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ㅍ님
장밋빛 인생
손님은 이 모든 짐을 들고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꽤 많은 양의 식자재를 샀는데, 봉지와 장바구니에 담고 나자 넘쳐서 박스를 두어 개 새로 꺼내야 할 정도였다. 너무나 양이 많았으므로 무인 포장이 무리라며 실버를 부른 참이었다. 실버가 익숙하게 테이프를 끊어 포장을 마치고 손잡이를 만들어 주었더니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차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바로 근처에 사는데, 이 백인 여성은 말했고 실버는 그의 몸이 노화한 정도와 얼굴에 진 주름살로 퍽이나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은 따로 없었다. “배송을 부탁하시겠어요?” “안 돼요. 당장 요리를 해야만 해요.” 대략 이런 싸움이었다. 실버는 이것이 싸움이라는 생각을 지우느라 꽤 많은 체력을 할애해야 했다. 결국 마트에 비치된 카트를 빌려 가는 것으로 투닥거림은 마무리됐고 실버는 매니저에게, 너무 친절히 굴지 말라며 약간의 질책을 얻었다. 손님은 카트를 다음 날 돌려주었다.
비슷한 일이 두엇 더 있었다. “주차장을 늘려야 한다고.” 매니저가 투덜거리는 걸 들으며 실버는 발에 테이프를 붙였다. 오랜 시간 서 있으려면 테이핑이 필수였다. 고통이 오래가지 않게 근육을 잡아 주는 것이다. 실버는 카트가 돌아오지 않은 한 번의 경우를 생각해, 배송 직원을 곧장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했으나 매니저는 귀찮은지 이리저리 피하며 대화를 무마했다. 월권하고 싶지 않아 실버는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일이란 사실만이 그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반복이란 이골이 난 짓이기도 했다. 실버는 온종일, 일주일 동안, 한 달, 그리고 몇 년 동안 같은 일을 했다. 레퍼토리는 제각각이었지만 플롯은 늘 비슷했다. 이것이 싸움이라면 실버는 패잔병이었다.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도 물류를 정리하던 실버는 겨우 유니폼을 벗고 퇴근했다. 청소가 자기 몫이 아니라는 게 이 대형마트의 유일한 이점이었다. 실득을 따지자면 이점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금요일이었고, 와장창 밀려든 손님의 수만큼 길거리는 휘황했다. 오늘 사 간 짐으로 그들은 스튜를 끓이고 아스파라거스를 다듬어 구워낼 것이었다.
몇 년 전이라면 기이한 상실감을 느꼈겠지만, 실버는 되레 웃었다. 땀에 젖었다가 마른 옷과 부은 발로도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생겨 있었다. 그가 떠올린 건 에스텔의 환한 미소였다. 하루 종일 당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슬프지는 않았다는 듯이 짓는 그녀의 일상적인 얼굴, 그것이 제 삶이라는 게 실버는 믿기지가 않았다.
“실버! 왔어?”
튕기며 구르는 듯한 비즈알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귀에 간질거렸다.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그를 환영하고, 상상한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는 에스텔. 에스텔은 어딘지 들뜨고 기쁜 듯 빛나고 있었다. 평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집안을 슥 둘러본 실버는, 지친 듯이, 하지만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피곤해 보였지만 더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힘들지?” 에스텔이 걱정스레 눈썹을 늘어뜨렸다. 실버는 조심스레 에스텔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그만두었다. 씻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텔에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나니까, 그만큼 자신에게서 불쾌한 향취가 나지는 않는지, 고된 일 탓에 몸에 역한 체취가 배지는 않았는지 신경이 쓰였다.
“목욕물 받아놨어.”
그렇기 때문에, 에스텔이 이런 말을 꺼냈을 때 멈칫한 것이다. 같이… 씻자는 건가? 실버의 영리한 머리는 금세 돌아갔지만 목덜미와 귀 끝이 빨개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에스텔이 배시시 웃었다.
“예쁜 입욕제를 샀거든. 장미도 들어 있다? 향기가 엄청 좋아.”
기쁘게 말해주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샤워는 혼자…….” 하고 말끝을 줄이며, 그는 후다닥 욕실로 들어섰다. 민망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이유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 몸은, 좀 괴상망측했으니까, 그러니까 에스텔에게 보이기에는 말이다.
실버는 에스텔이 마련해둔 목욕물을 망치지 않도록 커튼을 닫은 뒤 얼른 샤워를 끝냈다. 가운을 입은 채로 에스텔을 불러들이자 에스텔이 살짝 웃었다. “그러고 목욕하게?” ……아니, 하며 그냥 벗을 수밖에 없었다.
몸집이 크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실버가 먼저 들어가서 에스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직 걸치고 있는 수건이 물에 젖는 무거운 느낌이 났다. 에스텔은 보다 스스럼없이 가운을 벗으며 물속으로 들어왔다. 욕실에 낀 수증기 덕분에 서로의 모습이 뿌옜지만, 이건 뿌옇게나마 보였다는 소리다.
물에 뜬 은은한 펄이 에스텔의 다리에 감겼다. 우유처럼 뽀얀 분홍빛 물살은 탕의 열기에 달아오른 에스텔의 피부색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 실버는 에스텔이 미끄러져 빠지지 않도록 품에 꼭 끌어안았는데, 이 대목은 예상치 못한 건지 에스텔은 뺨을 붉혔지만, 역시 열기 탓이라고 돌릴 수 있는 정도였다. 실버는 그저 에스텔의 몸이 약하고 부드럽게만 생각되어 조심하고 있었다.
동동 뜬 꽃잎을 후, 분 에스텔이 가볍게 물장구를 쳤다. 포글포글 거품이 올랐다. 손이 매끈해져 어딜 붙잡든 그대로 스르르 빠져나갈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런 데에 익숙지 않은 실버는 에스텔의 손을 더 힘주어 잡을 수밖에 없었다. 웃는 소리가 커튼을 젖힌 욕실 타일을 울렸다. 아무리 탁한 곳에 부딪친다고 한들 낭랑할 목소리.
“이거 좋다, 그지?”
“……응, 좋아.”
주어 없는 말.
실버는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물 위로 흩어지는 에스텔의 머리카락도 모아서 묶어 주었다. 수건처럼 보드라운 헤어밴드를 쓰자 에스텔은 영락없이 토끼 같아졌다. 그런 작은 동물에 그녀를 비유하고 있었던 실버는 다음 이야기를 조금 놓쳤다.
“…갈까?”
“응?”
“주말에 쉬니까. 오랜만에 피크닉. 날씨가 좋더라고.”
겨울이 지나고 새단장한 공원을 말하는 모양이다, 라고 실버는 어렵잖게 추측했다. 좋은 산책로였는데 닫혀버려 속상하다며 에스텔이 몇 번 말했었고 실버도 그곳에 걸려 있는 출입 금지 팻말을 보았었다. 사실 에스텔이 말하지 않았다면 전연 몰랐을 것이다.
에스텔이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이 많다. 이웃의 존재라거나 그가 키우는 개, 목에 방울을 단 채 돌아다니는 어느 집 고양이(버려진 게 아니었다!), 딸기 파이를 더 달게 만드는 레시피 같은. 우유를 꿀에 넣을 때는 숟가락을 돌려야 한다거나, 이런 사실은 에스텔이 조금 더 약한 편이었지만.
간만의 휴일이고 쉬고 싶을 법도 했으나, 실버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에스텔은 고개를 바짝 들어 실버와 마주 보면서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곧 그녀가 말했다.
“거절해도 돼, 실버.”
“왜?”
“왜냐니……. 난 공부하지만, 실버는 일을 하잖아. 힘든 거 다 알아.”
그렇게 말하고서 에스텔은 또 미소 지었다. 이제는 이 얼굴에 슬픔의 그늘이 드리우는 날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어쩌면 성역, 생각하며 실버는 에스텔의 동그마한 어깨를 쓸어내렸다. 살갗이 눌리는 탄력 있는 촉감과 함께 장미 비누 향기가 훅 퍼졌다. 움직일 때마다.
실버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에스텔은 계속 재잘거렸다. 욕실 안이고 물 속이어서 조금은 낮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맨날 응, 이라고 하지 않아도 돼. 난 짐이 되고 싶은 게 아닌걸.”
“에스텔.”
“둘 다 어른이고…….”
“에스텔, 그런 말 마. 나는… 괜찮아, 약하지 않아.”
정말 그렇다고, 실버는 생각했다.
약하다면 여기까지 버텨오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생존자였다, 패잔병이 아닌. 들려주기 싫을 만큼 악착같이 살아왔고 그것은 괴물이 되어 영원히 에스텔에게 가닿지 못할 과거. 실버는 이미 정해두었다. 추억은 여기서부터, 라고. 에스텔과 함께 집을 공유하고, 그녀가 기쁘게 공부하는 것을 보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하거나 지금처럼 욕조에 몸을 담그는 일상이라면, 그는 어떤 괴물이든지 간에 무찌를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여태까지 겪은 것 같은 절망은 더 찾아오지 않을 터다.
이미 죽여버리고 말았으니.
역시, 목적어가 빠진 문장이지만 실버는 진심으로, 이렇게 여겼다. 그래서 지금처럼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에스텔은 포기하지 않고 말해주었다.
“내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깜짝 놀라서 도망갈걸.”
실버는 웃고 싶어졌다.
“무슨 생각인데?”
“…… 널 납치해서, 이불로 돌돌 말고, 따뜻한 꿀 우유를 타준 다음 마구 재워서 매니저 전화도 못 받게 할 거야.”
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날 수 있을 줄 몰랐던 커다란 웃음소리가 낭낭하게 울리자 에스텔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함께 눈매를 접었다.
“이번 주말에는, 같이 쉬자. 하루 종일 침대에서 영화만 보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몸을 담근 두 사람은 몸이 식기 전에 나와 서로를 수건으로 마구 문질렀다. 저녁은 역시 에스텔이 사 둔 먹거리였다. 근처 카페에서 예쁘게 포장해온 와플은 크림이 녹아내려 사과잼과 마구 뒤섞여버렸지만, 씨를 뺀 올리브를 잔뜩 넣은 샐러드만은 무사했다. 이 영양소의 불균형을 참지 못한 실버는 샐러드에 기름기 뺀 참치를 첨가했다. 캔을 따는데 옆에 있으면 위험하다, 는 이유로 에스텔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다.
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버는 자기 자신이, 그토록 자길 곯려주던 손님들처럼 가족을, 연인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가 자기 일을 궁리하고 있었다는 점도. 입에 들어갈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구매한 참치는 꽤 맛있었고 에스텔은 와플을 잘라 케이크처럼 천천히 베어 먹었다.
이때 함께 본 영화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다. 실컷 떠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에스텔 말대로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 몸을 일으켜려던 실버는 에스텔이 무심코 끌어당기는 바람에 다시 누웠다. 멀뚱멀뚱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장미 향기가 났다. 어젯밤 몸 담근 물에서 묻어온 향유였다. 그는 에스텔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입 맞추듯이 쥐었다. 창밖에서는 일찍이 깨어난 참새가 재재대고 있었다. 둘에게서는 같은 향기가 났다.
퀴퀴한 냄새가 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고, 주말이었으므로 매니저의 갑작스러운 전화도 없었다.
아니다. 문득 생각이 나 실버는 아예 전화를 엎어 두었다. 뭔가 오더라도 받지 않을 심산으로. 직업에 관한 한 그가 우선순위로 다른 사람을 둔 건, 기억하는 대로라면 처음이었다. 그것이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에스텔이 무어라 웅얼거리며 뒤척거렸다. 손안에서 멀어지는 그녀를 실버가 이불 째로 잡아당겨 안았다. 애벌레처럼 말린 형국이 된 에스텔이 눈을 떴을 땐 실버가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묻고 있었다. 눈을 떠도 앞이 깜깜해 밀어내던 에스텔도, 체온을 느끼고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웃는 소리.
실버가 웃음소리를 냈다. 돌돌 말린 이불 속에서 쏙 뻗어 나온 손이 실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실버는 에스텔의 뺨에 콧등을 비비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귀여워.” 에스텔이 이불 속에서 우물대듯이 말했다. 실버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했다.
“……날 귀엽다고 하는 건 너밖에 없어.”
“까치집… 귀여워.”
“…….”
실버가 벌떡 일어나려고 하는데, 에스텔이 온 힘을 다해 엉겨 붙었다. 폭신폭신한 애벌레의 공격에는 별 도리가 없으므로 실버는 벌렁 누워버렸다. 이른 아침의 서늘함은 금세 사라지고 향취가 분분하게 맴돌았다. 얼마 전 세탁한 이불에서 나는 솜 냄새, 격자창 바깥으로부터 반짝반짝 비쳐드는 먼지의 텁텁한 냄새, 장미 향기, 그리고 잊어버리려야 그럴 수 없을 에스텔의 체취.
에스텔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표정이 개구졌다. 실버는 차마 꼬집진 못하고 그런 그녀의 콧등에 촉 입 맞추었다. “행복해.” 에스텔이 꿍얼거렸다.
정말로,
정말로 그러한 날이라고, 피로를 씻은 듯이 느끼며 실버는 생각했다.
그러나 참은 참이고 까치집은 까치집이다. 그는 얼른 일어서서 빗질한 뒤 다시 에스텔을 안아 들었다. 그녀는 고새에 잠이 들어 개운하고 몽롱하니 곁을 끌어안았다. 시간이 멈추었다고 생각될 만큼 고운 세월이.
실버의 피부를 감싸며 휘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