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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님 연성교환

나사르 본주 2022. 4. 5. 20:10

신야근 이활 드림

더보기

에는

수레바퀴

없다

 

 

 

설화적으로 말했을 때, 이활은 충분히 유화를 죽일 수 있다. 지금의 유화는 인간이며 유화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와 계약을 맺고 나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유화는 더이상 악신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며 이활은 사자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선하와 의리를 지킨다면 인간을 삭제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이겠지만, 그런 불문율이야 무시하면 그만이 아닌가. 그래서 이활은 유화를 죽이려고 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가 계약을 청해왔기 때문. 분노로 쨍하게 얼어붙은 푸른 눈이 자신을 두근거리게 했다고 이활은 생각한다. 아니라면, 굳이 이쪽이 더 완벽하다고 볼 수야 없었다. 설화계를 철저한 비즈니스로 대우하는 사람에게 세계의 혁명 따위를 기대하는 건 알량한 짓이니까. 김소하가 아니라면 이활은 애초에 유화를 살해한 채 악우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 같잖은 이야기꾼이 아니었다면…….

달이 떴다. 침묵의 시간이다.

산 것들은 본능적으로 달빛에 어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다. 이활이 좋아하는 건 고요한 밤, 아찔하게 높은 장소, 깔끔한 향미의 찻잎. 얼어붙은 뺨, 성마른 입술, 그 입술이 벌어지며 내뱉는 고약한 말들. 먼저 걸려오는 전화와 필연적으로 낮은 것들.

여긴 개중 여러 가지를 충족했다. 웬만한 마천루가 내려다보이는 빌딩 꼭대기에 서서, 이활은 냉담한 눈으로 불야성을 관람했다. 갓 없는 전등으로 점철된 인간계의 밤은 여전히 수런거렸으나, 거친 바람이 도시 소음을 훔쳐 귀가 먹먹하고 살갗이 얼었다. 참된 겨울에 건물 옥상을 애호하는 기이한 인간이 아니라면 발도 딛고 싶지 않은 곳일 테다. 이활은 조금 전 끊어진 전화를 상기했다.

 

- 어디예요.

 

먼저 전화를 걸기까지 그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 것 같아서, 활은 조금 웃었다. 웃음소리를 들은 유화는 잠시 말없이 숨소리를 냈다. 호흡이 단정한 그의 성미를 따지자면 꽤 흥분한 상태인 듯했다. 손바닥에 상처가 날 만큼 주먹을 쥐고 있는지도 몰랐다. 활은 늘 유화의 거침없는 (활 자신에 대한) 버릇과 그의 평소 습관 사이에 괴리감을 느꼈는데, 일상적으로 유화는 꽤 조용하고 피로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유화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활에게 타인의 행적을 도둑질하는 건 퍽 쉬운 일이었다. 아마 그쪽 방면으로 길을 텄다면, 정치를 하지 않고서도 쉽게 자리를 잡았으리라. 이활이 원한 건 부와 권력이 아닌 정보와 보장된 양지였기에, 그런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이활은 가볍게 대꾸했다.

 

- 뉴욕이요. 업무 때문에 왔는데, 곧 돌아갈 거예요.

- 멀잖아.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활은 입가를 꾹 눌러 웃음을 참았다. 엷은 보조개가 패었다. 이활이 무언가 중얼거리는데, 바람이 불어 가느다란 머릿결과 함께 목소리를 잡아채어 갔다.

 

- 뭐라고요?

- 보고 싶다고요.

- 쓰잘데기 없이 지껄이는 건 관두라고 했을 텐데.

- 야박하네요. 이런 말 안 하면 너무 차가워 보이잖아요.

 

이활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려는 노력 없이, 되려 헤집으며 말했다. 세팅이 풀린 옷과 헤어 때문에 그는 짐짓 소년 같은 인상이 되었다. 통화 중인 상대가 만만찮아 그런지도 몰랐다. 활은 내심 유화의 성정에 혀를 차고 싶은 때가 많았으나 그의 신분은 인계의 어떤 인간보다도 지고했으니. 자격자라,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 이야기꾼들 앞에서 악우가 탈락한 지금은 정말이지 유일하다고 봐도 좋았다.

 

- 결정해요.

 

유화가 다짜고짜 따져왔다. 앞뒤 자른 말인데도 이활은 잘 알아들었다. 유화는 요 하루간 답잖게 초조해하며 재촉하고 있었다. 이게 벌써 세 번째 전화라는 게 그 증거였고, 이활이 꼬박꼬박 받았다는 건 대놓고 놀린다는 거였다. 그걸 알고 있는 유화로서는 이미 죽어버린 마음 대신 자존심만 타올랐을 것이다.

 

- 오늘 달 봤어요?

 

이활이 말했다. 역시 맥락 없는 던지기여서, 유화는 이 가는 소리를 냈다. 감정을 숨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 모습을 활은 퍽 좋아했다. 아무리 경멸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귀여운 구석 한둘쯤은 있는 법인데, 공교롭게도 유화가 보여주길 꺼리는 표정이 딱 그러해서, 활은 자신이 멀리에 있다는 게 진심으로 유감스러웠다. 눈앞에서 크게 웃어준다면 반응이 어떨까.

별다른 대답이 없었기에 활이 계속 말했다.

 

- 초승달이에요. 거기도 그래요? 아주 밝고, 선명하고, …… 가늘다.

- 시간이 시간이니까. 어디 헛디뎌서 아주 객사해버리지 그래요.

- 사자가 그런 일로 죽을 수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요.

- 끊어요.

- , 잠깐.

 

계략적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활은 옅은 전율을 느꼈다. 까마득하게 높은 시공간조차 그에게 물려주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다만 상대를 조종할 수 있을 때 활은 만족했다. 확신한 대로, 유화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에게는 목표한 바가 있는 것이다.

 

- 뭐야.

- 계약이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들려오는 건 휘파람처럼 난간 사이를 새는 바람 소리, 활이 푸른 바닥재를 구두코로 톡톡 치는 소리. 마치 계산하는 것 같았다. 유화는 망설임이 더 길어지기 전에 채근했다.

 

- , 말아.

 

어째 점점 말이 짧아진다고 활은 생각했다.

 

- 해요, 그거.

- ……말만?

- 아아, 얼른 보고 싶은 거죠, 역시. 돌아가는 대로 찾아갈게요.

- 계약만 하고 꺼져요.

- 끝과 시작의 밤에…….

- 시끄러워, 제대로 할 때 빼지나 말라고. 알았어요?

 

그러고서 전화는 정말로 끊겼다. 이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한국도 아니고, 찾아갈 거리가 아니니 여기서 관두겠다는 거지. 말만으로 수락받는 건 소용 없는 일이란 사실을 유화는 아는 거다. 그러나 활의 생각은 달랐다. 정치계 거물을 수행하는 그에게 구두계약이란 신중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분명하게 하자, 고 했을 때 신뢰를 저버려서는 안 되는 거다.

유화의 삶이 어땠는지 그는 모른다.

아마 숱하게 배신당하고 많은 말을 거품처럼 꺼뜨린 생이었으리라 추측할 뿐. 그리고 이활에게 그건 중요한 사실이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무너뜨릴 의지가 남아 있을 것. 일렁이는 불길 속 겹치어 혼잡한 그림자 안에서 유화의 표정은 어땠는가. 송곳처럼 벼려진 투기심을 활은 보았다.

열정이라고 할 수 없는, 차디찬 이기였다. 활은 어쩌면 그와 내가 참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달을 함께 보고 있다면. 유화는, 나의 자격자께서는 얼룩진 초생달 끄트머리에서 금빛 단검을 연상할까. 존재하는 것의 목을 자르고 심장을 찌르기 좋도록 날이 곡된 낫을 말이다.

구름이 빛을 흐리는 순간 또한 그는 깨닫는다. 아마 처음으로 함께 보았을 이 달은 양 끝이 맞서서, 닿을 수 없음을. 만월이라 함은 삭을 지우는 존재이니 가서 만나는선택지는 없었다. 우리는 절대로 자라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다만 서로의 목을 노리는 칼날만 드러내는 것이다. 각자의 삶을 강샘 하듯이. 거기에 자기가 있다는 걸 믿지 못하고 함께 파멸하자는 듯이.

말하지 못했지만, 이활은 절멸이 좋다. 공평한 삭제와 죽음은 평안하다. 모두 다 함께 그러자고 웃으며 말할 만큼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이런다면 분명 평판이 땅에 떨어질 테지) 자기 손으로 지어낸 신에게 순리를 거스르라 말할 정도로는 욕심이 있었다. 해서 활은 유화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 같이 떨어지려고요. 당신이랑.

- 길이 없는 곳으로 비상합시다.

입말로 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자신조차 귀에 들리지 않아서 하지 못한 말이나 다름없다. 활은 어깨를 다시 한번 으쓱하고, 발길을 돌렸다. 관리가 덜 되는 장소라서 칠이 벗겨진 문고리는 가슬가슬한 얼음 같았다.

초승의 밤에는 광증조차 숨을 죽인다. 이 명료한 이성적 세계에서 이활은 공멸을 생각했다. ‘당신과 내 지옥은 들끓는 한기의 고통이리라.’ 순리에 맞서면서, 이끌림에도 이어지지 않는 법칙엔 조응하는 것이 그의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언약한 극락이자, 우리의 승천이었다.

 

돌아가야지.”

 

활이 말했다. 거미줄 친 계단참에 쨍할 만치 산뜻한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