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ㅅㄴㅋ님

나사르 본주 2022. 6. 15. 20:26
더보기

유리로 된 장미 무늬 창

알비 나이델 xxx 년 백작 저 귀증.

 

 

멋들어진 초대장을 찢어버린 건 아리아였다. 값비싼 보라색 잉크가 쓰인 종잇조각이 나풀거리는 가운데, 아리아는 그게 발코니에 든 흰나비인 듯이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 생일 따위가 왜 중요한지 모르겠네.” 에이드리안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잘 모르겠네, 당신이랑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에이드리안, 당신에게 내 생일이 왜 기념할 날인지 모르겠다며 반항했음 직하다. 아내라는 자기 처지를 아직 못 받아들이고 있는 가련한 처녀이니까. 사실 에이드리안이 신경 쓸 필요 없는 문제였다. 아리아 A. 러셀이 어느 쪽 가치를 중요시하는지, 어떤 마음인지에이드리안 본인의 마음마저 얼어붙지 않았는가. 그는 껍데기를 자칭할 수 있는 품위만 가진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꼭 그 정도의 품격으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다.

미친 듯이 종이를 물고 찢은 저 여자와는 달리.

에이드리안은 몸을 돌려, 방을 가로질렀다. 발코니 반대편에 문이 있다. 다행히 난간 폭은 널찍하고 아리아의 허리께를 넘어서므로 기어 올라가진 못할 것이었다. 아리아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반항하고 싶을 뿐. (이라고 에이드리안은 믿고 싶었다.)

일주일 후. 파티에 참석만 해.”

안주인이 이 모양이니, 초대장을 발송하는 건 집사의 일이 될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만들고 쓰고 보내는 것까지 아내의 몫이 돼야 했다. 에이드리안은 자기 안에서 가느다란 믿음 하나를 꺾었다. 이미 흰 나뭇가지가 뼈처럼 늘어선 황야에.

 

술이 넘쳐흐르는 잔의 탑, 여기저기 흐트러지기 시작한 테이블보. 음식은 동나자마자 채워졌으므로 매번 새로운 기분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만 늘었다. 처음엔 그나마 격식을 차린 군무였다면 인제 와서는 흥청망청 아무나 붙잡고 놀았다. 카드 탑처럼 쌓은 크리스털 잔에 샴페인을 붓는 쇼는 잊힌 지 오래. 에이드리안은 자기가 든,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술잔을 들여다보다가 가느다란 잔 목을 톡톡 두들겼다.

파티의 주인공이 행차하지 않았다. 누군가 부챗살을 펴고 다가와 부스러기 가십이라도 얻을라치면 에이드리안은 눈썹을 나긋하게 휘며 대답했다. “기대가 깊어, 단장이 오래 걸리나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손님은 호호 웃으며 멀어졌고 에이드리안은 그가 얻고 싶은 것을 이미 움켜쥐었다는 걸 알았다.

아리아는 아마 시위 중이겠지. 애꿎은 메이드만 머리카락을 재차 다른 모양으로 만져주며, 나가지 않겠다 하는 그를 살살 달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아리아의 전속 시녀는 에이드리안 집의 사람으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메이드가 자리를 비우고 집사장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네게 만든 건 오로지 아리아의 능력이었으므로 솔직한 심정으론 감탄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눈길을 돌리지도 않고, 쪽지를 내리깐 술잔을 하인의 쟁반에 놓았다. 눈치가 빠른 녀석인지 매무새 반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리아에게 갈 전보였다. 지금 당장 내려오라는. 이번처럼 성대한 연회에 얼굴 비추지 않는 건 고집을 넘어선 죄였다. 적어도 사교계에서는, 그랬다.

에이드리안은 많은 걸 바라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포기와 타협이 빠르다는 걸 일찍이 학습한 남자였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치가 없는 짓도 있는 법이다. 아리아가 나오지 않는다면 처세를 좀 포기하고 찾아갈 생각이었다.

드물게도 아리아는 말을 들었다. 어쩌면 최후통첩이라는 걸 알아들은 영리한 발상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으나, 에이드리안은 우선 창문을 가렸다.

발밑까지 길게 튼 테라스 창문틀에 성에가 끼어 있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어도 발이 굳는 날씨였다. 에이드리안은 마치 무대에서 내려가듯, 커튼을 매는 금줄을 풀었다. 이렇게 하면 굳이 호기심을 가질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안쪽 정황에 집중하느라, 아리아가 떨고 있다는 걸 안 것은 조금 늦은 뒤였다.

에이드리안이 돌아보았을 때 아리아는 꼿꼿이 서서 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게 가장되었다는 걸 이젠 에이드리안도 잘 안다. 순종하는 얼굴이 능숙한 이였다. 그런데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늘 그의 남편 된 심기를 거스르고는 했다.

.”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그제서야 그는 분노를 느꼈다.

무슨 짓이야?”

그로선 놀랍게도, 아리아는 웃었다. 소매가 차분하게 늘어진, 생일연회에 어울린다고는 말할 수 없는 평상복자글자글하게 박힌 은가루와 레이스로만 짜인 소맷부리차림으로.

에이드리안은 아리아가 격식에 맞게 등 뒤로 끌리는 우단과 풍성한 맵시 갖춘 옷을 걸친 꼴은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체구 맞는 하녀를 시켜 그러한 드레스를 재단해두었는데도. 아랫사람에게 사치를 체험시키기나 한 것이다.

쓸데없이. 그는 혀를 차며 겉옷을 벗었다. 어쨌든 간 저런 홑겹 의상이 서리 내리는 기온을 감당치는 못할 터였다. 그러자 아리아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저리 쉽게, 싶은 몸짓이었다. 수풀에 숨어 있다가 잠시 날아오른 요정처럼. 에이드리안은 환시를 물리치려고 했다. 아리아가 단지 발 받침을 밟고 올라선 것임을 간파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른거리는 혼란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방법이 있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디서나 문이 열려 있으면 아리아는 나갈 수 있다. 하다못해 창틀을 휙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무심결에 자신이 그를 가두었다고 여기고 있었음을 자각하고서 조금 놀랐다. 마치 관계에 얽매인 것 같지 않은가. 가문의 존속과 번영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왔으면서.

언제나 곤충의 속 날개 같은 가운을 걸치고 하늘하늘 걸어 다니던 아리아와 의자를 딛고 난간 위에 올라서는 아리아는, 두 점의 회화처럼 같은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영 어긋나 있었다.

시녀의 손을 쥐고 마차에서 내려서며, “크네.” 중얼거리던 여자. 남편이 벽에 기대어 선 걸 보았으면서도 양탄자 정중앙에 금이 그어진 마냥 똑바로 걸어 지나치던 안사람. 그리고 지금, 추위에 떨며 검은 포도주를 홀짝이는 지고한 존재는 다르다. 에이드리안은 헛생각을 지우려는 듯이 아리아의 어깨에 억지로 망토를 얹어주었다. 드물게도 아리아는 에이드리안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단단한 매듭으로 옷을 잠가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턱이 굳어 앙다문 소리가 났다.

와인은 어디서 난 거지?”

오는 길에 빌렸어.”

알 수 없는 말이다. 부엌에서 얻어온 것도 아니고, 이 잔치에는 검도록 붉은 과실주 따위는 내놓지 않았다. 이 또한 생일자이자 부인인 아리아가 계획했어야 할 일인데, 에이드리안 본인만 알고 있으리라 여겼던 사소한 부분이었다. 아리아의 머릿속을 넘겨짚은 꼴이 된 그는 상대를 질책하는 대신(이는 마땅히 부인의 일이었으니), 아리아에게 집안 돌아가는 꼴을 일러바치는 생쥐가 누구일지 고민했다.

돌려주진 못할 테지만, 주인공은 나잖아.”

아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더없이 담담한 투였다. 체온이 떨어져 불가항력이었으리라. 그래, 이이는 인간이다. 나비 날개 달린 요정이나 마술적인 저택의 유령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홧김과 추위로 굳어 있던 에이드리안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약간이나마 미소마저 지으며 입을 열려는데 아리아가 한 손을 치들었다.

에이드리안은 찰나 새하얀 팔뚝에 시선을 빼앗겼다.

투명한(아니, 그럴 리가) 살갗엔 소름조차 돋지 않을 것 같았다.

허옇게 마른 뼈가 핏물에 젖는다. 에이드리안은 뺨이 에이는 설원을 떠올렸다. 어릴 적 보내진 대척지의 풍경. 매운맛이 나는 추위, 숨을 삼킬 때마다 목에 부딪히는 살얼음. 세상의 살기 앞에 선 기분. 거기엔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기름진 털옷을 입은 사냥꾼이 퉁명스레 말하길, 이미 죽어 깃대일 뿐이라 했다. 에이드리안은 다시 그 앞에 서서 자신이 꺾은 비틀린 가지를 보았다. 마치 여태 저 팔을 꺾어 온 것처럼. 농도 짙은 과실주가 피와 같이 느릿느릿 흘러내렸다. 팔꿈치에 들러붙어 목께와 어깨, 가슴팍을 봄의 진창처럼 만들고서 에이드리안의 눈부신 망토에 툭툭 떨어졌다. 금붙이에 액체가 스며 얼룩이 지는 걸 그는 보았다.

아리아는 웃었다. 에이드리안은 약간 위로 들어 올린 시선을 흔들지 않으면서도 등이 뻐근해졌다. 그의 부인이, 끈적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미소에 날카로운 기쁨마저 엿보였다.

또 다른 사람. 에이드리안이 말했다.

밤은 추운데.”

추워. 몸이 젖어서 들어가야겠어.”

그대로는 안 돼.”

?”

시녀장을 부르지. 볼썽사나우니.”

갈 거야.”

아리아가 맵시 있는 몸가짐으로 바닥에 톡 내려섰다. 토도도 걸어가는 게 어린 무용수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반쯤 멈춘 머리로도 부인을 막아섰다. , 에이드리안이 짚은 유리창에서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이 고풍스러운 사저는 전통이 있다고 했다.

오래됐다는 소리다. 나무 격자가 부서지자 얄팍한 유리가 함께 박살 났다.

그는 그냥, 파티가 시작할 때 벌어졌던 화려한 쇼를 생각하고 있었다. 샴페인을 유리 탑 위에 부었지. 그것들은 풀로 붙여 놓아 꼼짝도 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준비된 다른 술잔을 쥐고 들어 올렸다.

아리아는 흔들리는 커튼 밑단과 반짝이는 잠금쇠를 번갈아 보았고 얼어붙은 쇠를 단단히 쥔 분홍빛 손가락도 보았다. 오롯한 광기의 목격자였으나 그는 호들갑 떨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래? 엉망이 되잖아.”

에이드리안은 흠뻑 붉어진 아리아의 뒤통수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아리아가 한산한 정원을 산책하듯 가볍게 이야기했다.

같이 망가지자는 거야?”

마음에 드네. 에이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손을 거두었다. 손마디가 얕게 찢겨 피를 내고 있었다. 왜 뼈와 가까운 살갗에서는 이토록 형형한 푸른 피를 낼까. 밤과 어우러진 분홍빛은 향기를 내뿜는 듯했고, 불그스름한 흔적이 남은 아리아의 귓등에서 실지로 달큼한 향내가 났다. 에이드리안은 묻고 싶었다. 여긴 꿈속인가. 연회 전날 밤 귀족들이 일으킨다는 히스테리 말이야. 그러면 아리아는 이렇게 대답할 거였다.

마음에 들어.

한낮의 꿈을 백일몽이라 부른다면, 한밤의 생시엔 무슨 이름을 붙인단 말인가. 아리아는 부서진 창문 사이로 솜씨 좋게 손을 집어넣었고, 냉정한 손짓으로 잠금을 풀었다. 커튼이 활짝 열렸다. 오백 개의 물방울이 달린 샹들리에가 휘황한 빛을 뿜었다. 시뻘겋게 물든 부인과 상처 입은 남편. 오한이 잠에서 깨어나, 가벼운 달음질로 무도회장을 밟았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아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역광 진 얼굴에선 표표한 잔상만 읽혔지만, 에이드리안은 손을 뻗은 채, 본 중 제일 아름다운 미소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