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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

나사르 본주 2022. 6. 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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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악센트

 

 

 

달콤한 과자를 먹지 않아도 이는 썩었다. 실버는 판자가 잔뜩 쌓인 담벼락 한구석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금니 쪽에서 통증이 지속된 지 사흘 즈음 된 것 같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예민스러웠고, 고아라는 태생과 잘못된 양육방식을 주입한 가정환경은 이러한 기질을 나쁜 쪽으로만 발전시켰다. 아이는 자기 자신이 기민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채 위탁된 아버지의 숨소리와 발걸음을 구분했고, 성인 남성의 구둣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나면 침대에 누워 얼른 눈을 감았다. 마치 아들처럼, 나가서 다녀오셨느냐며 맞이했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에게 매질을 당한 일도 한두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갈수록 이 아이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년기의 골격이란 게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친혈육에 도취해있던 그의 우울증 초기 양상 또한 점점 중상이 악화해, 이 세상에 사랑했던 존재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과오로 인해 영 다른 아이를 자식처럼 대해왔다는 걸 생각게 했다. 남자는 실버를 뜯어보고는 했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실수는 감당한다는 게 그의 사고관이었고, 실버를 완벽하게 만들어 적어도 거슬리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잘 될 리가. 비뚤어진 마음은 비뚠 시선을 만든다.

보드카 반병을 마신 남자는 아역배우래도 만족시키기 힘든 감독일 테다.

안쪽 어금니가 아팠다. 크면 사랑니라는 것이 난다고 이야기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버는 충치도 한 번 생겨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입술이 저리도록 단 케이크나 과자를 마음껏 먹어본 적이 없었다. 이 아이가 양껏 먹어봐야 한 접시가 안 될 터이며 예의 바른 성정은 쿠키 한 개에서 멈추었을 텐데, 박약한 세상은 그에게 그 정도의 달콤함조차 아까운 모양이었다.

사랑이나 달달한 음식과 멀기만 한데 통증이 멎지 않는다는 건 억울한 일이었다. 약간의 친절함을 발휘해 그에게 검은 빵과 하얀 우유를 줄 사람이 있었다면 실버는 그 음식을 받은 자신의 겸손치 못함을 탓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그가 이유를 찾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실버는 결론내렸다. 양치를 못 해 그렇구나, 교육받은 대로(보육원에서는 치과 비용을 대기 싫어서, ‘아버지는 착한 아들을 보고 싶어했기에) 하루 세 번씩 해야 이가 썩지 않는데. 아직 어린 그에게 바깥 생활은 비위생, 불청결과 동일한 어휘로 여겨졌다. 공중화장실을 잠가놓고 재량껏 수도를 쓸 만큼 길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실버는 도시를 떠나지 못했다. 남자의 집이 근교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음 저변에 은밀한 불안을 불어넣어, (대부분 거리에서는 쓸모없을) 소박한 짐과 약간의 돈이 든 책가방을 끌어안은 채 불현듯 잠에서 깨고는 했다. 위기감을 깨닫게 하는, 선량한 악몽을 꾸고 나면 두 손가락이 하얗게 질린 채 별것 아닌 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있었다. 지나가던 걸인이 들어 올렸다간 실버가 달랑 들려 올라갈 만큼.

그는 부랑배 소굴인 뒷골목 혹은 굴다리 밑에서 잠드는 게 위험하다는 걸 영리하게 파악하고는 대로변에서 잠들었다. 취객이 재미 삼아 툭툭 건드리는 건 별다른 해가 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는 십여 년 전 총기 사용이 엄금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에 따라 치안령이 강화되어서, 아침이 되기 전에 잠을 떨쳐내야 했다. 또다시 아동보호소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그곳에서 으로 돌려보내지지 않으려면.

소년이 남은 돈으로 기차표를 예매해 어딘가 시골로 멀리 떠나 잡일을 할 만큼 담이 컸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터다. 하지만 그것은 실버에게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을 벗어나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대신에, 한 가닥 희망처럼 이 나라를 벗어나는 걸 목표로 했다. 떠돌며 일을 구하고어딘가 박봉으로나마 채용해주는 곳이 있다면, 당치도 않은 달콤한 과자와 깨끗한 옷을 포기한 채, 유니폼의 숙주가 된 것처럼 행세하리라. 한 푼 두 푼 모으면 배편을 탈 만큼의 돈이 모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머나먼 일이므로 실버는 안심했다. 당면한 과제는 수도 없이 많았고 하나같이 높은 벽이었다. 소년은 언저리의 삶이었으므로.

실버가 가방을 뒤졌다. 책가방 안에서 포장조차 되지 않은 딱딱한 빵이 나왔다. 빵집 쓰레기통을 줄 서서 뒤진 결과였다. 한창 성장기인 몸에 기별도 안 갈 작은 양이었다. 실버는 딱딱한 껍질을 벗기며 부드럽고 질긴 탄수를 성급하게 물어뜯었다.

낮에는, 상가 외벽에 기대어 바쁘게 북적이는 군중을 바라보는데, 전화기에 대고 소리 지르며 걸어가는 한 아주머니가 장바구니 위쪽에 올려놓은 장미 잼이 눈에 띄었다. 잼 병은 햇빛을 정교하게 반사하며 보석처럼 반짝거렸고 뚜껑은 황금처럼 노랬다. 병에 붙은, 아직 비틀려 떨어지지 않은 씰 스티커가 실버는 만져보지도 못할 새것, 금빛 인생이라는 걸 노래 부르는 듯했다. 실버는 조용히 다가가서 병을 만져보았다. 그냥 만지기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손에 닿은 미온함이 달가워 그것을 주머니에 슬쩍 넣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터덜터덜 걷는 그의 발바닥부터 발등, 정강이와 엉치뼈를 관통하는 자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머니가 묵직하게 철렁거렸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즈음 실버는 그걸 꺼냈다. 뚜껑은 도시화한 여인들의 손에 익숙해져 닭 모가지보다 쉽게 비틀렸다. 쌀 스티커의 접착 부분이 쭉 늘어나 손가락을 끈적거리게 만들었다. 이가 아팠다. 하지만 이건 덜 달 거야, 장미잖아. 장미꽃은 쓰기만 하고 달지 않으니까. 실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인제 보니 뚜껑은 개 오줌 얼룩처럼 누렜고 병의 모양새는 공장제치고 성글었다. 빛나는 크리스털이나 황금 덩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실버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말캉한 잼 윗부분을 푹 찔렀다. 어떤 악의와 골이 깊은 복수심이 섞인 마음으로 자그마한 병 바닥까지 손톱이 긴 때 진 손끝을 밀어 넣었다. 마침내 잼이 뭉근하게 묻은 손가락을 한입에 넣어 빨 때, 소년이 알기로 이보다 달달하고 포근한 품은 없을 것 같았다.

빵에서는 탄 맛이 났고 훔친 잼에서는 죄악의 냄새가 풍겼다. 어쨌거나 그의 생계를 이어줄 먹거리였으므로 실버는 투덜거리지도, 신에게 용서를 빌지도 않았다. 다만 손가락을 쭉쭉 빨며 잼 반병을 비웠다. 타서 별로 먹을 부분도 남지 않은 빵에게는 너무 호화스러운 장식인 것 같았다.

후일 실버는 그것이 마트에서 제일 싼 값에 팔리는 유명한 브랜드라는 걸 알게 되지만, 집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고, 스스로 장을 보는 경제적 자유마저 박탈당하고, 부랑아라며 식료품점에서 쫓겨나는 이 시점에는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불현듯 눈물이 흘렀다.

낮의 도심에는 훔칠 수 있는 것과 절대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예를 들어 장바구니에서 흘러내릴 것 같은 낡은 스카프나 누군가 먹다 만 햄버거와 반 뼘 정도 길이의 잼병은 훔쳐도 괜찮았지만, 유리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 고운 구두와 커프스단추, 비단 넥타이 같은 건 안 됐다. 짐승 가죽을 벗긴 값비싼 가방과 버려진 명주실 스카프도. 마음먹는다면 흡연 구역에서 담뱃갑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실버는 그 매캐한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에 밸 것 같은, 추레한 냄새를 뿜는 연기.

소년은 품위의 하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상처 난 사과 한 알을 훔칠 뿐. 그런 과실은 시고 떫었고 사랑을 주지도 않았다.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낸 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건 날이 풀려 길가에 진흙이 지는 봄. 지금은 이렇게 무더우니 여름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시간도 날짜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새벽녘 빵집 밖을 기웃거릴 때나 벽에 붙은 시침을 겨우 확인했고, 늘 이른 새벽이었다.

실버는 살갗이 가슬가슬 일어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울음을 삼켰다. 입안이 달고 아팠다. 단 걸 먹어서 더 아픈 것 같았다. 부르터 상처 난 마음은 상냥한 말만으로 아파지는 것처럼.

그는 영리했으므로,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두려워졌다. 받지 않아도 좋으니 무엇에건 애정을 붙이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생의 이유가 된다 하더라도. 타인을 착취하고, 좋아하는 과자를 갈취하고, 악몽을 꾸게 하지 않을 것이다. 손에서 피가 난들 그들이 따스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까닭 없이 생겨나는 외로운 소년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굵은 구두 소리가 들렸다. 실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꾀죄죄한 무릎에 닿은 미지근한 물방울. 지나가던 남자는 실버를 눈치채지 못하고 멀어졌다. 실버는 입을 꾹 막고 눈물을 터뜨렸다. 까닭 없는 외로움에 지쳐, 어깨 떠는 소년 따위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른이 된다면 여태 만난 모든 사람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야지. 빵집 벽에 걸린 새벽녘의 목숨으로 그는 다짐했고, 울다 기운이 빠져 눈을 감았다.

장미 잼이 들어 있었던 유리병에 싹싹 핥아먹은 당분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몰려든 파리가 빠졌다. 발치에 널브러진 책가방에도 끈적끈적한 손자국이 남았다. 파리는 자기 발을 붙잡은 게 어떤 죄인지 모르는 채 싸구려 설탕을 물고 빨았다. 아무리 손을 비비고 기도를 해봐야 몇 시간만 지나면 젤라틴 덩어리에 발이 묶일 테고 그는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터였다.

파리는 겹눈에 비치는 세상이 유별나게 뿌옇다고 생각했다. 사방이 막혀 숨이 찼고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볼품없는 소년이 훌쩍거리던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고요한 도심의 밤이 그의 날개 위로 죽음처럼 내려앉았다. 별 대신 가로등이 켜진, 아스팔트가 식어가는 이 밤이 파리에게는 무척 익숙했다. 슬럼가 배수구서 태어나 장미 잼이 들어 있는(적어도 파리에게는 여전히 그러했다) 통에서 죽는 건 휘황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버릇대로, 궁상맞게 손을 비비며 하늘을 보는 사이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들러붙는 근교 빌라 상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걸 파리는 알았다. 그곳 여자는 항상 노래를 불러댔으니까. 세련된 이국 발음은 파리의 조그만 머리를 된통 흔들어 놓을 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익숙해졌다.

소년의 귀에도 이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파리는 생각했다. 비록 자기 자신은 아침이면 죽어 있겠지만. 소년은 또박또박 걸어 유리병을 남긴 채 걸어 나갈 것이라고. 으레 그렇듯 의심도 실망도 하지 않으며 파리는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