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게 붙어 있는 케이크에 담배가 꽂혀 있었다. ‘이기 뭐고…….’ 연기가 꺼진 걸 보면 좀 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라세는 소파에 늘어져 자고 있었다. ‘삿쨩이 이칸거가,’ 하고 누루데는 고개를 기웃했다.지역 무대 MC로 불려 나갔다가 온 터라서, 그의 옷은 여전히 빳빳했고 반짝거렸고, 그리고 늦은 밤이었다. 기실 밤이라기에도 아침이라기에도 미묘한 시간이었다. 묵고 가는 일정이었는데 어째선지 거절하고 말았다. 뭐 그런대로 좋네, 하고 막기차를 타고 도착했다. 그뿐. 그러고 보니 삿쨩이 문자를 보냈었지.메시지는 간결했다. - 바보. 뭐고? 그는 소리도 없이 자는 아라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 안에 켜져 있는 불이라고는 텔레비전뿐이었는데, 그나마 편성표가 끝나 공허한 노이즈만 송출되고 있..
공조 윤오가 옆집에서 나왔을 때, 탄성을 터뜨린 쪽도 그였다. 제주는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은 헐렁한 배낭을 툭 떨어뜨렸다. 일순간 그가 옆집에 살고 있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윤오는 입술을 길게 늘였고, 웃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어어어.” 이걸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다.층마다 가구가 두셋이었고, 복도 끝 집은 어젯밤 야반도주했다. 이 층의 방범 카메라가 꺼져 있다는 건 지금의 작태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새로운 세입자들이 방을 둘러보러 오기 전 처치해야 했으리라. 제주가 자신의 방심하는 마음을 자조하는 사이 윤오가 훌쩍 다가섰다. 비린 생피 냄새와, 뜨끈한 열기가 훅 가까워졌지만, 그는 제주에게 손끝도 대지 않았다. 다만 내려다보며 이렇..
삿된 계절 거위 솜털 같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키스멧은 눈 쌓인 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체온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조그만 전나무는 눈의 무게를 감당치 못할 테고, 아마 키스멧은 이대로 보드라운 눈굴에 묻혀 사망하리라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생각해 버릇하는 건 어느새 생겨난 타성이었다.그때 야벳이 말했다. “나랑 가자.” 아무 대답 없는 키스멧을 향해, 그는 성가시다는 듯, 머리카락에 쌓인 눈송이를 훌훌 털어냈다. 키스멧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거든.그래서, 그러니까, 그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을 테고, 그럴 희귀한 필요성이나마 느낄 사람들은 죽어버렸고, 자연히 나도.여..
마지막 삽 물정 모르는 아이가 손가락을 빨고 있다.자주 본 장면이다. 훼이시엔은 부모님을 따라 꼬마 정장을 입고 결혼식, 개업식, 아무 이유 없는 파티 등에 끌려다녔고 별다른 감흥 없이 귀여움을 받아왔다.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해도 어른들은 일곱 살배기 어린애의 동그란 머리통이나, 깨끗한 정장이나, 딱 맞는 값진 구두 등을 칭찬했다. 그들은 훼이시엔이 부모를 꼭 빼닮았다는 소리를 빼놓지 않았지만, 거울을 보면 그저 훼이시엔이 있을 뿐이었다. 훼이시엔은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일찍이 인지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부모의 그늘을 맞이했다. 부모님은 성공했고, 젊고, 아름다운 사업가였으며 훼이시엔 자신은 운이 좋게도 잘 태어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아들이었다. 게다가 다들 이 소년이 아버지처..
매미 소리는 어설픈 물빛 매미가 운다.북미를 가로질러 2,500마일을 걸어가기 전에, 첫발을 떼기 전 네간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눈 뜬 그는 생각했다. ‘오래간만의 악몽이구나.’ 네간은 날이 잘 드는 플라잉 나이프로 손장난 치며, 눈앞에 붙잡혀 온 여자애 하나를 흘낏 보고 있었다. ‘구원자’ 일원 중 네간이 신임한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 여자애를 붙잡고 있느라 싸우지는 않았다. 잠시 오디오가 빈틈을 타서, 한이 말문을 열었다. “저…! 저는 기록자예요. 스, 스케치북 보세요, 네? 모든 걸 기록해놨어요. 그리고 당신… 아니, 보스의 이야기도 전부 기록할 수 있어요! 이 일은 분명히 후대에 길이 남아서 당신에게…….” 이 애 이름이, 그러니까 죽은 동료들 사이에서 눈..
그것보단 이게 나아요 그건 프라이스 역사상 두 번째로 멍청한 발상이었다. 애초 이곳에는 ‘비비안 벨벳틴’이든 ‘말콤 브라이언트’든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게 버나드의 생각이었다. 맞는 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물에 개어 쓰는 가루 형태의 파운데이션이나, 케이크 질감의 블러셔나, 역시나 물에 풀어 붓에 묻혀 쓰는 마스카라 등등은 전혀 ‘멋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온전히 미국적인) 60년대에 붙박인 대학 도서관 사서 여자가 쓸 법한 향수 냄새가 났고 그 대학 총장이 입을 법한 트위드 정장(금 단추, 무릎아래 길이)이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 쇼윈도 바로 앞에 세워 둔 네 개의 마네킹은 각각 여자, 남자, 여자, 남자의 모습으로 남성용 정장은 블랙과 그레이 둘 뿐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
몇 번째인가의*삶 모니카, 라고 소녀가 소녀를 불렀다. 모니카는 그 부름을 더없이 낯설게 느꼈다. “네가 날 이야기할 때는.” 모니카가 말했다. “천사라고 해야지.” 모니카가 말을 마쳤다. 모니카는 줄 위에 있었고, 가느다란 외나무다리를 타는 산양처럼 모두의 위에 있었고 균형을 잘 잡았다. 유연하게 구부러진 몸이 줄에 얹혀 한 차례 접혔다. 양팔을 줄 위에 뻗고 발끝은 발레를 하듯이 구부린 채 턱을 ‘들었’다. 머리카락이 전부 바닥으로 쏠렸다. 피가 머리께에 고이는 기분이었다.이것은 추락의 감각, 이라고 천사는 생각했다.아이스는 무언가 해괴한 것을 바라보는,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열일곱의 여느 때다. 우리는 서른세 번째로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이스는, 이번만큼은 나이랄 것..
발푸르기스 시드가 꾸는 악몽이 있다. 그 속에는 괴물이나 악마, 칼 든 강도, 죽음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꿈속에서 시드는 꾀죄죄한 아이 하나를 본다. 그 애가 무언갈 주워 먹고 있다. 거무스름하고 정체 모를, 석탄이 묻어 더러워진 빵덩이 같은 것이다. 당해에—그러니까, 꿈속 말이다—마을은 뒷간에서 살이 찢길 정도로 가난했으므로 시드는 이해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시드는 그 아이에게 굶주림을 잊을 수 있는 약을 주었다. 독초를 말려 말아둔 것으로. 아이가 채 받기도 전, 꿈이 끝난다. 그는 일어나서 상쾌한 냄새를 맡는다. 밖이다. 새벽이고, 축축한 이슬 때문에 온몸이 젖어 있으나 깔고 잔 방수포 덕분에 무사하다. 시드는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새 도마뱀과 온갖 곤충이 지나간 흔적을 ..
잭이 매주 두 번째 수요일마다 꾸는 꿈이 있다.이 기이한 현상은 브래들리 헤이먼과의 재회 전부터 있었다. 다만 꿈이니만큼 잭은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 잭이 이 꿈을 기억하기 시작한 건 브래들리가 쿠퍼를 살해한 뒤부터였다. 애처롭게도 그날 잭은 또 이 꿈을 꾸었다. 그는 모텔 복도를 걷고 있다. 양쪽으로 육중한 나무 문이 무수히 늘어서 있고, 붉은 카페트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잭은 카펫 한중간의 금빛 문양이 뒤집히도록 융단을 제쳐 도끼를 찾는다. 그곳에는 성경 속을 파 넣은 총 대신 늘 장작 도끼가 마련되어 있다. 잭은 멀거니 서 있다가, 어떤 방이든, 손에 잡히는 문고리를 연다. 제각각 까마귀 울새 곰 고양이 등 통일감 없이 장식된 것 중 항상, 부리가 부러진 비둘기다. 그곳에는 브래들리 헤..
마녀가 없는 세상 “팀장님.” 레겐은 드물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데시드 란스는 무한하게 뻗어 나온 넝쿨 사이에 갇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가두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란스는 가운데에서 쓴 박하사탕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었고, 손에는 먹다 남은 햄버거를 포장지째로 들고 있었다. 특이사항이 너무 많아 하나를 콕 집어 건넬 수 없었으므로 레겐은 이렇게 다시 물었다. “이… 게 무슨 상황입니까?”데시드가 뻗어낸 것 중에는 분명 장미 덩굴이 있었는데, 꽃은 단 한 송이도 없었다. 게다가 데시드는 매우 지쳐 보였다. 그가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일이에요. 괜찮으니까 헤치고 들어와요.”레겐은 그렇게 했다. 엉망진창이 된 사무실 의자를 끌어와(그 과정에서 넝쿨을..
안식일 1일 차. 주의 나팔꾼이 한 송이 포도를 즙내어오자 블나이는 돌아오자마자, 관리하지 않아 죽어버린 안뜰을 손보기 시작했다.휴일마다. 델프림은 두 번째 주차에서야 블나이의 취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는 이미 썩고 말라버린 장미 넝쿨이 거두어지고 아무렇게나 번지던 벨라도나가 유심히 뽑혔으며, 델프림이 제법 마음에 들어 하던 꽃마저도 예외 없이 싹둑 잘려 나갔다. 그때껏 블나이의 원예 생활에 별 관심 가지지 않던 델프림은 주일을 앞둔 밤, 화분 째로 버려진 꽃을 보고서는 묵묵히 블나이를 쳐다보았다. 블나이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한 손에 커다란 은빛 가위를 들고 있었다.델프림이 물었다.“그 꽃은 이름이 뭐였지?”“천사의 나팔.”“웃기네.”그게 끝이었다. 첫 주차는 그렇게 끝났다. 그..
올 유어 오너 이스마엘, 영어가 들렸다. 그는 부름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긴 행진 시위 중이었고 그의 강건한 육체는 쉽게 질리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한여름에 한 시간 넘게 걷고 있는 다른 시위자들은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이스마엘을 부른 ‘동지’도 마찬가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캡 밑의 얼굴이 일그러진 걸 보고 이스마엘은 피식 웃었다. “불렀는데 못 들었어? 저기서 누가 널 지켜봐.” 뭐, 흔한 일이었다. 스포츠 선수라는 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알 사람은 다 알아서 선글라스를 써도 파파라치가 붙게 마련이니까…….특히 동물실험 반대 시위 따위에 참여하고 있다면 더하지. 정경유착의 온상지에서 출두한 기자들은, 기업의 이익과 반대되는 이스마엘 카슨의 행동을 비난할 것이다. 그의 스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