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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님

나사르 본주 2022. 2. 14. 14:51

연성교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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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소나기라도 내릴 것처럼, 나뭇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시원스러웠다. 정말 비가 내릴 작정인지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하늘은 시야 중앙이 퍼럴 만큼 높기만 했다. 먹구름, 아니 구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므로 소하는 잠시 여기가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늘 말하는 것처럼. 작은 여름, 그것이 여기에 와 있노라고.

착각하지 말자. 겨울이다.

잠시 맑은 날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는데 멀리서 서성거리는 그녀가 보였다. 멈칫하고, 달려오려다가 동동거리며 조신한 체 행동하려는 게 보인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을 게 분명하다. 김소하는 그녀가 울거나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을 만큼…….

오히려 그래서 방심하고 마는 것이다. 당신은 애당초 여기에 살았을 사람이란 걸, 하지만 떠나야 할 의무를 짊어진 자격자이기도 하다는 걸. 곁에 두던 것을 떼어 보내는 것이야말로 못 할 짓이 아닌가. 물론, 김소하가 거부할 권리는 없다. 그녀는 사명이 있고, 그와 나는 아무 관계가 아니다. 제멋대로 도울지 망정, 그러지 말라, 운명을 거스르라 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이럴 때면 소하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신이라면…….’

무슨 생각 해요?”

종종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눈앞에 있었으므로 소하는 상념을 흩는다. 맑은 눈에 장난기를 담뿍 담은 게 수상스러워 뺨을 꼬집어주자 정직하게 볼멘소리를 한다.

저 꼬집는 생각 하고 있었어요?”

.”

……아프지만 견뎌 볼게요. 가위바위보는 삼세판 참을 인도 세 번.”

누가 견디라고 했습니까? 이상한 말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거둔 손에 온기가 남아 있다. 이이는 인간이다.

소하는 자신이 안도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쳐 손을 그러쥐었다. 인간이라고, 인간은 자격자가 될 수 없다고 여겨온 시간이 이젠 그에게 불필요한 희망을 심었다. 착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불신만이 유일한 빛이 되는 이 상황이 소하는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용건이요?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럼 이만 가도 됩니까?”

……모르는 한자가 있어요! 설화에! 획이 엄청난 한자가.”

급조한 게 분명한 까닭에도 고분고분 따라가 주는 것도 불필요의 일환이리라고 소하는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그녀가 나름대로 자신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지는 오래지 않았다.

그녀는 천산을 작업실처럼 쓰고 있었다. 발난로에 담요에, 가습기는 김소하가 미쳤냐며 만류했지만 가져오고 싶은 눈치였다. 제 책상을 그대로 여기에 옮기면 되겠다는 무식한 말 따름에 한숨을 쉰 게 그제였다. 애초에 그만한 짐을 지고 산을 오를 수나 있겠느냔 말이다. 따라서 담요를 준비해준 건 소하였고, 두꺼운 모포를 둘둘 만 그녀는 제법 행복해 보였다. 지금처럼.

옷이라도 되는 양 담요를 두른 그녀가 가리킨 건 하찮을 만큼 흔한 한자였다. 愛心. 자애심에서 두 자를 추출해 던지는 추파가 어이없어 소하는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게 본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 왜요?”

정말 이걸 모릅니까? 초등학생도 알아야 하는 한자인데.”

모를 수도 있죠, 모를 수도.”

발음해 보세요.”

모른다니까요?”

애심.”

?”

자애심, 입니다. 자격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뻔뻔한 건 그녀가 아니라 이쪽이다. 소하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김샜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걸 보는 게 어쩐지 기특했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을 때보다는 나아졌지 않은가…… 적어도. 꽤 너그러운 얼굴을 한 소하를 힐끔거리던 그녀가 설화를 어질러버렸다. 위에 놓여 있던 자애심, 설화가 가려지자 소하가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등을 붙잡았다.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 마세요. 구겨지지 않습니까.”

안 구겨지게 했는데…….”

다른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기세요.”

밉보일 말이 튀어 나가는 이유는 안심해서다. 그녀가 날카로운 얼굴을 하지 않는 것, 적어도 김소하의 속내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겨울과 봄 사이어선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날이 너무 좋아서인지도 모른다. 서고에 트인 작은 창문 바깥으로 한지에 번지는 푸른 먹처럼 빛나는 하늘이 들이쳤다. 소하는 아찔한 기분으로 손을 거두었다.

좋아하는 만큼 부드러울 수 있다면 좋은 삶일까? 김소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고, 신을 보좌하는 인간이어야 했으므로. 이야기꾼의 명맥을 지키며 그들의 왕이 될 사람을 검문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오래전부터 쭉.

당신은 신이 될 게 분명합니까?”

소하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웃하더니 되레 반문해왔다.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 이렇게 열심히 일도 하잖아요.”

열심히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요. 신이 되고 싶습니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걸요?”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보는가 싶더니 금세 얼굴을 펴고 미소 지었다.

소하 씨가 원하면, 전 그렇게 될 거예요.”

김소하는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느낀다. 당신은 신이 되어야 합니다, 와 당신을 신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는 아주 다른 영역의 발화이므로. 신은 당신이어야만 합니다, 와 당신이 군림해준다면 참 좋겠습니다, . 의식적으로 소망이라든지 바람을 삼켜 넘겼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런 날들을 말한다면 그녀는 동조해줄까, 이 넘실거리는 절반 찬 마음, 경계를 넘나들며 글자를 지우는 물거품과 같은 것을.

결국 나온 목소리는 몹시 버석했다. 소하가 말했다.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지만요.”

주어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으레 하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톱니가 선 상투적인 톤으로 늘척거릴 뿐이다. 농담 같은 관계에 괜히 무게를 얹는 꼴이 홀로 우스워졌다.

나무 살이 선 풍경을 구름 한 점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