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보기 ◀◀ 해가 질 무렵 아주 잠깐, 어떤 빛무리를 본 것 같았다. 바티에는 그게 도깨비불이라고 말했다.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는 것이다. 로렌 페르디난드는 곧장 반박했다. “도깨비불은 시체의 인 성분이 빛을 낸 거야. 하지만 하늘에 시체가 떠 있을 리 없지.” 바티에는 재미없다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간만에 로렌에게 장황하게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을 홀려 사막을 헤매게 만드는 도깨비불에 관해 말이다. 낮은 신기루가, 밤은 도깨비가 점하는 신비한 모래 바다에 관해……. 로렌은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뭐 볼 거라고?” 영화를 고르는 중이었다. 주스에 가까운 가벼운 술을 걸쳤고, 할 일이 없어 나른한데 시간은 아직 일곱 시고, 영화 한 편 본다 해도 아홉 시쯤..
더보기 칠보를 아교 삼아 낙원 의 여덟 가교 목도 한 후의 회고 티누아 니티스 나인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등에 달린 곤충 다리 같은 갑각 마디가 축 늘어진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평소 촉수나, 바르작거리는 벌레 따위를 연상케 했던 그것이 광배의 일식, 먹으로 묘사한 금빛 같았다. 젠은 벌벌 떨었다. 신의 죽음보다, 저 광휘가 떨어져 버릴 것이 두려웠다. 티누아 니티스 나인을 신성한, 확언하는 자로 만들던 저 다리 말이다. “나… 인.” 그는 더듬지도 않았다. 어느 시절에 젠은 눈물 흘리는 법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때 그의 꽉 다물린 잇새와 일그러진 눈썹은 목놓아 우는 사람의 것이어서, 되레 마른 얼굴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나인의 가슴팍에 은 탄환을 박아 넣은 자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총..
더스크우드 2차창작 더보기 죽음의 경우 Case. D-95042 범죄 현장을 그어 논 망가진 백묵 고리 안에 그가 누워 있다. 멀거니 갈라진 두 입술 사이로 개미가 꼬이기도 전, 벌어진 눈꺼풀에 아직 싱싱한 창공이 미어지게 비친다. 하늘이란 원체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 별 유감 없을 것이다. 이 처량함은 매일이 끄무레한 시체의 몫이지. 알란 블룸게이트 서장이 죽었다. 이른 가을, 연고 없는 집 뒤뜰에서였다.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알란은 네 번째로 다시 읽은 보고서를 재차 펼치며 안경다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얼굴을 한층 늘그막처럼 보이게 하는 ‘서장 안경’은 사무실에 두고 다녔고 이건 실내용이었다. 일회용 면도기를 사려고 dm에 들렀다가 함께 계산한 것이었는데 사실, 그가 안경을 쓸 만큼 시력이 나..
더보기 가을의 맏물과 민물 가재 먹는 날 함께 처마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이 손가락에 들고 있던 담배를 튕겼다. 확 뿌려진 불티가 낙숫물에 가라앉았다. 물이 불을 지지는 소리. 이곳은 지대가 낮아 이미 발밑이 진흙 웅덩이였다. 정강이를 꽁꽁 싸맨 장화여서 망정이지 캔버스화를 신은 옆 사람은 바짓단이 죄 젖어 있었다. 아드니엘이 에이버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흔한 일이었지만 집 바깥에 혼자 서있는 건, 그러니까 에이버리를 생각하며 곁에 있지 못한다는 건 여전히 외로운 일이기도 했다. 아드니엘은 이미 십여 분 전부터 여길 떠나고 싶었다. 옆 사람이 잘 포장된 담배를 뜯어 한 까치 물 때부터 그랬다. 아드니엘은 상대에게 라이터가 없기를 바랐지만 눈치 보더니 지팡이 끝으로 불을 붙이는 게 아닌가. 그는 울컥했..
더보기 가을철 신메뉴 출시 준비 중입니다 케이는 멍한 얼굴로 낙엽투성이인 카페 앞길을 슥슥 쓸어내고 있었다. 늦가을이었고 이제 목도리를 둘러야 할 철이었으므로, 케이가 카페 문을 일찍 닫는 사이 재키가 오븐을 가동하고 있었다. 오픈&클로즈 시간과 휴무일을 정확하게 지키는 이 카페가 셔터를 일찍 내렸다면 답은 하나다. 신메뉴가 구워지고 있는 거다. 따라서 단골들은 발걸음을 되돌리는 걸 나쁘지 않게 여기겠지만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달랐다. 자, 자세히 보면 아직 카페 문은 안 닫혔다. 케이가 워낙 엄중한 표정으로 긴 대자루를 들고 하염없이 바닥을 쓸고 있는 탓에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몽블랑 시트를 꺼내 식혀둔 재키가 오븐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시계를 봤고, 붐빌 시간에 손..
서간체 작업했습니다(요청 시 가능합니다) 더보기 추신. 이것을 태울 때 무척 보드라운 향기가 흘렀다. 값비싼 종이가 아닌데, 마지막 문장이 타들며 내뿜는 새벽 두 시 경의 꽃향기 같은 건가 봐. 아자르! 경쾌하게 시작해 봤다. 여기 상황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거든? 나야 괜찮지만 옆에 붙은 생짜 신입이 덜덜 떠는 신세야. 일보다 얘 돌보는 게 더 품이 드는 것 같다. 뭐, 난 원래 이런 거 잘해서 상관없긴 해. 너 키운 거 봐라. 얼마나 예쁘게 잘 컸니? 굳이 이러는 거 너도 알겠지만 암울하단 얘기다. 다칠지도 모르는데 알겠지만 내 운수를 보면 다른 놈만 걱정이지. 그래서 마음이 별로야. 서두에서는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이건 못 부칠 것 같군. 이해해. 내가 좀 비밀스러워야 너도 재밌지 않겠냐. 아직 날 ..
2차창작&드림&오마주 AU입니다~ 더보기 나의 살을 베어 흐르는 황혼으로 네 배를 채우라 너희 화심에 오천 명 군중이 당하리라 촛불 빛이 미끄럽고 둥근 곡을 그리며 흐른다. 깨알같이 퍼진 거무스름한 모반이 살갗답게 침묵하긴커녕, 해를 굴절시키는 유리처럼 불을 더 환하게 태워 올린다. 어둠 속에서 피부가 더욱 파리해 보이는 까닭은 온몸에 점점이 박힌 그것이 미인을 뜯어먹는 개미 떼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선이 가느다란 등허리는 땀 냄새가 밴 꽃무늬 시트에서 떠올라 있고, 물렁한 매트리스가 폭 들어가도록 힘을 준 발이 몸을 공중에 지탱하고 있다. 방에서는 다 탄 초의 냄새와 느끼한 왁스와 고인 물 냄새가 난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란은 이 악마의 정체를 대강 유추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더보기 사무사한 외투에 무구를 달아 이상하지 않니 바실리사 벨로프가 말했다. 그는 무복처럼 새하얀 천을 무봉해 지은 옷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코그 모르페는 저 여자가 잠 속의 요정 같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웃으며 무슨, 저건 창백한 마녀일 거라고도 했다. 바실리사의 머리카락은 어딘지 금속질이 감돌아서 세탁 끝에 형형하게 표백된 흰 면사와는 잘 안 어울렸다. 눈밭에 선 맨발처럼. 겨울이었다. 떠도는 이에게도 속옷 겉옷 걸칠 것은 모두 필요했다. 보통 노상에 가서 집어오는 편이었지만, 눈 위에 널어놓고 바래기 한 피륙은 어디에서 구하기 힘든 포목상 보물인지라, 코그는 볼 때마다 사들이고 있었다. 바실리사는 그 사치와 시허연 빛깔이 코지 너와 어울리지 않아, 말했지만 내심 서늘하고 얄팍한 면사가 마음에 드는..
파판14 드림 작업물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있습니다! 더보기 낡아빠진 파피루스와 어린 양과 저글링 계속되는 파멸이 의미하는 바로는 침묵과 비탄, 애도와 망각, 부활하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등 발에 채도록 많겠지만 그라하에게는 어둠보다도 다른 쪽이 더 중요했다. 기록의 소실. 물론, 이 세상에는 유난한 학자들이 많아서 모든 땅이 수몰된다고 해도 남아 있을 기록보관소를 남겼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 목숨과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언제까지나 이어져야 할 사료들이다. 이 점에서 그라하는 또 생각이 달랐다. 역사는 들추어 볼 사람이 없는 한 무가치하다…….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지. 그래서 모험가가 언약하는 거야. 슬픔을 남기려고. 그라하는 그 내용보다도 루시가 ‘우리’라는 단어를 입..
폰부스 타입~ 모바일 게임 드림 작업물입니다! 더보기 타운 전체가 대학 건물로 뒤덮인 주립대 교정에는 별별 사람이 다 모인다. 건물 내부 1층까지는 개방되어 있기도 하고, 강의실 층계는 통제되지만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술에 취해 대마를 빨지만 않으면 들여보내 주는 게 관습이었다. 따라서 2층 여자 화장실은 거의 공중화장실 개념이었고 학생들은 외곽 건물 수업을 들으면서 ‘여기가 학교’라는 관념을 거의 잊은 채였다. 제이크는 이 사실을 잘 몰랐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곧장 기피하고 보았던 그이기에, 애초 도시를 지나 천변 쪽 가옥으로 피신하려 했을 따름인데 중간에 자동차가 뻗어버렸다. 폐차된 차 번호를 단 고물 트럭이 털털거리며 멈추어 서자 담뱃가게 앞에서 해를 쬐고 있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학생이구먼...
폰부스 타입 커미션입니다~ 더보기 분홍 박하와 페인트 공중전화의 단점은 셀 수 없지만, 제일 거추장스러운 걸 꼽자면 공공이용물이니만큼 수신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스텔은 병원의 환자용 공중전화 번호를 알지만 한 번도 걸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낯모르는 여성이 받았고 에스텔은 자기 딸이 걸었다고 착각하는 그에게 붙잡혀 한 시간 내내 통화해야 했다. 그동안 뒤쪽에서 간호사가 인사를 건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묻는 등 잡다한 외부소음도 감당했다. 공공 이용시설 안의 공공이용물 신세란 그런 거지, 하면서 에스텔은 수화기를 내려놓았었다. 실버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게 그때만큼 절절하게 실감 난 적 없었다. 그러니까, 늘 실버가 전화를 걸어왔다. 매일매일. 또는 이틀 걸러 한 번..
샘플 더보기 금화를 쥔 오데트 에이드리안 러셀이 빨간 공주를 탑에 가두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동요 같은 가십이다. 새빨간 술 냄새를 풍기며, 손에서 피가 흐르는 붉은 눈의 사내를 붙잡아 샹들리에 밑으로 끌고 나온 아리아는 여전사로 추앙되었다. 여기에는 귀부인답지 못하다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아리아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의 귀로 들어갔을 게 분명한데도. 그리고, 에이드리안은 상처 입은 용이다. 하필 부인의 탄신연인지라 치장한 의복을 입었던 게 그리되었다. ‘왕자’라고 불리우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여전사 곁엔 살지고 큰 용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지적 때문이었다. 여자들의 살롱에서 정확히 무슨 얘기가 퍼졌는지 그는 몰랐지만, 아리아가 살롱 출입을 하지 않아 더욱 부풀린 소문을 갖고 음유시인을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