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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ㄱ님

나사르 본주 2022. 4. 15.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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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호수가 있다고 들었다. 굉장히 넓고,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지만 물이 무척 짜다고. 또 깊이는 얕아서 무던한 물 생물이래도 절대 보금자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은 곳이라며, 어떤 전우가 말했었고 멜은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오래 가지 못해 죽었기 때문이다. 패잔병에게는 날아간 팔다리만큼의 명예가 주어지겠지만, 적법하게 죽어 진창에 묻힌 자에게 어떤 권리가 가닿겠는가? 따라서 멜 레오나르도는 그 추억을 고이 접어 넣어 두었다. 에쎄 라이트의 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넌 사람이 왜 이러냐?”

……집 있고, 끼니 챙기고,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멜이 짜증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에쎄는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담요가 흘러내리게 두었다. 그가 망연할 만큼 가벼운 걸음으로 침대에 가 앉을 때, 바닥에 떨어진 모포를 줍는 건 멜이었다. 무기를 들 일은 없을 거라 느낄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했던 터라 의지(義肢)를 착용하지 않은 멜은 약간 휘청이다가 익숙하게 뜬 발을 내려놓았다. 에쎄는 한기를 느꼈는지 흰 이불 속에 있었다. 그 모습이 포말에 휩싸인 푸른 사금파리 같아서 멜은 대놓고 찡그렸다.

상처가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에쎄는, 에쎄 라이트라는 사람은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겠지. 피 냄새를 지우려는 들짐승처럼. 물결 같은 안도감이 이는 건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멜은 자신이 누군가 사라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에쎄는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뒤치다꺼리를 하는(그저 널브러진 가재도구 몇 가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따름이었지만,) 멜을 보며 툭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왜 그래?” 순전히 궁금하다는 투였다. 그러니까, 에쎄에게 멜 레오나르도가 보이는 인간적 덕목이란 변덕스러운 손짓, 사치 부리고 싶어 흘리는 은화 몇 푼에 불과했던 것이다. 멜은 좀 맹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었다. 에쎄의 질문은 아무래도 멜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공허한 말이었다.

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 뭘 또 남처럼 굴어?”

또라니, 언제.”

, . 시치미 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멜은 곤혹스러운 듯했다. 그에게 감정은 불길이었고 맹목적인 흑색이었다. 사람이란 무릇 물들길 좋아하는 족속으로, 한 푼 애정에 목메여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던가. 그러한 세계에 젖을 준비가 되어 있던 그에게 에쎄 라이트의 질문은 지점토 한가운데에 꽂힌 바늘처럼 뜬금없는 것이었다. 멜은 계속 투덜거렸다.

이런 상황이었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얘기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

애인이잖아. 일단은.”

멜은 에쎄의 발치에 털썩 앉았다. 코끝을 긁는 게 이런 화두까지 꺼낸다는 사실이 심히 유감스럽다는 투였다. 그러나 에쎄에게 애인이니까같은 정형적인 대답은 별다른 대꾸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 이제 와 우리가 최소 보편스러운 인간들이 되자고?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기기만이야말로 에쎄가 하등 쓰잘데기없다 여기는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달라져야 해? 너는……. 내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변하지 않을걸.”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기에, 멜은 그저 웃으며 대충 뭉친 담요를 던졌다. 부드러운 모피가 머리를 덮는 걸 가만히 두다가 한 박자 늦게 젖힌 에쎄가 이었다.

서로 보고해야 할 의무 없잖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차분하지만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허리를 베고 지나간 자상이 말소리에 맺혀 있던 자작한 생기를 빨아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에쎄는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는 자신이 낯설었는지도.

눈빛과 손짓으로 서로를 알아먹었다면 연인이 아니었겠지. 멜은 그렇게 생각하며 에쎄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는 걸 지그시 보았다. 버릇처럼 사냥감의 동태를 살피는 헌터의 눈이었다.

그는 에쎄가 패잔병처럼 보인다고 느꼈다. “사해라는 게 있대.” 에쎄가 민물고기 같은 눈동자를 멀겋게 움직였다. 멜은 편한 자세로 고개를 꺾었다.

바다처럼 생겨먹어서 바다는 아닌 거지. 물살이가 알을 까도 물이 너무 짜서 새끼치기 전에 말라 죽어버리는 거야. 닭이냐 달걀이냐 같은 문제지만.” 멜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이 기억인가? 사랑스러운 연인을 집에 들여 앉혀놓고 한다는 말이, 왜 죽은 사람의 이야기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길하기만 한데, 사람들이 곧잘 보러 간다더라고. 수영도 하지 못하는 망망대해 소금물을 보러…….” 언젠가 거기에 가자. 미래를 예단하듯이 말하고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 멜은 가만 잠잠해졌다가 손을 뻗어 에쎄의 뺨을 만졌다.

환자의 낯은 싸늘하기만 하다.

내가 궁금한 게 있어. 거길 호수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 그래놓고 사해(死海)라는 이름을 지어준 건 어떤 돼먹잖은 인간일까?”

에쎄는 정돈된 상상을 일으키기도 전에 옅은 전율을 느꼈다. 정처 없이 쏟아지다가 문득 몸을 붙들린, 자신이 꿰뚫렸다는 걸 뒤늦이 깨달아버린 구슬알처럼.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건 너와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대하겠다고. 연인이란 자고로 염려시키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허공을 줄창 헤집는 나의 손길에서 지켜야 할, 땅에 발붙인 인간. 그것은 죽을 수도 아플 수도 슬플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슬프다는 건 죽음에 가까운 염수이니까. 상처에 들어가면 무척 아프게 된다.

눈물 흘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네가 우는 모습은 상상조차 안 되는걸. 하지만 그것이 절대로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만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에 열광하며 살육을 일삼는 나날이 차라리 더욱 어울린다. 너는 너에게 맞는 모습대로 있었으면 한다고……. 내가 이 호수 밑에서 듣지 못하는 척하듯이.

사해에서는 몸이 뜬다는 걸 아니. 온갖 물에 비유되어오던 나는 그런 이야기를 안다. 지금은 죽은 자에게서 들었던 얘기다. 나는 죽어 있음을 안다. 나는, 죽어 있는 것들이 영원히 그 상태에 침전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호수에 가서도, 거기에서 죽는대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패잔병이고 너는 그들을 경멸하니까. 그런데 너, 살육하는 나날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나는 모르겠다. 너에 관해서는 아예 모르겠다. 만일 무엇인가, 아주 작은 부스러기라도 너에 대해 알고, 괜찮다,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너로 인한 일이었으면 좋겠거든.

그러나 레오, 너는 내가 왜 졌느냐고 물을 것이다. 왜 진 게 돼. 왜 네가 져, 누가 누구한테.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다. 왜 졌어?

나는 그날이 왔으면 해. 어서.

세상에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겠다고? 설마. 육신에 상처가 나 욱신거릴 때마다 네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도 잠들어 있다는 꿈이 아닌 현실을 깨닫는 걸, 더는 두려워하고 싶지 않아서. . 날 사랑하지 않게 될 네가 무서워.

공포를 알고 있는 내가 사실은 무서워.

별생각 없었을 거야.” 에쎄가 말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내가 보기엔 그저 삶인데.”

에쎄는 몸을 살짝 돌렸다. 감은 지 꽤 된 붕대에서 피가 흐르는지 불그스름한 빛이 비쳤다. 멜이 입이 열기 전에 에쎄가 다시 말했다.

짜고, 쓰디쓴, 호수일 뿐이잖아.”

이 말은 멜 레오나르도에게 이렇게 들렸다.

쓰디쓴 삶일 뿐이잖아.’

그럼 안 되지.”

?”

호수가 짠 물이면, 살지 못하니까.”

안 살아도 돼. 호수는 외롭지 않거든. 외로움은 고래나 문어나, 마리모 같은 것들이 느끼는 거야. 마리모는 여러 개체가 뭉쳐서 하나의 구체가 되는 거 알아?”

멜은 말 돌리지 마, 라고 말하고 싶어졌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호수이기 때문에. 그저 입에 쓸 뿐이니 때문에 그대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을 무슨 말로 붙잡겠어. 대신 멜은 이렇게 말했다.

재밌는 얘기네. 처음 알았어.”

그는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 말 못 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왜 연인이 되었겠느냐고 생각했다. 동시에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에쎄 라이트가 수정 속 물방울처럼 청결하고 텅 비어 있어서, 점점 닳아가다가 온몸을 세상에 녹도록 집어던지는 걸 더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에쎄의 애인이기를 자처했는지 깨달았다. 그를 붙잡아 두고 싶었던 거라고. 기왕이면 내 옆에, 눈에 보이는 곳에서 감시하고 싶었던 거구나. 이 말은 우리가 태고의 물방울을 닮아진 겨울 바다에 가서도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도망가게끔 두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정히,

붕대 갈아줄게.”

손을 뻗어.

 

새 붕대를 꺼내는 동안 에쎄는 창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까워 보이지만 바다는 십여 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다. 바다 앞에 산다, 고는 말할 수 있어도 막상 가려고 마음먹는다면 조금 귀찮아질 만한 길을 건너야 한다. 길에는 계단이 많고 계단은 높은 데다가 폭이 좁아서 얼음이 붙으면 성가시기 그지없다.

봄이므로 발밑을 미끄러지게 하던, 살짝 굳었던 얼음이 녹아간다. 아이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개씩 든 채 이골이 난 계단 길을 마구 뛰어 내려가는 게 보였다. 벌써부터 웃통을 벗고 있다. 저러면 감기에 들겠지. 올여름에 콧물을 흘리고 다닐 띨띨한 녀석이 얼마나 있을지 그는 가늠해본다.

허리에 닿는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느낀다. 에쎄는 붕대의 한쪽 끝을 잡아주고 있고, 역시 멜의 상냥함이 극도로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까. 생각해보지 못할 건 없지만 아직 봄이므로, 그러고 싶지 않다.

레오.”

?”

놀러 갈까.”

……어디로?”

사해. 가고 싶다며.”

멜은 잠시 멀뚱해졌다. 그런 말을 했던가, 싶어서. 돌이켜 보니 아무런 계책 없이 가자, 고 했던 게 기억났다. 그는 창 바깥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는 에쎄의 어깻죽지 언저리를 보다가, 붕대를 놓고 살갗을 살며시 짚어 주었다.

그래.”

다행히 깊이 입지 않은 자상은 단련된 몸에 의해 피를 멎어가고 있었다. 굳은 핏물이 그대로 드러난 등을 바라보며 멜은 생각했다. 살아 있는 곳으로 가야지. 고기가 살고 해초가 무성하고, , 마리모는 그런 염수에 서식하지 않지만. 깊이가 무척 푸르고 몸이 가라앉는 곳.

어디든, 죽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바다를 향해 가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