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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님

나사르 본주 2022. 1. 24. 23:55

연성교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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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위화 【명사】
1. 조화가 어그러짐. 2. 자연의 이치나 운명에 맡김

 

다관에 덮어둔 푸른 손수건이 수증기에 차차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네 모서리에 달린 보라색 국화매듭이 수건을 쉬이 날아가지 않게 하고 있어서, 찻주전자 주둥이와 닿아 있는 부분이 동그랗게 물번지는 중이었던 것이다. 기하학적인 매듭의 생김이 신기하기도 하고, 자기 색과 비슷한 이 다건을 샀을 때(팬에게 선물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소하의 표정이 상상이 안 되기도 해서, 무심코 만지작거리자 곧바로 지청구가 날아왔다. 낮은 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김소하가 어느새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 알았어요. 딴짓 안 하고 착오가 없는지 살펴보기.”

 

투덜거리며 매듭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김소하가 안경까지 써가며 열심인 건 설화를 분류하고, 자격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태그를 붙이는 작업이었다. 물론 섭정은 자신이 암호를 몰라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그에게 백지장처럼 보일 설화를 차곡차곡 종류대로 쌓아준 뒤에는 소하가 색깔대로 테이프를 붙이는 일만 남아서 무안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가지런히 앉아 간식을 먹던 금요는 소하 대신 나서야 할 일이 생긴 터라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손을 둘 곳이 없어 온기가 날아간 지 오래된 금요 몫의 방석을 매만지다가 문득 생각나 말했다.

 

백지한 씨요. 사실 제 이상형이에요.”

……갑자기 또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니, 아니, 소하 씨를 향한 마음이 바뀌었다는 건 아니고요!”

상관없습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당신이 누굴 좋아하건 쓸데없이 해명 안 해도 됩니다.”

소하 씨 좋아하는 것도요? 아무튼. 들어보세요.”

 

마침 해가 지고 있어 거실 등을 켜야 할 때였다. 때가 맞아떨어진 게 성가셨는지 눈이 아픈 건지, 종이에 스티커를 붙였다 떼는 귀여운(?) 작업을 하던 소하가 안경을 벗으며 몸을 소파에 기댔다. 백에 관한 화두는 흔한 얘기여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까다로운 대꾸를 해주곤 얼른 일어설 생각인 모양이었다.

김소하의 마음을 읽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반응할지도 전부 알고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 아주 많이 알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사랑할 수도 있다는 의미니까. 그래서 다음 말은 가볍고 상투적인 목소리로 뱉을 수 있었다. 김소하가 오해하지 않을 만큼은.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요. 특별한딱 한 명만 있는 사람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꽤 나오잖아요. 백지한 씨를 보고 있음 제가 그 특별한사람이 된 기분이라 신기해요.”

그래서요? 특별한 사람이라, 상서로운 존재조차 고귀한 취급 해주는 게 뿌듯하다?”

아니거든요? 전 소하 씨가 싱긋 웃을 때가 더 뿌듯……, 하여간에 허구랑 현실은 다르잖아요.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초조하기도 하더라고요. 백지한 씨 같은 열렬한 사람의 구애에 익숙해지기라도 하면어느 날 저 마음이 식어버리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잖아요.”

 

덕택에 쓸데없이 말이 길어져서 소하가 묘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 안경을 간당간당 들고 있는 게 지루한 모양이라 얼른 말을 맺었다.

 

제가 소하 씨에게 소홀해질 확률은 제로니까 그렇게 보지 마세요. 누구 상처받으라고 한 말도 아니니까요. 그래, 무엇보다도 저는 소하 씨가 제일 좋아져 버렸으니! 그냥 그렇단 얘기였어요.”

그렇다면.”

?”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소하가 손을 뻗어 목이 긴 책상 등을 켰. 눈앞이 자른 오렌지처럼 밝아졌지만, 어쩐지 그가 시선을 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봤더니 김소하는 다시 안경을 쓰고 고개를 내렸다.

그가 말을 하다가 끊는 건 절대로 좋은 징조가 아니다. “왜요?” 되묻자 소하는 한숨을 삼키듯이 목울대를 움직였다. 그게 또 두근거려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줄 수 있도록.

그러나 김소하는 조용했다. 다시 종잇장을 들추는 손길에서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좀 났을 뿐이다. 괜히 민망해지고, 또 거슬릴 말을 했나 싶어 얼른 다음 설화 뭉치꺼내 들었. 다관에서 찻물도 좀 따라주었는데 이미 식어서 김이 하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뭔가 잘못 건드렸나 보. 소하가 설화를 얼마나 귀중히 대하는지 알고 있으므로(정작 이쪽은 덤벙대곤 하지만) 별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김소하는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얼른 손끝으로 다림질하며 입술 안쪽을 살짝 씹었다. ‘당신이 날 보는 눈빛을 압니까.’ 그건 스무 송이의 장미보다도 지독한 것이라, 그는 제 나이를, 어쩌면 존재감 자체를 한 차원씩 넘나드는 그 사랑을 버틸 수 없다고, 나도 초조함이나 불안을 느끼는 인간이라고.

당신은 가끔 그걸 잊는 것 같은데.

우상이 되었을 때 져야 하는 책임 따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에 관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어쩌면 난 별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혼란을.

영원히 말할 수 없겠지, 그는 설화에 보라색 테이프를 붙이고 넘겼다. 다음은 또 보라색. 단조로운 행위에 슬슬 질려가고 있었다. 반복되는 고민에도.

날이 흐려 낙조에 황혼조차 지지 않았다. 숨 없이 죽어가는 물짐승을 생각하는데 또다시 이마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소하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게으른 자격자가 턱을 괸 채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저 자의 장미 한 송이가 시들 무렵엔 아마 이 감정을 떼어내야 할 것이다. 신이 될 사람이니까. 사랑이든 뭐든 당신과 난 아마 오래 보아야 할 테고, 또 같은 세계를 이고 살 순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이었다. 소하는 느려지려는 손을 재촉했다.

종이가 살을 포떴는지 손톱 밑에 붉은 점 같은 핏방울이 오르고 있었다. 굼뜬 자격자는 이제야말로 집중하겠다는 듯이 제 앞의 자료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내가 흘린 피를 당신이 보는 걸 원치 않는다.

그뿐, 평정을 가장함이란 익숙한 감각이므로 그는 침을 바르는 척 새어 나온 피를 핥고 손을 내렸다. 손끝의 상처에서 맥박이 뛰고 있다. 허상일지 모르는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겠노라, 저도 모르게 기약하는 것을 굳은 얼굴의 김소하는 알지 못했다.

길조를 물고 올 까치가 조용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