨며, 두 번 시도 끝에 성냥을 켠 에스텔이 그것을 난로에 던져넣자, 불티가 틱틱 튀더니만 금세 화악 불이 올랐다. 에스텔은 불을 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거실 공기가 좀 녹아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셈이었다.

뒤에서 문을 젖히는 소리가 났다. 실버가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나오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지 끄떡없이 걸어나온 그는 에스텔을 보며 살풋 웃었다. “잘 잤어?” “, 실버도 메리 크리스마스.” 불 가에 앉아 뺨이 상기된 에스텔에게서 눈을 못 떼던 실버가, 바람에 창이 뒤흔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시무시한 외풍이 들고 있었다.

창에 뽀얗게 들러붙은 서리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아, 그는 다가가서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문질러 닦았다. 체온에 살며시 녹은 부분이 생기긴 했지만, 손이 더 시렸다. 아니나 다를까 창틀부터 안뜰까지 무시무시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간밤이 지나치게 적막해 한 번도 깨지 않았는데, 이런 난장이라니. 실버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데 에스텔이 종종 다가와 곁에서 내다보았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살랑살랑 떨어지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다시 바람이 분다면 진눈깨비가 되어 사람을 덮칠 것이다. 실버는 숄을 느슨히 여민 에스텔을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두 달 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크리스마스 날짜를 세던 그녀가 이런 풍경을 지나칠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스텔이 옷 입고 온다며 방으로 달려갔다. 나갈 채비를 하는 게 분명했으므로 실버는 무언가 따뜻한 음료를 끓여두기로 했다. 이 날씨에 눈놀이는 십 분 이상 못 할 테니까.

에스텔은 코트에, 체크무늬 목도리를 헐렁하게 걸친 해이한 차림으로 나왔다. 실버는 묵묵히 귀마개와 장갑을 꺼내서 씌우고, 끼워 주었다. 투박한 스키 장갑을 손에 끼우면서 에스텔은 조금 투덜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눈 만질 거니까.”

실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침 물이 끓어 그가 몸을 돌린 사이, 에스텔은 부츠를 신고 앞마당으로 나갔다. 눈이 하도 쌓여 문을 열기도 버거웠다. 문짝의 범위대로 비질한 듯한 흔적이 남았고, 에스텔이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 발을 폭폭 넣어보는 사이 실버는 뒤늦게 나와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었다. 그의 차림새에 에스텔이 걱정하는 말을 했다.

너야말로 감기 들기 딱 좋은 차림인걸.”

괜찮아. 추위를 잘 안 타.”

익숙해진 것뿐이지만, 실버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에스텔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저변에 깔린 불행을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이 가능한 노트북을 사기 위해 라디에이터를 고치지 않았던 겨울…… 병원에서는 굳이 추운 창가 자리를 고집했더랬다. 홀로 있을 때 따스한 공간을 누리는 것이, 무척 좋았지만 익숙지는 않았다.

에스텔라스 그레텔이 몰라도 좋은 삶.

어느새 에스텔은 작고 동글동글한 눈사람 두 개를 만들어, 떨어진 나뭇잎 부스러기를 찾고 있었다. 실버는 문 앞을 마저 쓸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얼려 둔 블루베리를 가지고 나왔다. 에스텔이 짧은 비명 같은 감탄사를 내뱉곤 블루베리 통을 받아, 조심스레 눈사람의 두 눈을 만들었다. 자꾸 굴러떨어져 눈사람 조그만 얼굴에 눈물 같은 검보랏빛 자국이 남았다. 실버는 조금 웃고,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져서 자국을 지워 주었다. 에스텔이 말했다.

큰 것도 만들고 싶은데. 우체통 옆에 세워 두자.”

……장갑 끼고 나올까?”

!”

실버는 그렇게 했다. 두툼한 니트로 짜였지만 금세 젖을 것 같은 장갑이었다. 에스텔은 고민하다가, 자기 장갑 한 짝을 벗어 실버에게 주었다. “한 손이라도 안 춥게 해.” 실버는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장갑을 벗어주었다. 에스텔에게는 무척 커서 손끝이 나달나달하게 남아돌았다. 에스텔이 웃었다.

짝짝이로 장갑을 낀 둘은 눈을 뭉쳐 굴리기 시작했다. 실버의 것은 금세 불어났는데, 그보다 조금 작게 불린 에스텔이 방향을 잡지 못하기 시작하자 실버는 자기 걸 놓고 에스텔에게로 갔다. 앞마당은 좁아서 이미 눈덩이로 만든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그리고 내리고 있는지 눈사람을 두 개 만든다고 해도 다 사라질 것 같지가 않았다. 맨살에 닿는 쌓인 눈은 녹지 않고 살갗을 얼렸다.

더 오래 굴린 에스텔의 눈덩이가 아래에, 실버가 만든 것이 위에 놓였다. 블루베리는 너무 작아 냉장고에서 가져온 씻은 당근이 코 위치에 박혀 있었다. 단추는 블루베리 세 개씩, 눈에는 두 개씩. 팔을 만들 나뭇가지가 없어 한쪽 손만 내민 눈사람에게 실버가 젖은 장갑을 씌워 주었다. 에스텔이 니트 장갑을 손에서 쏙 빼자 발갛게 언 손가락이 드러났다. 실버가 얼른 두 손을 모아 에스텔의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사진 찍자, 사진.”

에스텔이, 목에 걸고 있던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느새 눈밭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설원에 사는 사람은 이래서 피부가 탄다지. 실버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에스텔이 마구 팔짱을 껴왔다. 동그마한 머리와, 빗지도 않고 튀어나와 부스스한 머릿결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같은 제품을 쓰는데도, 조금 더 보드랍고, 혀끝에서 단맛이 감도는 냄새. 어쩐지 후각적인 인상을 넘어서긴 했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아침이 완전히 밝은 실외라서 자동 플래시는 터지지 않았다. 매번 플래시가 터진다고 투덜거리던 에스텔은 기쁜 듯이 웃었다.

이거 트리에 걸자. 몇 개만 더 찍고.”

뭘 찍을 건데?”

에스텔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의미심장하게 가느다란 표정을 지었다. 곧 실버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카메라에서 찰칵 소리가 나왔다. 에스텔은 아무렇지 않게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흔들었고, 실버는……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설마 독사진을 찍게 되리라고는 예상 못 했던 것이다.

실버의 귀 끝이, 추위와는 별개의 사유로 붉어졌다. 실버가 자기 사진을, 혼자서 찍어 본 적은 없었다. 늘 에스텔을 찍거나…… 재촉에 못 이겨 함께 찍은 사진뿐이지. 그 사실을 에스텔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린 시절 사진조차 없는 것이 실버 그레타의 당연한 삶이었다. 한 줄기 섬광을 맞이한대도, 그건 상대를 위한 빛이지 자기 게 아니라 여겨왔고, 그래서 에스텔의 짓궂고 만족스러운 웃음에 얼떨떨했다. 실버는 거의 마지못해서 하는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이것도 걸어 놓자.”

눈사람 하나만 찍고 들어갈래.”

찰칵. 에스텔은 물론 사진을 한 장만 찍지는 않았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한 번만 더, 그렇게 세 방을 각도별로 찍은 에스텔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이 사진 뭉치를 가지고서 돌아섰다. 흐뭇이 보던 실버가 추위에 곱은 작은 손을 보고서 좀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다행히, 안은 따스해져 있었다. 실버의 초기 목적(마당 치우기)은 엉망이 된 채였지만.

욕실 라디에이터에 모자와 장갑을 말려둔 뒤에, 실버가 간단한 요깃거리(달걀 토스트)와 막 내려 싱그러운 커피 두 잔을 올린 쟁반을 벽난로 앞에 두었다. 둘은 차갑게 굳고 젖은 몸을 녹이며 커피를 한 모금씩 넘겼다.

인화된 사진들은 한 장이 약간 흔들렸을 뿐, 하얀 배경 덕분에 겨울바람마저 느껴질 만큼 선명했다. 실버는 에스텔과 함께 찍은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자기 혼자 나온 사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에는 한 점의 애정도 없이, 그저 처음 보는 물건을 보듯 신기하다는 빛이었다. 에스텔이 그런 실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방긋 웃고 일어섰다. “집게랑, 리본 가져올게.”

실버는 덩그라니 남아서 커피를 마저 마셨다. 아기자기한 소품은 에스텔이 관리하는 탓에 그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도 했고벽난로 옆에 자리한 트리에 시선이 닿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2주 전 꾸며 놓은 트리에는 오너먼트 볼과, 각종 인형 오너먼트가 달려 있었다. 전구를 감아 놓았지만 처음 꾸밀 때를 제외하고는 켜본 적이 없는데, 에스텔이 아침에 밝혀 놓은 듯 꼬마전구가 느릿느릿 반짝이고 있었다. 진짜 나무는 아니었지만(크리스마스 때마다 꺼내는 플라스틱 트리였다), 관리를 잘해 놓은 덕에, 그리고 실버가 공들여 청소한 덕분에 새것처럼만 보였다.

묘목을 사볼까. 다음 해에는 벗은 나뭇가지에 빨갛고 청록빛 도는 리본을 달 수 있도록. 고민에 잠긴 실버 뒤로, 살금살금 다가온 에스텔이 와락 끌어안아 왔다. 실버는 답잖게 놀랐다. 에스텔의 손이 차가웠던 것이다. 실버가 손가락을 감아쥐어 주며 말했다.

일단 손 좀 녹이자.”

괜찮아, 트리 꾸밀래. 어떤 사진을 잘 보이는 데에 놓을까?”

어디에 걸 건데?”

저기, 별 옆에.”

네가 나온 거.”

…….”

아니면, 눈사람을 찍은 거. 귀엽던데.”

에스텔은 함께 찍은 사진을 집게로 붙여 잘 보이는 곳에 걸렸다. 실버는 애매하게 큰 트리 꼭대기에 리본을 묶어주는 걸 도왔다. 벽난로 위에도 둘의 사진액자가 있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에 두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빨간 리본으로 트리를 두어 번 친친 감고, 일일이 사진을 매달아 놓은 뒤에야 에스텔은 만족했다. 어쩐지 좀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던 실버가 말했다.

쿠키도 만들어서 걸까?”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단단하게 구우면 될 거야. 타지 않을 만큼만.”

좋아! 진저브레드로 해 줘. 아니, 같이 하자. 그러고 나서 선물 상자를 뜯어 보는 거야.”

트리 밑에는, 에스텔이 호시탐탐 궁금해하던 서로의 선물이 놓여 있었다. 에스텔의 것은 부피가 크지만 가벼웠고 실버의 것은 작고 납작하지만 묵직한 소리가 났다. 제 호기심을 참느라 거의 기진맥진 하던 에스텔을 떠올린 실버가 웃었다.

에스텔은 이미 부엌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가 밀가루를 엎지르기 전에, 실버가 서둘러 뒤따랐다. 커피를 내린 흔적을 치우고 반죽할 동이와 밀가루 체를 꺼내고 나서 실버는 잠깐 선 채로 멈추었다. 회파란색 주방 타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주위를 에스텔이 기웃거렸다. 실버가 말했다.

에스텔.”

?”

사랑해.”

눈이 마주쳤다. 기습적인 고백 때문에 에스텔의 뺨이 빨개지는 게 보여서 실버는 어쩔 수 없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에스텔은 조그만 목소리로 답할 수 있었을 뿐이다. “,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나도.”

눈발이 굵어져 유리창을 톡톡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닦아 놓은 곳이 금세 얼어버린 창 격자에도 거친 밀가루처럼 눈이 쌓이고 있었다. 희디흰 안락 속에서, 흰 것에 손을 집어넣고 둘은 같이 키득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