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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ㅍ님

나사르 본주 2022. 8. 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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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박하와 페인트

 

 

 

 

 

공중전화의 단점은 셀 수 없지만, 제일 거추장스러운 걸 꼽자면 공공이용물이니만큼 수신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스텔은 병원의 환자용 공중전화 번호를 알지만 한 번도 걸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낯모르는 여성이 받았고 에스텔은 자기 딸이 걸었다고 착각하는 그에게 붙잡혀 한 시간 내내 통화해야 했다. 그동안 뒤쪽에서 간호사가 인사를 건네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묻는 등 잡다한 외부소음도 감당했다. 공공 이용시설 안의 공공이용물 신세란 그런 거지, 하면서 에스텔은 수화기를 내려놓았었다. 실버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게 그때만큼 절절하게 실감 난 적 없었다.

그러니까, 늘 실버가 전화를 걸어왔다. 매일매일. 또는 이틀 걸러 한 번. 간호사가 대신 전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상태가 많이 안정되셨어요.”

에스텔은 그런데 왜 오지 못하느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상대는 언제나 바쁘거나 지쳤거나 지나치게 낭랑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어쩌면 그냥 두려워 일수도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티가 나게 되어 있다는 걸 에스텔은 알았다. 상대방의 바쁘거나, 지쳤거나 지나치게 낭랑한 이유가 실버 때문일까 봐 무서웠다. 그렇지 않다면 직접 전화를 걸었을 테니 말이다.

친구는, 에스텔을 걱정했다. 그 애가 말했다. “, 실버를 너무 믿는 것 같아.” 그 애는 스스로 말을 정정했고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라고 결론 내렸지만 에스텔은 대꾸해줄 말이 없었다. 둘 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너무 믿는다니 말이 안 되지, 실버에게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에스텔은, 슬리퍼를 신은 채 한 손에는 민트 차를 들고, 베란다에 서서 바늘처럼 가느다란 빛을 맞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실버도 그렇게 생각할까?

실버는 자기 자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럴 만큼 사랑받고 자랐을까? 매일 상냥한 얼굴로 아침 인사를 해주는 이웃 친구가 있었을까? 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내던 장난스러운 동급생과 농담을 주고받는 직장 동료가 생겼을까? 있다면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면. 에스텔라스 그레텔, 내가 주는 조그마한 애정 말고는 제외된 젯소 자국뿐인 덧칠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렇다면 에스텔…… 이제 와서 그를 진정으로받아줄래?

깨달음은 깊고 순간은 짧다. 에스텔은 커다란 전화벨 소리에 선득한 몽상에서 깨어났다.

휴대전화는 평소와 같은 데시벨로 울렸고, 발밑에 찻잔이 떨어져 조각나 있었다. 목덜미에서 배어난 식은땀을 후다닥 닦으며 에스텔은 전화부터 받기로 했다. 쏟아진 찻물이 얼음을 띄운 시원한 것이어서 다행이었다. 낙엽 지기 시작했으니까, 다음 주부터는 따듯한 차를 마시기로 했는데.

실버였다.

 

- 에스텔, 잘 지내?

 

이틀 만의 전화였고, 에스텔은 지금 막 깨달은 바를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버의 평화로운 목소리가 재촉하는 머릿속을 적시고 말았다.

에스텔은 포근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병원에 문의를 한 건 실버 본인이었지만, 에스텔이 우겨 두 번째 방문은 같이했었다. 그때 그는 천정이 모스크바의 붉은 지붕처럼 뾰족한 각뿔 형인 공중전화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척 예쁘다. 하지만 좁아 보여.” 그곳은 안뜰이었고, 바깥출입이 제한될 만큼 예후라 좋지 않은 환자는 드나들 수 없었다. 에스텔은 당연히 실버가 이곳에 와 앉아 햇볕을 쬐는 걸 상상했었다.

정말 그럴까? 실버는 진달래처럼 예쁘고 한산한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는 걸까, 아니면 희끔한 녹색 칠 된 병원 내부 전화로 연락하는 걸까? 에스텔은 이 수신번호가 둘 중 어디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통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자마자 전화를 걸어온 건 실버였기 때문에.

 

- 나 잘 지내

 

하고, 에스텔은 맛없는 투로 답했다. 아는 것보다 공백이 훨씬 커서, 어디서부터 알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학생처럼 주눅이 든 목소리였다. 실버가 저편에서 웃었다.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밖일 것이다.

있잖아, 하고 에스텔은 말문을 뗐다.

 

- 옆집 할머니께서 그 청년 어딨냐고 하시더라구. 통 못 봤다고 말야.

- , 곧 겨울이지.

 

실버는 매년 눈삽을 들고 오가던 일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스텔은 무심코 싱긋 미소 지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할머니 손자네가 들르지 않는대. 멀리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가기로 했어.

- 정말?

- 정말이야.

 

에스텔은 말하는 내내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실버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를 생각해보는 듯 숨소리는 차분했다. 에스텔, 하고 실버가 말했다. 나 여기서 더 지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 맞아. 하지만 나는…… 기다리고 있어.

- , 얼른 보고 싶다. 여기서 말고우리 집에서. 여기 밥 맛이 없거든.

- 정말? 싱겁거나 그래?

- 어쩐지 심심한 맛이야. 반찬 양이 다 똑같아서, 약을 먹는 기분도 들어.

- 어제는 왜 전화 못 한 거야?

 

에스텔이 물었다. 전이라면 당연한 듯이 명랑하게 추궁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혹여 실버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까 봐, 혹은 에스텔 자신의 본의가 이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올 대답은 알고 있었다. 그걸 듣고 싶어서 이야기한 거니까. 실버가 대답했다.

전화선을 넘어 전송되는 목소리는 왜 한없이 서글프게만 들리는지, 에스텔은 내 목소리도 그럴까, 하며 들리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었다. 원래는 서로 영상통화도 하고 그랬는데. 음질이나 화질에 전연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에 네가 있는 게 당연했으므로.

에스텔은 자기가 깨달은 바를 그제야 알았다. 실버는 거기에 없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느리고 둔중한 것을 짊어진 표정으로, 문득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에스텔이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면. 그가 받지 않았다면,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하루쯤 서먹하게 지나치기라도 했다면 실버는 여기에도, 이 통화를 하는 부스 안에도 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실버는 에스텔과 같이 사근사근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부족해서 여태 혼자였을지 모른다…… 감히 이런 추측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는 아팠을 수도 있다.

젯소질을 할 땐 꼭 마스크와 장갑을 낀다. 유독한 냄새가 나므로, 들이마시어선 안 되고 또 창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들었다. 말릴 때나 그렇게 만든 캔버스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텔은 실버의 방 창문이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 몰랐다. 처음이어서 기뻤던 시절을 지났기 때문에, 처음이라면 그는 슬플 것이다. 에스텔이 마시지 않아야 한다 배워온 냄새를 실버는 잠을 잘 때나 일할 때나 공기처럼 여겼을 테다. 코가 무뎌져 그게 독한 줄 모르고.

부서진 머그잔 조각, 제일 예리한 빗면으로 빛이 흐르고 있다. 선명한 가을 햇살은 광이 나게 칠한 태양 자체 같아서 에스텔은 한쪽 눈을 가렸다. 눈가가 시었다.

나무 바닥에 화한 향 풍기며 찻물이 스며들고 있다. 아마 올가을엔 저 흔적을 보고 지내야 하리라.

실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텔은 천천히 덧붙였다, 웃으면서.

 

- 괜찮아. 내일 또 하자. 거기선 크리스마스 때 뭐 먹어?

- ……. 일단 크림 케이크 한 판을 주진 않을 거야.

- 당연하지. 내가 들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엄청나게 큰 거.

- 만들어서?

- .

 

실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여기 볕이 참 좋다고 했다. 네가 봤다던, 모스크바 광장의 그 성 있잖아. 작은 성. 그래, 넌 진달래색이라고 했었지. 난 가득 핀 진달래도 붉은 광장도 모르니까, 새해가 오면 거기에 가자고, 실버는 말했다.

에스텔은 그가 몸을 구겨, 칠이 벗겨져 우스운 고깔모자를 쓴 걸 상상했다. 그러자 마주 웃을 수 있었다. 분명 그 위에는 버찌 맺힌 가로수 가지가 늘어져 있었지. 부스 맞은편에는 계단을 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처마가 있었는데, 지붕이 헐어 있었지만 여러 번 덧칠해 견고한 데다가, 큼지막한 홈이 나 있어 빗물을 쉽게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때 실버는 문득 낙숫물이 바닥을 팼다면서 아래를 가리켰다.

실버는 아침 식사를 하고, 방침에 따라 담요를 갰을 거다. 어쩌면 두 개가 반대로일 수도 있고. 반듯한 침상을 나서서 누구든 간에 인사해주는 간호사와 오늘 자 기분을 묻는 의사를 지나서, 프런트 데스크의 알이 작은 박하사탕을 한 줌 쥐고 나와 입에 털어 넣는다. 스티로폼 가루처럼 알알이 빛나는 설탕이 녹아 몸에 스미는 기쁨을 누리며 아침볕을 만끽했고, 사위가 조용하기에 자주 들르는 동박새와 멧비둘기가 도망치는 걸 아쉬운 듯 보면서 곧장 전화를 걸러 왔다. 수화기를 들고 나서야 손금에 진득하게 묻은 설탕물이 수화기에 들러붙는 걸 느끼고는 깜짝 놀랐겠지. 그럼 에스텔은 아끼던 컵을 깨었다고, 대신 새로 사 온 커피잔 세트가 아주 희다고 말할 거였다.

코끝이 화했다. 이처럼 내일이 선한 하루는 한 번도 없었다. 슬픔이 나긋하다는 걸 에스텔은 깨달았다.

그럼 안녕, 하고 그가 먼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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