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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삽

나사르 본주 2024. 8. 19. 09:55

마지막 삽

 

 

 

 

 

 

 

 

 

 

물정 모르는 아이가 손가락을 빨고 있다.

자주 본 장면이다. 훼이시엔은 부모님을 따라 꼬마 정장을 입고 결혼식, 개업식, 아무 이유 없는 파티 등에 끌려다녔고 별다른 감흥 없이 귀여움을 받아왔다.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해도 어른들은 일곱 살배기 어린애의 동그란 머리통이나, 깨끗한 정장이나, 딱 맞는 값진 구두 등을 칭찬했다. 그들은 훼이시엔이 부모를 꼭 빼닮았다는 소리를 빼놓지 않았지만, 거울을 보면 그저 훼이시엔이 있을 뿐이었다. 훼이시엔은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일찍이 인지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부모의 그늘을 맞이했다. 부모님은 성공했고, 젊고, 아름다운 사업가였으며 훼이시엔 자신은 운이 좋게도 잘 태어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아들이었다. 게다가 다들 이 소년이 아버지처럼 잘생긴 얼굴로, 어머니 같은 능률을 타고났을 거라고 믿었다’.

어쩌면 훼이시엔 자신까지도.

 

그러니까이건 드문 장면이다. 물정 모르는 아이가 무덤 앞에 서 있다.

 

막 돋운 빨간 흙이 드러나 있다. 아이는 죽은 어른들의 유일한 피붙이라는데, 상복에 완장을 차고 있지만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아 사흘장을 번갯불처럼 볶아 먹은 건 훼이시엔의 부모였다. 훼이시엔은 사자들을 알고 있다. 파티가 아니라집에 객으로 모신 적도 있는 사람들이다.

친구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들이 와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방 안에서도 터키산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남자들이 너구리굴을 만들어 내는 동안 여자들은 환한 얼굴로 옆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 시간은 마치 훼이시엔의 놀이방같기도 했다.

그들은 여요휘라는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놓고 외출했다. 아이가 소극적이며 바깥세상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훼이시엔은 담배 연기 속에 쭈그려 앉아 체스 말(특히 퀸)을 가지고 놀며 이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등 알 수 없는 화제에 오르내리며, 어른 입맛대로 자랄 아이…….

그러나 나보다 어리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부터 네 동생이란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검고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파격적인 복장이었다. 친구의 장례식에 저런 옷을 입는다며, 한복을 입지 않는다며 다들 수군거렸지만 부모님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가 양장을 차려입은 데에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아이 어깨에 온전히 얹혀 있다. 어머니의 섬섬옥수 아래에서, 아이는 그저 따분해 보인다. ‘제 부모가 죽은 걸 알기는 할까?’ 걱정과 달리 이 애는 무덤 파는 날 입는 흰 상복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아마 오늘 이래로 오랫동안, 장례식 때처럼 검은 옷만을 걸쳐야 하리라. 유년기가 다 지나갈 때까지.

여요휘가 말했다.

 

안녕, 형아.”

 

형아?

 

아빠가 칭찬을 자주 했어샤오시는 정말 고운 아이라고.”

그렇지 않아.”

 

정말, 그렇지는 않다. 훼이시엔은 훌륭하. ‘고운것이 아니라.

따지자면 여요휘 쪽이 좀 더 곱상하게생기지 않았나. 얘도 제 어미를 닮은 거지. 죽은 부모를 호명하는 기분이 어떨지, 훼이시엔은 무척 궁금했다.

두 아이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사이, 어머니는 상여를 돌려보내느라 바빴다. 의례적으로 곡을 마친 장례꾼들에게 냉국수를 차려주려고 그런 거였다.

여름이었다. 소매가 긴 정장은 더웠고, 여요휘가 입은 베로 지은 상복은 시원해 보였다. 훼이시엔이 말했다.

 

그 옷, 나랑 바꿔 입어.”

?”

이건 너무 더워.”

좋아. 형이니까.”

 

그 애는 웃옷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저고리 매듭짓는 방법을 잘 모르는지, 풀 때도 어설펐다. 훼이시엔은 직접 여요휘의 옷을 벗겨주었고 자기 재킷을 벗었다. 그때, 어머니가 턱을 호두처럼 만든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녀가 신은 단화에, 어젯밤 비 내려 물러진 흙이 처벅처벅 묻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뭐 하는 거니?

 

옷을 바꿔 입으려고요.”

?”

너무 더워서요. 얘는 안 그래 보이고.”

그러면 안 돼, 샤오시. 상복은 벗어선 안 되는 거야.”

왜요?”

 

이번엔 여요휘가 물었다. 어머니는, 굳은 입매를 풀어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아휘, 너희 부모님은 정말 훌륭한 분들이셨기 때문이란다.”

 

이 목소리의 어머니는 함락 불가하다는 사실을, 훼이시엔은 알았다. 그는 여요휘에게 옷을 돌려주었고 재킷도 바로 입었다. 그가 말했다.

 

아휘는 이제 제가 돌볼게요. 고생하시잖아요.”

어머, 얘가 또 어른처럼.”

 

어머니의 가냘픈 등 뒤, 마지막 삽흙을 덮기 전, 아버지가 빨간 황토에 동전 한 닢을 던져넣는 것이 보였다.

유난히 무거운 상여였다고. 너무 좋은 흙이 솔잎을 금세 썩힐 거라고 상여꾼들이 상소리를 하고 있었다.

 

***

샤오시 형.

 

이제 짐 정리를 끝냈어. 일꾼이 한 명뿐이어서, 신신과 나 둘 다 며칠 내리 고생했는데. 다 하고 나니까 집이 참 멀끔하고 좋더라. 형이 잘 골라준 것 같아.

겉만 구옥이지, 안은 다 신식이야. 형네랑 비슷하지? 부동산 둘러본다고 바빴을 텐데, 나는 가만히 있었단 생각이 들어서 미안해지네. 그때 형이 그랬잖아, 난 어려서 집 볼 줄을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한 살 차이인걸. 물론 형이 나보다 훨씬 성숙하고, 나는 나이에 비해 못난 편이지만. 나한테 형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있잖아, 응접실을 형 취향대로 꾸몄어. 아내는 좀 더 아늑한 분위기를 원했던 모양이지만. 나무 벽에 흰 칠을 해서 형이 지내는 서재랑 거의 비슷해졌어. 이거 하는 내내 아신이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몰라. 그녀가 투덜거리는 표정은 꽤 귀여워.

이 주택은 바깥에서 보면 정말 목가적이야. 마치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처럼. 푸르스름한 기와가 얹혀 있고 물방울을 튕겨내는 검은 목재로 들보를 세웠지. 하지만 종종 늘어선 돌담 안으로 들어서면, 그 남색 대문을 지나면 완전한 서구식 정원이 펼쳐지는 거야. 수국, 장미, 히비스커스아신은 좋아하는 꽃이 많아. 그녀가 늘 향기로운 것과 관계가 있을까. 그녀는 내가 자개농 옮기는 걸 감독하는 동안, 벌써 전지가위를 들고 빨간 흙에 파묻힌 장미를 다듬고 있었어. 이러다가 과수원이 되면 어떡하나 몰라.

거실이 무척 넓어. 아신은 아직도 사랑채라고 불러. 남쪽으로 뻥 뚫렸고, 서쪽으로 한 번 더. 해 질 녘, 새로 단 창틀과 그 밑에 둔 소파로 노을이 쏟아지는 광경은 감격할 만도 해. 화폭 같다고 느끼고 있는데 옆에서 아신이 울더라. 감동받았다면서.

있지. 가정을 가진다는 건 꽤 행복한 것 같아. 내가 나만의 행운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신신을 만나게 해 준 삶에 무척 감사해. 바르고 좋은 여자야. 슬슬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아. 형이 바라던 일일까? 궁금해.

조금은 옛날이 그립다.

 

1937, 7. 아휘.

***

 

훼이시엔과 여요휘는 정원에 쪼그리고 앉았다. 펌프식 수도에 달린 긴 녹색 호스가 물줄기를 쭐쭐 뿜고 있다. 어머니는 요새 이곳에 연못을 파고 싶어 하고, 아버지는 거기에 잉어를 풀지 대나무로 만든 물레장식을 더할지 고민 중이었다. 결국 결정은 어머니가 내리리라는 걸 둘 다 알았다.

여요휘가 관심이 있는 건 물이 아니었다. 훼이시엔이 절대 꽉 잠기지 않는 호스 물을 보며 인상을 찌푸릴 때, 여요휘는 나비를 따라갔다. 아이가 빠질 우물이나 뒷간 따위가 없었으므로 이곳에 오면 보호자들은 육아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러니까둘은 공부 시간 이외에는 자유롭게 자랐다. 훼이시엔에게는 좀 심심한 일이었다.

 

형아.”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이 그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훼이시엔은 무심코 손을 잡아주었다. 그가 물었다.

 

왜 그래, 아휘. 재밌는 거 있니?”

번데기.”

 

그의 아휘가 느슨한 눈매로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와.”

아냐, 저건 나방이야. 때를 잘못 맞췄구나.”

 

정원 한켠에 난 잡초 이파리. 비를 용케 견뎌낸 듯, 뿌리 뽑히지 않은 그 잎사귀에 검은 번데기가 붙어 있었다. 너무 작아서 갈라진 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요휘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쭈그리고 앉아서 낮은 잎사귀에 눈을 댔다. 새파란 눈이 막 뿌려진 물처럼 빛난다. 어린 여요휘의 눈은 채도가 낮은 물길 같았다.

 

이것 봐. 나방이 아니야. 파르스름한걸.”

그건, 아직 날개가 안 말라서 그래.”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서 곤충채집 숙제를 했거든. 이번 여름에도 모았어. 너도 볼래?”

볼래.”

도감도 있는데.”

그건 별로…….”

 

여요휘가 말을 흐리자, 훼이시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당혹스러워서 입술을 매만졌다. 이렇게 웃어본 지가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훼이시엔은 상냥하게도, 잡초를 뿌리 뽑아 집에 들고 들어왔다. 유모가 알기 전에 살금살금 방으로 가서 대나무장에 풀을 넣었다. “이러면 여기서 변태할 거야.” 그가 흐뭇하게 덧붙였다.

그럴 일은 없었다. 번데기가 날개를 가지는 과정은 잔혹하다. 밤사이, 대나무장은 이슬 한 방울 없이 방치되었고 힘을 다 쓴 나방은 굶어 죽었다.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나무 장을 열어봤을 땐, 말라붙은 이파리, 그리고 갉아 먹은 벽지 같은 연한 날개 쌍이 흩어져 있었다.

 

 

새장 안에 든 푸른 앵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질이 더러워서 장 안에서만 키우는 터였다. 신신은 그것을 잘도 길들여 가는 손가락 위에 얹기까지 했지만, 아무리 맛있는 모이를 쥐어도 그것은 여요휘를 쪼아댔다. 차라리 온순한 문조를 키우자고 말했지만 아내신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당신 마음대로 할 거라면, 이것만은 내 거예요.”

 

그녀가 토라진 이유는 여요휘가 아이를 갖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신은 여요휘가 좋은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기존 계약을 약간 틀어서, 사랑의 도피를 떠난 후라면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질 거라고. 신신은 아름답고 젊고 능력 있는 여자이니까, 누구든 놓치고 싶지 않아 할 거라고.

말하자면 아내보다는 소녀로서의 자존심을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그 드센 소녀 기질에 앵무는 항복했으리라고 여요휘는 매번 생각했다. 말했다가는 혼이 날 테다.

누가 어떤 바람을 불어넣은 걸까. 슬슬 노산할 나이라고, 직장에서 이상한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여요휘는 이마를 문지르며 책을 펼쳤다. 대화하지 않기 위한 수단일 뿐 한 글자도 읽지 않아서, 애먼 책갈피만 계속 다르게 꽂혔다.

책갈피……. 두 잎 클로버로 만든.

그가 입을 열었다.

 

아신.”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요. 각방 끝날 때까진.”

이 책갈피 말이야, 보여?”

매번 쓰시잖아요.”

 

앵무가 짧게 짖었다. 신신이 새장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여요휘는 미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샤오시 형이 만들어 준 거야.”

…….”

내가 이걸, 발견했지. 열네 살 때였어. 첫 애인한테 차이고 나서, 볼썽사납게 앉아 있는데 형이 돌아왔어. 같이 통학하다가 관둔 지 좀 된 시절이었어. 서먹하게 있으려니 나보고 그러는 거야어릴 때처럼 토끼풀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이건 또 처음 듣네.”

 

신신이 픽 웃더니,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모양새가 방어적인 태세였다. 낯에 어린 비린 냉소가 매서웠다. 여요휘는 시선을 마주친 채 눈을 깜빡일 뿐, 별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실수로 이파리 하나를 뜯어냈나 그랬는데, 형이 다친 클로버를 보더니 도감에 끼웠어. 아주 특별한 풀이라고. 형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지. 그래서 난, 내가 실수해서 다치게 한 꽃이라고 말 못 했어. 이게 바로 그거야.”

왜 차였는지는 알아요?”

 

신신이 입술을 길게 비죽였다. 여요휘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알다시피 내가 형편없는 남자니까.”

그래요. 늘 형, , 이 나이까지 형아니 뭐니 하면서. 그렇게 따르는 형님한테 장가가지 그래요?”

그것도 좋겠네.”

 

여요휘가 평소와 다름없게 대꾸하자, 아내는 치를 떨며 나가버렸다. 그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본연의 무표정이 방 안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책갈피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꽂아 넣었다. “그것도 좋겠네…….” 다시 한번 발음하니 소름이 끼쳤다. 자립하기 위해 부산까지 왔건만, 그는 형의 종로 댁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멀어질수록그래, 멀어질수록 훼이시엔은 뚜렷하게 떠올랐다.

 

아휘.”

 

라고 말하면서. 지금도 내 등 뒤를 막고 있지 않은가.

 

등을 받치는 손길.

 

여요휘는 키가 컸다. 하지만 형제가 나란히 서 있으면 여전히 뒤처졌다. 그는 파티를 즐기고 싶었지만, 훼이시엔이 뚱하니 앉아 있으면 함께 입을 다물었다. 책을 펼치고 유식한 체 하고 싶기도 했지만 도감을 달달 외운 형에 비하면 잡풀이나 아는 상놈 같아진 기분이었다. 이것이 열등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훼이시엔이 말했다. “우리 아휘는, 대체 뭐가 문제일까?”

 

형아.”

 

그가 애 같은 투로 속삭였다.

 

이제 그만 놔주면 안 될까.”

아휘는 아직 아버지가 될 수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

아이를 낳으면 책임질 게 많아지거든. 제 가족 하나를 간수하는 일, 그거 쉬운 일 아니야. 알잖아. 내가 아휘를 어떻게 보호했는지.”

 

토끼풀 시계는 저녁이면 시들었다.

아쉬워하는 아휘를 위해, 형은 채 마르지 않은 두 잎을 손수 코팅해서 종이에 끼웠다. 누르스름한 한지 가운데에 끼인 요상한 잎사귀가 어둑한 그림자를 비췄다.

여요휘는 책갈피를 들어 눈에 대보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그는 그런 식으로, 형의 그늘을 체감하고 싶을 때가 있었고 그런 자신을 경멸하고는 했다.

 

 

***

!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궁금한 게 있어서 편지해. 혹시 결혼할 생각은 없어?

그게, 형도 나이가 찼잖아. 이런 잔소리는 너무 많이 들었을까? 하여간 형이라면 신신과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양보해 준 거야?

그러지 마. 나는 형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거의 날 키워주다시피 했으니까, 이제 보답할 차례 같아. 사업상 알게 된 똑똑한 여자가 있는데 형이랑 잘 어울려. 언제 한 번 만나게 해 줄까?

아니면이미 만나는 여자가 있으려나? 애인이 있다면 정말 참견이었겠네. 형은 결혼 예복도 잘 어울릴 거야.

내가 본 사내중에 샤오시 형이 제일 잘생겼어.

 

1938, 1, 여요휘

 

***

 

결혼식 때…….

여요휘는 아내에게 키스할 시간에 한눈을 팔았다. 들콩 타작처럼 빠르게 진행된 혼사였고, 어머니가 알 굵은 혼주 반지를 낀 채 여전히 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는 성모상 같아 보였다. 이것이 여요휘가 가문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정말일까?

 

그는 전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갈 채비를 다 한 뒤 문득 몸에 힘이 빠져 드러눕고 말았다. 침상 위에서 흐트러진 옷을 바로잡아 줄 사람은 이제 없었다.

무도한 햇빛이 값싼 전보지를 투과해 그의 눈에 들이쳤다. 이런 식으로 책갈피를 보거나, 부모님의 안방을 훔쳐보던 시절이 있었다. 혹시나 진짜부모님이 돌아올까봐. 사실 거기 파묻힌 건 텔레비전 속 미국 쇼처럼 거대한 장난질일 거라고 믿던 시절.

그때마다 훼이시엔이 조용히 다가와 안아주었다. 그가 이렇게 속삭였다.

 

다 괜찮아, 아휘. 너는 나만 있으면 돼.’

 

이 기억은 다 사실일까?

 

괜찮아요, 요휘. . 제 뺨에 입 맞추세요.’

 

하얗고 풍성한, 미국식 드레스를 입은 처녀가 그에게 말했다. 요휘는 정중하게 입 맞추었고 식 중 잠깐의 정적은 화기애애한 박수갈채로 무마되었다. 어머니가 웃자 팔자 주름이 지는 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

 

여요휘는 생각했다.

 

그때, 왜 웃지 않았어?’

 

항상 뒤늦다고 느끼면서도,

 

왜 신신을 그렇게 노려봤어? 떠날 거란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한 번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어?’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며 전보지를 얼굴에 걸쳤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 여요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 집은 내일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서녘이 걸리는 사랑채, 고풍스러운 가구가 들어차 온화한 침실. 화사한 중국 접시와 웨지우드니 노리다케 출신 티 세트만 즐비한 응접실. 자개농 한 채만으로 꽉 찬 아내의 방.

아내가 채 지우지 못한 분내를 풍기며 저녁밥 짓던 부엌은 이제 다른 사람의 손이 타 지저분해질 터였다.

 

 

 

잘못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여상하게 생각하며 편지를 구겼고, 서구식 벽난로에 종이 뭉치를 던져 넣었다. 결혼하며 아휘에게 불쾌한 활기가 돈다고는 느꼈지만, 자신에게 혼인을 권할 만큼 멀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신신 그 여자,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힘이 들어간 턱이 하얗게 질렸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멈칫한 뒤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다 바로잡을 길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리다고 해도 그렇게 먼일이 아니라고 훼이시엔은 생각한다. 겨우 십여 년 전이었다. 그들이 중등학교에 다닐 시절이었는데, 항상 통학을 함께하던 아휘가 이렇게 말했다.

 

, 나 연인이 생겼어.”

 

이 시점에 훼이시엔이 벌컥 화내지 않은 것은, 이 나이대의 애인이라 해 봤자 편지를 주고받고 간식을 나누어 먹는 정도의 소소한 정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훼이시엔 자신도 그런 하찮은 고백 편지를 몇 통 받아본 적 있었다. 남학교치고 근방에 여자 기숙학교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전부 거절했다. 훼이시엔이 신경 쓰인 건 아휘가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런데? 뭐가 잘 안돼?”

아니그래서, 걔가 나더러 갈림길부터 같이 가자 하더라고. 등하굣길이 딱 맞거든.”

그래서?”

형이랑 같이 다니는 건 좀…….”

 

아휘는 가뜩이나 머뭇거리던 표정에 홍조를 띠었다.

마치 제 여자친구를 떠올리는 듯해서, 훼이시엔은 가소로운 분노를 느꼈다.

 

네가? 어떻게?’

한동안 따로 다니자는 거니?”

 

한동안, 이라는 말에 아휘가 움찔했으나, 그래도 되냐는 듯 슬쩍 고개를 들었다. 훼이시엔은 그 자리에서 혼을 내는 대신 동생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가 어린 살무사처럼 쉿쉿거리며 속삭였다.

 

그래. 그러자.”

 

사흘 뒤부터 그 여자애가 등하굣길을 바꿨다.

아휘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훼이시엔은 최초의 사춘기가 꺾인 동생에게 책갈피를 만들어 주었고, 그것을 특별하다고 주지시켰다.

 

네가 발견한 특이한 식물이야. (비록, 네 실수로 잎 한 장 잃었을 뿐이지만.)

(그 여자애는 끝까지 울고불고 하더라.) 형만 줄 수 있는 특별한 거야.

 

아휘는 그 갈피를 어른이 되어서도 썼다. 아주 소중하게. 훼이시엔은 그걸로 만족했다. 이후로도 별 잡스러운 남자애들이 아휘에게 꼬였으나, 고등부로 진학한 후에도 훼이시엔이 종종 찾아감으로써 그 일은 축소되었다.

훼이시엔을 기묘하게 생각지 않는 남아는 드물었다. 그래서 아휘는 특별한 종자였고,

샤오시에게는 더없이 어울렸다.

 

그는 드물게 전보를 쳤다. 짧게 적었다.

 

 

여요휘 전.

아휘, 부모님께서 위중하시단다. 서울로 돌아오렴.

병원에서 기다릴게. 훼이시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

샤오시 형에게.

 

모르겠다. 아내가 날 떠날 줄은 정말 몰랐어. 그녀는 날 사랑했거든, 분명,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함께 도망가자고, 아예 미국에 가서 잔디깎이 있는 집에 살자고. 이제 손에 먹물 묻히고 원예용 낫을 쥐는 일도 지겹다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만년필을 사줬어. 그랬더니 차라리 앵무새 깃털로 글을 쓰겠다지 뭐야. 그녀가 일을 관둔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렇지?

집 안은 고요해. 앵무새도, 여자도, 고용인도 나가버렸어. 내가 내보낸 거지. 그러고 나니까 오늘 아침이 무척 적막하고 좋았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하지만 곧 지루해졌지.

그녀가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불행이 들이닥쳤어. 친구가 회삿돈 들고 날랐다더라. 나에게도 책임의 소지가 있다면서 해고당했어.

늦은 시각에 혼자 일어나는 건외로운 일이더라고. 옛날에는 형이 문 앞에 와 있었는데. 형이 볼 때 세숫물에 얼굴을 담그면 잠이 다 깨고, 파티가 열리면 넥타이도 직접 매어줬잖아.

그 친구. 사라지기 전에 나한테 이랬어. “너처럼 속 편한 애가 생각이 많아서, 그래서 내가 불행한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그에게 불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 오히려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면 모를까.

정말로 내가 이기적인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다 질려 떠나는 걸까?

 

하지만, 형이라면 나를 핀잔 주지는 않았겠지.

 

걱정 마. 다 해결해 볼게.

나도 잘하는 게 있다는 거, 증명해 보이고 싶어. 혼자서라도 싸울 수 있을 거야.

 

1938, 8, 아휘.

 

이 편지를 여요휘는 스스로 뜯어보게 되었다.

부모님은 돌이킬 길 없이 나빠지셨다. 원인은 식중독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요리할 때 미리 맛을 보았으므로 입원 당시 이미 심각했다고 했다. 여자가 배 아픈 건 아무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잠시 업무를 보러 서울 모처에 나갔던 훼이시엔이 인력거를 타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유모가 사람들을 병원으로 옮겼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부모님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찰나를 놓쳤다고 훼이시엔은 자책했다.

 

개복해야 했대. 속을 다뒤집어서 씻어내야 했단다. 무사히 회복하실지, 그건 모르겠네. 오늘 우리 집에서 묵어.”

아냐. 호텔 예약해 놓았어. 형 괜찮아?”

? 형은 왜. 그리고 그거 취소했으니까, 우리 집에 있어. 부모님 저렇게 되시니까 불안하다.”

?”

왜 그러니?”

아니, 알겠어. 불안하지 그럼. 그럴 수밖에 없지…….”

 

주춤주춤 다가온 아휘가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 훼이시엔은 어깨 너머로 쓱 웃었다. 그러다가 간호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곧장 무표정해졌다. 주변 눈길을 의식한 것은 아니고, 실수로 벌레 밟은 얼굴이었다.

아휘가 품속에서 웅얼거렸다.

 

편지 봤어?”

뭘 보냈었니?”

말이 잘못 나왔네.”

 

훼이시엔이 아휘의 어깨를 붙들고 거리를 뒀다. 그가 짐짓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은 애원하듯이 말했다.

 

형아한테 거짓말할 거야?”

거짓말이라니.”

 

아휘의 눈은 채도 낮은 물길처럼,

말하자면 마당에 잘못 팠던 연못처럼 탁하고 얕았다. 잉어가 살 수 없는 늪이 되어 결국엔 다시 메워야 했다.

훼이시엔은 어른들이 바보짓이나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계속 물어뜯었다.

 

거짓말이잖아. 편지를 읽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우체통에 뭔가 있던걸. 그걸 보낸 게 너니, 하고 내가 물었잖아.”

그런 의미였구나. 맞아하지만 이제 후회해. 그러니까 읽지 말고 태워버리자.”

그래, 그러자.”

 

여요휘는 훼이시엔이 그러지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는 막연히 갑갑한 마음이 들어 제 셔츠에 손바닥 땀을 훔쳤다. 형 앞에 서면, 언제든 황토 봉분을 바라보던 어린애가 된 심정이었다. ‘그때 형이 뭐라고 그랬더라.’

 

- 너는 내 거야.

 

이 기억은 사실일까? 아니면, 이 철없고 무지하며 소년티 못 벗은, 아비 될 자격조차 없는 사내가 지어낸 망상일까?

여요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연이은 풍파로 창백해진 낯에 엷은 식은땀이 맺혔다. 훼이시엔이 뺨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밖에 비가 내리니?”

아니야. 그냥, 뛰어오니까 더워서.”

인력거를 잡지.”

마음이 급했어…….”

집에 가자.”

호텔에서, 짐만 가져올게.”

집에 가자니까.”

 

여요휘는 눈을 떴다. 먹먹한 구름처럼 침잠한 눈동자에 훼이시엔의 상기한 얼굴이 비쳤다. 그렇다, 형은 흥분해 있다. 부모님이 위중한 상태로 실려 갔는데도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말하고 있다. 본가를 정리하거나 서글퍼할 계획이 아니다. 그저 여요휘를

 

나를 망가뜨릴 생각뿐이야. 형은.’

 

사랑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 든, 잘게 찢어낸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인력거를 타고 오며 야금야금 조각낸 편지지에서 여전히 꽃향기가 났다. ‘아신에게 돌아가야 해.’ 그는 생각했다.

훼이시엔이 무릎을 굽혀 종잇조각을 주워 올렸다. 이게 뭘까, 하는 골똘한 시선이 끔찍하도록 익숙했다. 그가 신신을 볼 때 이런 얼굴이었다.

애초에 여요휘에게 아내의 자리를 베풀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

당신이 볼 거라고 생각해서 써요.

 

읽기 전에 저녁 들어요. 부엌에서 채소가 다 썩어가는데 어떻게 이걸 몰라요? , 이 만년필 참 아름다워요. 그 백화점에서 샀대서 싫어했던 거예요. 당신을 따라와서 부산에 지점을 두다니 너무 잔혹하잖아…….

 

나는 고백하기 위해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무도 없더군요. 머리가 어찔했어요. 당신이 본가로 돌아가는 걸 막아야 하는데. , 그 남자 때문에 내가 당신을 배신할 뻔했는데.

 

당신이 형님으로 모시는 사람, 좋은 사람 아니야. 내 말 들어. 요휘. 우리는 부부잖아.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는데.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절망하는 걸까?

 

내일 또 올게요. 그러니까 이제 정말 수저 들고 밥 먹어요. .

 

 

사랑을 보내며, 신신.

 

 

여요휘는 맡겨둔 짐이 하나도 없는 호텔에 가는 대신, 부산행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비가 내렸다. 젖은 옷은 꿉꿉했고 주머니 안에서는 종잇조각과 잉크가 엉켜 옷을 망치고 있었다. 겉과 속 모두, 멀끔한 다른 승객에 비하면 끔찍한 몰골이었다.

여요휘는 기차가 멈추어 설 때마다 움찔거리며 깼는데, 혹시라도 이번 역에서 훼이시엔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모르는 사내가 다가와 중절모를 벗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그가 너무 크게 움찔거려서, 사내는 당황한 듯했다.

 

.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사내는 신문을 펴고는 한마디 말도 않았다. 서울 사람이군. 서울 사람들은 냉정하구나, 여요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생각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신신은 서울에서 자랐다. 영특하고, 문조처럼 예쁘장했지만 성질에는 불같은 데가 있었다. 여요휘는 그 점이 친근스레 생각됐다. 사춘기 시절 잠시 사귀었던 여자애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다가왔던 좋은 이들은 어째선지 섬찟한 몰골로 멀어진다.

돌아가면, 여요휘는 집을 내놓았던 걸 철회할 생각이었다. 중개인이 무지하게 화를 낼 테지만 어쩔 수 있겠어. 그곳은 신신의 집이기도 한걸.

창턱에 턱을 괴자 사내가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는 흠, 하고 서울인 특유의 점잖고 냉철한 억양으로 물어왔다.

 

어디로 갑니까?”

부산에 갑니다.”

, 사업차?”

거기에 아내가 있어요.”

 

사내가 자기 손목시계를 풀더니, 뒤집어서 조그만 유리 안에 넣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내 딸들입니다. 아주 귀엽지요?”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마침 회벽이 잇는 구간을 지나, 바깥은 말간 녹색이었다. 여요휘는 오래간만에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아내와 딸들이라니, 여인에 둘러싸여 사시네요.”

여인 천하의 집안이지요. 싫다는 건 아닙니다?”

여자 마음을 사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여요휘가 물었다. 짐짓 간절한 투를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사내는 웃으면서 친근히 알려주었다. “백 송이의 붉은 장미를 그리 좋아합디다.”

 

여요휘는 장미 다발을 망치처럼 쥔 채 아내와 만났다.

 

부산역이었다. 신신이 멈칫하며, 다가와서 박쥐우산을 씌워주었다. 여요휘는 그때까지 우산 장수를 물리치고 비에 젖어 있었다. 그녀가 측은지심 담긴 어조로 말했다.

 

감기 걸려요.”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정말 떠날 생각이었어?”

할 말이 있어요.”

이러지 말지.”

가벼운 다툼이었을 뿐이에요. 당신이 과민반응하고 있어요.”

내게는 사랑을 상실했다는 것처럼 들려.”

그거야, 언제나 훼이시엔 이야기만 하니까.”

 

잠시 말이 겹쳤고 둘의 대화가 멎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요휘는 예민스런 표정으로 오른쪽 귀를 쥐고 눈썹을 찡그렸다. 어딘가 다친 사람처럼 구는 탓에, 신신의 눈썹이 더욱 처졌다. 그녀가 가만가만 말했다.

 

당신 삶에 관해서해 줄 이야기가 있어요.”

……일단 집에 갈까.”

아니, 여기서 말해야 해.”

집에 가자니까……. 아까 연락해서, 집 내놨던 것도 취소했어. 이제 당신이랑 내 거야.”

, 따로 방 얻었어요.”

 

여요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파도 소리가 너무 컸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 보니 그건 나방이 날개를 비비는 소리였다.

밤새, 밤새, 마른 날개가 서로 부딪으며 매미처럼 떨고 있었다.

 

신신이 까치발을 세우고, 여요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게 진실이에요. 요휘.”

 

여요휘는 잠깐 멍해졌다가, 눈에 총기가 돌았다가, 입을 벌렸지만 잉어처럼 뻐끔이고 다물었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여요휘가 장미 다발을 두 손으로 쥐고 내밀었다. 백 송이는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라서, 꽃집을 털어온 수준이었고 둘 사이에는 세 사람 몫의 간격이 생겼다.

그의 머리카락은 물이 뚝뚝 듣는다.

여요휘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남의 가족을 모욕하면 안 되는 거야, 아신.”

거짓말로 들려요?”

그래. 당신은 늘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덫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그리고 그걸 통쾌해했잖아.”

그건……. 내가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이에요.”

좋아하면, 이런 짓을 해도 된다는 건가?”

 

신신이 립스틱 묻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붉은 장미 다발과 참 어울리는 핏빛이었다.

그녀는 꽃다발을 거칠게 휘어잡고 패대기쳤다. 행인 몇몇이 이 꼬락서니를 지켜보며 흥미진진해한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새장 안에서 살아요. 당신은 병아리 때 날개가 잘렸지. 내가 그걸 못 보고. 내가 그걸 못 보고.”

염려하지 마. 난 아직 당신 사랑해.”

알아요. 우린 헤어질 수 없겠죠. 왜냐면.”

하지만, 사랑한다고 모든 걸 이해해 줄 수는 없어. 알지. 너는 현명한 여자니까.”

 

여요휘는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신신도 알았다. 결국 신신이 요휘의 품에 안겨 울었고, 그는 깨졌다가 붙은 열의 있는 애인 행세를 해 줄 수 있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멈춘 기차창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우산과 장미 다발은 다 떨어뜨렸고 열차에는 녹이 슬었고, 그는 수척했으며 비 맞은 도시쥐 꼴이었다.

 

아아.’ 여요휘는 생각했다. ‘이렇게 망가지는 거구나?’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불운은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거처를 한 번 더 옮겨야 한다면 그럴 테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요휘는 자기가 뭘 저버렸는지 알지 못했다.

진실은 그에게 강한 농약 같은 것이어서

 

말했잖아. 우리 아휘를 사랑해 줄 사람은 형뿐이라고.”

 

훼이시엔이 우산을 주워 들었다. 그의 미끈하고 커다란 손, 열기를 가진 품, 단단한 어깨가 빗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여요휘는 마지막 구명줄처럼 아내를 꼭 안고 연신 속삭여 주었다.

 

사랑해. 사랑해, 정말로. 당신을 믿어.”

 

, 거짓말.

 

물정 모르는 아이가 무덤 앞에 서 있다. 이 안에 묻힌 사람이 장난을 친 거라고. 열 밤이 지난 후 남색 대문을 열면, 장난감 상자를 든 사자들이 거기 서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다시 말해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하지만, 신신, 샤오시 형은…….”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 밤이었고, 내일은 온전한, 새로운 아침이 기다릴 터였다. 아마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다시는 몰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숨죽이고.

변명하면서. 추해지면서. 점점 쇠락하는 듯하여 마지막 날개를 밀랍으로 붙이며. 떨어진 곤충 박제에서 떨어낸 다리를 주워 들면서.

 

미비한 희망이 이 심장을, 지탱한다고 믿으면서.

사랑하는 집으로 갔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발치에 푸른 앵무가 죽어 있었다.

샤오시 형.

 

모든 게 다 좋아. 나는 새로 출발하려고 해.

사업을 하나 시작하려고. 부모님 일도 있으니까, 아신과 나도 더 힘내야지.

형이 얼른 기운 차렸으면 좋겠다. 답장해 줘.

 

1938, 8, 여요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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